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댜틀로프
1. 개요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1931년 소련에서 태어나 핵 기술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73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부임하여 3호기 및 4호기를 담당했다. 그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에서 발생한 사고 당시 시험을 감독했으며, 이 사고로 인해 안전 규정 미준수 혐의로 기소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사면된 후, 그는 사고의 책임을 설계 결함으로 돌리는 주장을 펼쳤으며, 1995년 방사선 중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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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사고의 피폭자 -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화재 진압을 지휘하고 4,000mSv의 방사능 피폭을 감수하며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사고 후유증으로 암으로 사망한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소방관이다. -
체르노빌 사고의 피폭자 -
빅토르 브류하노프
빅토르 브류하노프는 소련의 엔지니어로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건설을 지휘하고 사고 후 관리 소홀의 책임을 져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 후 에너지 분야에서 근무했다. -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출신 -
예브게니 아발라코프
예브게니 아발라코프는 소련 등반가로, 스탈린 시대 대숙청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동생의 저서와 아나톨리 페라폰토프의 글, 그리고 리스크닷루의 "처형 시대"를 통해 알려졌다. -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출신 -
알렉세이 슈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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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학자 -
니콜라이 리시코프
니콜라이 리시코프는 소련의 정치인으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의장을 역임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체르노빌 사고 수습과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에 기여했으며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하원 의원을 지냈다. -
소련의 공학자 -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니콜라이 파트루셰프는 러시아의 정치인이자 정보기관 출신 관료로, 연방보안청 국장과 러시아 연방 안전 보장 회의 서기를 역임하며 러시아 안보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고, 강경한 반서방적 시각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1931년 소련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에서 태어나 1959년 국립 연구 핵 대학교 MEPhI(모스크바 공학 물리학 연구소)를 졸업했다. 졸업 후 콤소몰스크나아무르의 조선소에서 잠수함 원자로 설치하는 일을 하였다. 1973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부임하여 4기의 원자로 가동에 참여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1931년 3월 3일 소련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남부 수호부짐스키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가난했고, 예니세이강과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교도소 부근에서 살았다. 그는 14세에 집을 나왔다. 댜틀로프는 노릴스크의 광업 및 야금 기술학교 전기 공학과에서 직업 학교를 다녔고, 3년 동안 전기 기술자로 일하다가 1959년 국립 연구 핵 대학교 MEPhI(모스크바 공학 물리학 연구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2.2. 초기 경력
댜틀로프는 1959년 국립 연구 핵 대학교 MEPhI(모스크바 공학 물리학 연구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콤소몰스크나아무르의 조선소에서 잠수함 원자로 설치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핵 사고로 100 rem (1.0 Sv)의 방사선량에 노출되었는데, 이는 가벼운 방사선 증상, 구토, 설사, 피로 및 감염 저항력 감소를 유발하는 선량이다.
3.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1973년 빅토르 브류하노프의 부름을 받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프리피야트로 이주했다. 댜틀로프는 모스크바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콤소몰스크나아무레의 조선소에서 잠수함 원자로 설치 업무를 담당하는 등 뛰어난 인재였다.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4기의 원자로 가동에 모두 참여했다.
1986년 4월 26일, 댜틀로프는 4호기에서 수행된 실험을 감독하던 중 체르노빌 재앙을 맞게 된다. 그는 시험 계획보다 낮은 200MW로 출력을 낮추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후 예상치 못한 원자로 정지 상황에서 출력을 다시 올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운영자들은 제논 중독과 원자로의 설계 결함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놓였고, 결국 원자로가 폭발했다. 댜틀로프는 사고 당시 650 뢴트겐(6.5 Sv)의 방사선량에 노출되었으나, 생존하였다.
3.1. 부임 및 경력
1973년, 우크라이나 SSR 프리피야트로 이주하여 새로 건설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근무하였다. 소련 극동 지역 해군 원자로에서 14년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르노빌 발전소 최고 책임자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3호기와 4호기를 담당했으며, 원자로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자부하며 주 6일 또는 7일 동안 장시간 근무했다.
