신행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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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행은 신라 시대의 승려로, 《단속사신행선사비》에 따르면 경주 출신이며 안홍선사의 형의 증손자이다. 734년 출가하여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귀국하여 ‘마음이 곧 무심’이라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제도했다. 당나라에서 지공화상에게 가르침을 받고 당 숙종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779년 단속사에서 입적했으며, 그의 사후에 영정이 단속사에 모셔지고 비가 세워졌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는 신행을 신라 선종의 계승자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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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 (신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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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 (신라) | |
활동 시기 | 7세기 |
국적 | 신라 |
직위 | 대나마 |
활동 분야 | 불교 |
생애 | |
출생-사망 | 미상 |
주요 활동 |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신라 불교 발전에 기여함 |
업적 | 당나라 유학 후 귀국 원효와 함께 미륵삼부경과 관련된 주석서를 저술 정토 신앙 전파에 기여 |
저서 | |
미륵삼부경소 | 미륵삼부경에 대한 주석서 (원효와 공동 저술) |
2. 생애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愼行禪師碑)》는 신행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신행의 가계, 출가, 당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입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행은 동경(東京) 어리(御里) 사람으로 아버지는 급간(級干) 상근이며, 안홍(安弘)선사의 형의 증손자에 해당한다.[1] 성덕왕 33년(734년) 30세에 출가하여 운정율사를 섬기며 수행하였고, 선종을 배우고 귀국한 법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법랑은 신행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법을 전하였다.
스승 법랑이 입적한 후, 신행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도적으로 오인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석방 후 지공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당나라 숙종은 신행의 재능을 칭찬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신라로 돌아온 신행은 단속사에서 "마음을 보라"는 가르침을 펴다가 혜공왕 15년(779년)에 입적하였다.[1]
신행이 입적하고 24년 뒤인 헌덕왕 5년(813년)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영정이 단속사에 모셔졌고, 부도와 비석이 세워졌다. 비문은 수성부령 김헌정이 짓고, 동계사의 승려 영업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비석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탁본만 전해진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는 당나라의 선종 계보가 신라의 법랑, 신행, 준범, 혜은, 도헌(지증대사)으로 이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출가 전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愼行禪師碑)》에 따르면 신행은 동경(東京) 어리(御里) 사람으로 아버지는 급간(級干) 상근이며, 안홍(安弘)선사의 형의 증손자에 해당한다고 한다.[1]2. 2. 출가와 초기 수행
성덕왕 33년(734년) 30세에 출가하여 운정율사를 섬기며 바리때 하나와 옷 한 벌로 2년간 고행하였다.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귀국하여 호거산에서 설법하던 법랑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법랑에게 배운 지 이레 만에, 법랑이 옳고 그름을 묻는 질문에 "마음이 곧 무심"(卽心無心)[1]이라 대답하자 법랑은 감탄하며 "이제 마음 등불의 법은 모두 너에게 있다"며 그가 더 배울 것이 없음을 선언하였다고 한다.2. 3. 당나라 유학
법랑이 입적하고 3년 뒤, 신행은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들어갔으나 현지에서 도적으로 오인받아 240일 동안 양주 감옥에 구금되었다.[1] 오해가 풀려 석방된 뒤 지공화상을 찾아가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정성을 보인지 3년 만에 가르침을 받았고, 지공은 열반에 들기 전 신행에게 관정을 내리고 "돌아가라, 존경스러운 인재여.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미혹된 나루를 깨치라. 깨달음의 바다를 높이 떨치라."는 수기를 내렸다. 당나라 숙종도 그에게 "용이 바다를 건너는데 배를 의지하지 않고/봉황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으면서 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글을 지어 주었는데, 신행은 여기에 "산이 새를 가릴 수 없으나 새는 산을 가리고, 바다는 용을 가리지 않으나 용은 능히 바다를 가린다"는 게송으로 대답하였다고 한다.2. 4. 귀국 후 활동과 입적
신라로 귀국한 신행은 "마음을 보라"는 한 마디로 사람들을 제도하는 등 가르침을 폈다. 혜공왕 15년(779년) 10월 21일에 남악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1] 향년 76세(법랍 46세)였다.3. 사상과 영향
신행은 신라의 승려로, 선종 불교를 널리 알린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한국 불교, 특히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이 작성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는 신행의 선종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3. 1. 선종 계보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는 당나라 북종선 제4조인 쌍봉도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의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 도헌(지증대사)으로 이어지는 선종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1]4. 유적과 유물
신행과 관련된 유물로 단속사에 세워졌던 단속사신행선사비가 있으나, 현재 비석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탁본만 전해진다.[1]
4. 1. 단속사신행선사비
헌덕왕 5년(813년) 9월 9일에 신행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영정이 단속사에 모셔졌고, 부도와 행적을 기록한 비가 단속사에 세워졌는데, 이를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愼行禪師碑)라고 한다. 비문을 지은 것은 당시 재상인 수성부령 김헌정(金獻貞)이었고, 동계사의 승려 영업이 비문을 썼다고 한다. 비석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그 탁본만이 남아 있다.[1]참조
[1]
서적
선문촬요
[1]
서적
사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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