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가게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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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는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동생 아사쿠라 가게타카의 아들로,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사촌이며, 아사쿠라 가문의 중신이었다. 그는 오노 군을 거점으로 에치젠국에서 활약하며, 가가 잇코잇키 정벌과 가네가사키 전투 등에서 아사쿠라 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 속에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배신하고 자결하게 한 뒤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쓰치바시 노부아키라'로 개명했으나, 에치젠 잇코잇키 세력에 의해 헤이센지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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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쿠라 가게아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씨족 | 아사쿠라 씨 |
| 가명 | 손하치로 |
| 이명 | 아사쿠라 가게아키라 쓰치바시 노부아키라 |
| 생몰 | 1529년 ~ 1574년 5월 4일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 관직 | |
| 관위 | 식부대보, 에치젠 국 오노 군 군지 |
| 가족 관계 | |
| 부 | 아사쿠라 가게타카 |
| 모 | 가라스마루 후유미쓰의 딸 |
| 형제 | 아사쿠라 가게아키라 가게쓰구 아리시게? |
| 자녀 | 아들 2명 |
| 주요 활동 | |
| 주군 | 아사쿠라 요시카게 오다 노부나가 |
2. 생애
1573년 8월, 오다 노부나가가 오다니성을 포위하자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아자이 구원에 나섰으나 패배, 오히려 노부나가의 에치젠국 침공을 초래했다(이치조타니 전투).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는 요시카게에게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오노 군에서 재기하자고 제안했으나, 요시카게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한 뒤 군사로 포위, 요시카게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가게아키라는 요시카게의 어머니 고토쿠인 등 처자와 긴주(近習)를 요시카게의 수급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바치고 항복, 고토쿠인 등은 처형되었다.[5][6]
이후 상경하여 본령을 안도받고 '''쓰치바시 노부아키라'''로 개명했다. 그러나 1574년, 가쓰라다 나가토시를 멸하고자 도미타 나가시게가 일으킨 쓰치 잇키가 에치젠 잇코잇키로 번져 헤이센지에서 농성하다 전사했다.[5] 불과 3기로 적진에 돌입하여 싸우다 죽었으며, 남겨진 12세(10세?)와 6세 아들도 처형되었다(朝倉始末記|아사쿠라 시말기일본어). 노부나가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2. 1. 아사쿠라 가문의 중신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동생 아사쿠라 가게타카(朝倉景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사촌에 해당한다(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5]).아사쿠라 집안에서 오노 군의 군지를 맡아 에치젠국 오노군의 亥山城|이야마 성일본어[6]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아사쿠라 집안 행사의 석차 등 아사쿠라 가문의 무사들 가운데에서도 필두 지위였다고 추정되며, 아사쿠라 군의 총대장(당주의 묘다이名代등)으로 출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1564년의 가가 잇코잇키 정벌과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 당시 오다 군을 추격하였으며, 오미 국 · 미노 국에 출진(시가의 진)했을 때에도 가게아키라가 총대장으로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 후, 주로 기나이에서 오미의 오다 세력과의 사투와 아사쿠라 집안의 권력 다툼 등을 거쳐 가게아키라와 당주 요시카게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572년 오다 노부나가는 기타오미의 아자이 씨(아사쿠라 씨와 동맹)의 거성 · 오다니성(小谷城)의 눈앞에 요새를 구축하였다.[7] 이때 가게아키라는 두 차례에 걸쳐 오다니 성에 원군으로 파견되었는데, 이 출진 중에 마에하타 요시쓰구(前波吉継, 훗날의 가쓰라다 나가토시) · 도미타 나가시게(富田長繁) · 게야 이노스케(毛屋猪介) 등이 오다 군으로 돌아서버렸다.
2. 2. 오다 가문과의 전투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동생 아사쿠라 가게타카(朝倉景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사촌에 해당한다(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5]). 아사쿠라 집안에서 오노 군(大野郡)의 군지를 맡아 에치젠국 오노군의 亥山城[6]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아사쿠라 집안 행사의 석차 등 아사쿠라 가문의 무사들 가운데에서도 필두 지위였다고 추정되며, 아사쿠라 군의 총대장(당주의 묘다이名代등)으로 출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특히 에이로쿠 7년(1564년)의 가가 잇코잇키 정벌과 겐키 원년(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 당시 오다 군을 추격하였으며, 오미 국 · 미노 국에 출진(시가의 진)했을 때에도 가게아키라가 총대장으로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 후, 주로 기나이에서 오미의 오다 세력과의 사투와 아사쿠라 집안의 권력 다툼 등을 거쳐 가게아키라와 당주 요시카게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겐키 3년(1572년) 오다 노부나가는 기타오미의 아자이 씨(아사쿠라 씨와 동맹)의 거성 · 오다니성(小谷城)의 눈앞에 요새를 구축하였다.[7] 이때 가게아키라는 두 차례에 걸쳐 오다니 성에 원군으로 파견되었는데, 이 출진 중에 마에나미 요시쓰구(前波吉継, 훗날의 가쓰라다 나가토시桂田長俊) · 도미타 나가시게(富田長繁) · 케야 이노스케(毛屋猪介) 등이 오다군으로 돌아서버렸다.