3.2. 관리 스타일
댜틀로프는 매우 엄격하고 완벽주의적인 관리 스타일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 6일 또는 7일 동안 장시간 근무하며 원자로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자부했다. 그의 명령을 철저히 따르지 않는 직원은 자주 꾸짖음을 당했다.
하지만 댜틀로프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일부 직원들은 그의 정직함, 책임감, 헌신적인 면모와 지식을 존경했다. 반면, 그의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직원들은 그를 강하고, 완고하며, 불공평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댜틀로프의 관리 스타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4. 체르노빌 사고
1986년 4월 26일, 댜틀로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에서 நடந்த 실험을 감독하던 중,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인 체르노빌 재앙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댜틀로프는 원자로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자부하며 주 6일 또는 7일 동안 장시간 근무했다. 그의 관리 스타일은 엄격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직원을 자주 질책했다. 일부 직원들은 그의 지식을 존경하고 정직하며 헌신적인 인물로 평가했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를 강하고 완고하며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사고 이후, 소련최고법원은 댜틀로프에게 중대한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하여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는 키예프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1990년 건강상의 이유로 가석방되었다. 댜틀로프는 사고 원인이 발전소 직원의 실수가 아니라 RBMK형 원자로의 구조적 결함과 설계 문제에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집필했다. 그는 가석방 후 치료를 위해 독일 뮌헨으로 건너갔다가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1995년 12월, 댜틀로프는 키이우에서 사고 당시 과도한 방사능 노출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1. 사고 전개 과정
1986년 4월 26일, 댜틀로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에서 시험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이 시험은 체르노빌 재앙으로 이어졌다. 준비 과정에서 댜틀로프는 시험 계획에 명시된 700MW보다 낮은 200MW로 출력을 줄이라고 명령했다. 이후 시험 준비 과정에서 원자로가 예상치 못하게 정지되었다.
댜틀로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제어실에서 원자로 출력이 약 50~70MW인 것을 확인했다. 알렉산드르 아키모프에게 낮은 출력의 이유를 묻자, 아키모프는 자동 제어봉 제어 시스템 간 전환 시 출력이 30MW로 감소했다고 답했다. 댜틀로프는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하여 추가적인 전력 증가를 허용했다.
이 시점에서 출력을 올리면 제논 중독과 당시 운영자들이 알지 못했던 원자로의 문서화되지 않은 설계 결함으로 인해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원자로가 30MW 이하에서 멈춘 후 전력 레벨을 올린 것이었다. 운영 매뉴얼은 모순되었고 명확한 정의가 부족하여 시험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되었다.
위험한 수의 제어봉을 인출하는 동안, 운영자들은 제논 중독으로 인해 200MW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험 도중에 아키모프는 원자로를 정지시키기 위해 AZ-5 스크램 버튼을 누르라고 외쳤다. 몇 초 후, 원자로가 폭발했다.
폭발 후, 댜틀로프는 제어봉을 수동으로 삽입하라고 명령했다. 너무 늦어, 그는 자신의 명령을 철회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냉각을 시도하기 위해 원자로에 물 순환을 증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대부분의 시스템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원자로 작업장 감독관은 원자로가 파괴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제어실로 돌아왔지만, 댜틀로프는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4.2. 사고 당시 댜틀로프의 행동
폭발 직후, 댜틀로프는 제어봉을 수동으로 삽입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명령을 철회했다. 그는 원자로 냉각을 위해 물 순환을 늘리라고 지시했으나, 대부분의 시스템이 파괴된 상태였다. 원자로 작업장 감독관이 원자로 파괴를 보고했음에도, 댜틀로프는 이를 믿지 않았다.
댜틀로프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어실을 떠났고, 실종된 발전소 직원 발레리 호뎀추크를 찾으려 했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인해 몸이 약해지고 구토 증세를 보이자, 제어실에서 운영 기록을 수집해 브류하노프에게 보고하기 위해 행정 건물로 향했다. 사고 당시 댜틀로프는 650 뢴트겐 (6.5 Sv)의 방사선량에 노출되었는데, 이는 30일 후 피폭자 50%가 사망하는 수치이다. 그러나 댜틀로프는 이 사고에서 생존했다.
5. 사고 이후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댜틀로프는 프리피야트 병원을 거쳐 모스크바 병원 6번에서 방사선 피폭 치료를 받았다. 니콜라이 포민, 빅토르 브류하노프와 함께 안전 규정 미준수 혐의로 기소되어 1987년 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댜틀로프는 RBMK 원자로의 결함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쓰고, 톱투노프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1990년 건강상의 이유로 가석방된 후,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이 발전소 설계 결함에 있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조사에서는 원자로 설계와 안전 정보 전달 방식의 문제점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댜틀로프는 1995년 키이우에서 방사선 피폭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5.1. 병원 치료 및 회복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에 입원하여 처음에는 치료를 거부하고 잠만 자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모스크바 병원 6번으로 이송되었다. 4월 28일까지 방사선 질환 증상은 대부분 완화되었다. 입원 기간 동안 그는 사고의 가능한 원인에 대해 아키모프와 톱투노프와 논의했지만, 그들은 원인에 대해 당황했다. 댜틀로프의 상태는 방사선 노출의 지연된 영향으로 인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병원 치료 덕분에 회복되었고, 종종 치명적인 방사선량을 견뎌냈다.
5.2. 재판 및 수감
니콜라이 포민, 빅토르 브류하노프와 함께 댜틀로프는 안전 규정 미준수로 기소되었다. 1987년 7월 6일 체르노빌 마을의 문화궁전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국가에서 초청한 사람들만 재판을 방청할 수 있었다. 피고는 브류하노프, 포민, 댜틀로프, 발전소 교대 감독 보리스 로고즈킨, 원자로 부서 책임자 알렉산더 코발렌코, 검사 유리 라우시킨 등 6명이었다. 댜틀로프만이 사고 책임이 운영자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계속 싸웠다.
댜틀로프는 원자로가 정지되었거나 출력 수준이 증가했을 때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여러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 반박되었다. 원자로 설계 결함은 법원에서 고려되지 않았고, 설계에 관여한 모든 전문가 증인들은 비난을 피하려 했다. 6명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고 댜틀로프는 최고 형량인 10년을 선고받았다.
댜틀로프는 감옥에서 자신이 발견한 RBMK 원자로의 결함을 설명하고 자신과 다른 운영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편지를 썼다. 그는 톱투노프의 가족에게 냉각수를 원자로에 복구하려고 시도했던 상황을 편지로 적었다. 방사선 노출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인해 1990년 말 사면을 받았다.
5.3. 가석방 및 사망
소련최고법원은 댜틀로프에게 체르노빌 사고의 책임을 물어 징역 10년을 선고했고, 그는 키예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0년 말 건강 악화로 가석방되었다. 그는 1991년 Nuclear Engineering International에 논문을 발표했고, 저서를 통해 사고의 주요 원인이 발전소 인력이 아닌 열악한 발전소 설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댜틀로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영어
> 이 프로그램은 실행되어야 했으며, 그것은 규정과 프로젝트 설계 문서의 요구였다... 사고는 당시에는 명확하지 않았던 원자로의 완전히 부적절한 특성으로 인해 발생했다. ... 그들은 우리가 전력 손실 후 원자로 출력을 증가시켜 규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위반 사항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규정 요구 사항에 따라 수행되었다... 비상 상황에서 핵분열을 멈추도록 설계된 원자로 보호 시스템은... 원자 폭탄 기폭 장치의 역할을 했다.
이후 원자력부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사 결과 원자로 설계와 운영자에게 안전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댜틀로프는 1995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골수암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사고로 인한 방사선 중독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6. 미디어에서의 묘사
댜틀로프는 2004년 시리즈 《제로 아워: 체르노빌의 재앙》에서 이고르 슬라빈스키가, 2006년 BBC 제작 《생존 재앙: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에서 로저 알보로가, 2019년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에서 폴 리터가 연기했다.
댜틀로프의 회고록은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94년에 녹음되었다. 이 녹음은 익명의 운영자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2016년 유튜브에 공개되었고, 2019년에는 영어 자막 버전이 제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