덴쇼 원년(1573년) 8월, 오다니 성을 포위한 오다 군에 맞서 기타오미 지역으로 출병하던 무렵에는 군사 행동이 거듭되어 군사들도 지쳐있다는 이유로 출전을 거부했다. 요시카게는 스스로 아자이를 구원하러 출전하지만 거꾸로 패배하고,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을 초래했다(이치조타니 전투). 가게아키라는 요시카게에게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퇴각해서 자신의 영지인 오노 군에서 재기하자고 진언했다. 그러나 가게아키라는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도망쳐 온 요시카게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해놓고 군사를 일으켜 이를 포위,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결로 몰아갔으며 생포한 요시카게의 어머니 고토쿠인을 비롯한 요시카게의 처자 · 긴주(近習)를 요시카게의 수급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바치며 항복을 빌었다.
2. 3. 아사쿠라 요시카게 배신
덴쇼 원년(1573년) 8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씨의 거성 오다니성을 포위하자,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아자이 씨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러나 오다 군에게 패배하고,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을 초래했다(이치조타니 전투).[7] 이때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는 요시카게에게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자신의 영지인 오노 군에서 재기하자고 제안했다.하지만 가게아키라는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도망쳐 온 요시카게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한 뒤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포위했다. 결국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자결했고,[5] 가게아키라는 생포한 요시카게의 어머니 고토쿠인을 비롯한 요시카게의 처자와 가신들을 요시카게의 수급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바치며 항복을 청했다. 노부나가는 항복을 받아들였고, 고토쿠인 등 요시카게의 가족들은 노부나가의 명으로 모두 처형되었다.[6]
2. 4. 오다 가문에 투항과 죽음
덴쇼 원년(1573년) 8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씨의 거성 오다니성을 포위하자,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직접 아자이 씨를 구원하러 출진했지만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을 초래했다(이치조타니 전투).[7] 이때 가게아키라는 요시카게에게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자신의 영지인 오노 군에서 재기하자고 제안했다.그러나 가게아키라는 이치조타니를 버리고 도망쳐 온 요시카게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한 뒤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포위,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결하게 만들었다.[5] 그리고 요시카게의 어머니 고토쿠인을 비롯한 요시카게의 처자, 긴주(近習)를 생포하여 요시카게의 수급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바치며 항복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항복을 받아들였고, 고토쿠인 등 요시카게의 가족들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모두 처형되었다.[6]
이후 가게아키라는 상경하여 본래 영지를 안도받고, 노부나가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쓰치바시 노부아키라로 개명했다. 그러나 덴쇼 2년(1574년), 가쓰라다 나가토시를 멸망시키고자 도미타 나가시게가 일으킨 쓰치 잇키가 에치젠 잇코잇키로 번지자, 잇키 군세의 표적이 된 헤이센지에서 농성하다 전사했다.[5] 전사할 당시 이미 열세라는 것과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후, 불과 3기(騎)만을 거느리고 적진에 돌입하여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또한 남겨진 12세(혹은 10세)와 6세의 아들도 잡혀 처형되었다(아사쿠라 시말기). 이때 노부나가는 노부아키라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3. 인물 · 일화
주군이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배신하고 실질적으로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으로 이끌었기 때문인지, 가게아키라는 '아사쿠라 시말기(朝倉始末記)' 등의 군기물에서 상당히 교활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에이로쿠 7년(1564년) 9월 가가의 진중에서 동족인 가게미쓰와 말다툼을 벌였는데, 가게미쓰는 그 논쟁에 패해 결국 자결했다.[8]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사쿠라 가게쓰네의 후诘(後詰)로 출전하면서도 후추(府中)보다 먼저 진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으며,[9] 요시카게의 마지막 출진 때도 '피로'를 이유로 참진을 거절하는 등[10] 음습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주군을 배반하는 등의 변절에 대해 "日のもとに かくれぬその名あらためて 果は大野の土橋となる"라고 읊었다고 한다.
4. 관련 작품
- 아카가미 료(아카가미 료]) 『취한 코끼리의 격식 아사쿠라 성쇠기』(고단샤, 2018년 12월 18일)
- 아카가미 료 『취상의 유파 아사쿠라 성쇠기』(고단샤, 2018년 12월 18일)
5.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문서
朝倉義景#人物・評価
[3]
문서
別名は土橋城。戌山城や大野城 (越前国)とは別。
[4]
문서
虎御前山城
[5]
문서
朝倉義景#異説
[6]
문서
別名は土橋城。戌山城や大野城 (越前国)とは別。
[7]
문서
虎御前山城
[8]
서적
朝倉義景
吉川弘文館
[9]
서적
朝倉義景
吉川弘文館
[10]
서적
朝倉義景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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