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폰수 페드루 지 브라질 황태자
1. 개요
아폰수 페드루 지 브라질 황태자는 1845년 브라질의 페드루 2세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브라질 제국의 왕위 계승자였다. 그의 탄생은 제국 전역에 기쁨을 안겨주었고, 아버지 페드루 2세의 성격과 통치 방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847년, 두 살 반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페드루 2세는 큰 슬픔에 잠겼고, 제국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폰수의 죽음은 페드루 2세가 왕위를 이을 여성 상속자를 준비시키지 않게 했고, 결국 브라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여러 훈장을 수여받았고, 브라질 역사 지리 연구소의 명예 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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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브라질 제국의 황태자 |
|---|---|
| 전체 이름 | 아폰수 페드루 지 알칸타라 크리스티아누 레오폴두 필리피 에우제니우 미겔 가브리에우 하파엘 곤자가 |
| 다른 이름 | 돔 아폰수 페드루 |
| 왕가 | 브라간사 왕가 |
| 아버지 | 페드루 2세 |
| 어머니 | 테레사 크리스티나 |
| 출생일 | 1845년 2월 23일 |
| 출생지 | 자우 크리스토버우 궁전,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제국 |
| 사망일 | 1847년 6월 11일 |
| 사망지 | 자우 크리스토버우 궁전,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제국 |
| 매장지 | 성 안토니오 수녀원, 리우데자네이루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 전임자 | 자누아리아 황녀 |
|---|---|
| 후임자 | 이자베우 황태녀 |
| 사망 원인 | 간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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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계 브라질인 -
마리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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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계 브라질인 -
페드루 2세 (브라질)
페드루 2세는 1825년 브라질에서 태어나 1831년 브라질 황위에 올랐으며, 노예 제도 폐지, 교육, 과학,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쿠데타로 폐위되어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
1847년 사망 -
펠릭스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은 1809년 독일에서 태어난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이며,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바흐의 음악 부활에 기여했으며,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했다. -
1847년 사망 -
쇼이쿠왕
쇼이쿠왕은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의 제18대 국왕이자 류큐 국왕(재위 1835년 ~ 1847년)으로, 아버지 쇼코 왕의 사망 후 즉위하여 재정 재건 정책을 펼치고 학문 진흥에 힘썼으며,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 제한적인 교류를 허용했다. -
1845년 출생 -
가브리엘 포레
가브리엘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음악 교육자로서, 프랑스 가곡의 거장으로 불리며 파반느, 레퀴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야상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
1845년 출생 -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루트비히 3세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독일 혁명으로 퇴위하여 왕국은 멸망했다.
2. 탄생과 배경
아폰수는 1845년 2월 23일 13시 35분, 브라질 제국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상 크리스토방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황제 페드루 2세와 테레사 크리스티나 황후 사이의 아들이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돔(Dom)이라는 경칭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은 브라간사 왕가( Bragançapor )의 창시자인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당시 브라질 주재 미국 공사는 아폰수의 탄생 소식이 "로켓과 포병의 축포로 전해졌으며, 궁정에서 성대한 축제가 이어졌고 온갖 종류의 조명과 전시, 그리고 대중의 환호가 뒤따랐다"고 기록했다. 브라간사 왕가의 전통에 따라 아폰수의 탄생은 황실 궁정에서 공식 행사로 치러졌다. 페드루 2세는 갓 태어난 아들을 궁전에 모인 군중에게 직접 보여주며 "신사 여러분, 신께서 왕자를 주셨습니다..."라고 선언했으나, 감정에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브라질 제국은 남성 후계자를 절실히 원했기에, 아폰수의 탄생은 제국 전역에서 큰 기쁨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이스 알베스 데 리마 이 실바(당시 남작, 훗날 카시아스 공작)는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자 탄생 소식에 나보다 더 기쁜 사람은 없었다"고 적었다.
2.1. 가계
아폰수는 아버지 황제 페드루 2세를 통해 브라간사 왕가의 브라질 분파 일원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돔(Dom)이라는 경칭으로 불렸다. 어머니 테레사 크리스티나를 통해서는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와 연결되어, 유럽의 여러 왕가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2.1.1. 조상
아폰수는 그의 조상인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아들이자 브라간사 왕가Bragançapor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아버지 황제 페드루 2세를 통해 그는 브라간사 왕가의 브라질 지부의 일원이었다. 그는 황제 페드루 1세의 손자이자 여왕 마리아 2세의 조카였다. 어머니 테레사 크리스티나를 통해서는 프란체스코 1세의 손자였으며, 페르디난도 2세의 조카였다.
아래는 아폰수 황태자의 가계도이다.
3. 생애와 영향
아폰수 황태자는 건강하게 태어났으며, 페드루 2세의 장남이자 브라질 제국의 명백한 계승자로서 황태자 칭호를 받았다. 그의 탄생은 아버지 페드루 2세의 성격 변화와 부부 관계 개선 등 황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1. 아버지와의 관계
황태자의 탄생은 아버지 페드루 2세의 성격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다소 내성적이었던 페드루 2세는 아들이 태어난 후 군주로서 더욱 외향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정략결혼으로 인해 서먹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아폰수를 비롯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공동의 관심사가 생겨나 애정 어린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폰수는 건강하게 태어나 페드루 2세의 장남이자 브라질 제국의 명백한 계승자로서 황태자 칭호를 받았다. 어린 아폰수는 특히 얼굴, 머리카락, 눈 등이 아버지 페드루 2세를 많이 닮았다. 왕위를 이을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아폰수는 아버지 페드루 2세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페드루 2세는 아폰수가 태어난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는 둘째 아이인 이자벨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누나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편지에는 "여기에는 나, 황후, 그리고 점점 더 귀여워지는 어린 아이들, 특히 이미 걷고 있고, 아직은 반쯤 이해할 수 없지만 매력을 더하는 많은 단어를 말하는 어린 아폰수의 건강 상태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4. 죽음
1847년 6월 11일, 아폰수 황태자는 궁궐 서재에서 놀던 중 갑작스러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유모가 그를 발견하여 침대에 눕혔으나, 두 살 반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을 통해 아폰수가 그의 아버지 페드루 2세처럼 간질을 앓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페드루 2세와 황후 테레자 크리스티나 디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주었다. 당시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황후의 건강을 염려했으나, 다행히 그녀는 7월 13일에 합병증 없이 무사히 딸 레오폴디나를 낳았다. 깊은 슬픔에 잠긴 황제는 1847년 7월 11일, 계모인 아멜리아 황후에게 편지를 보내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가장 깊은 슬픔으로 당신에게 내 작은 아폰수, 당신의 대자가 불행히도 지난달 4일 5시간 동안 경련을 겪다가 사망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 작은 이사벨이 심한 경련 발작으로 위험에 처했고, 이는 나를 매우 두렵게 했습니다." (페드루 2세는 편지에서 아들의 사망 날짜를 잘못 언급했으며, 실제 사망일은 6월 11일이었다.)
4.1. 장례
파울라가 1833년에 사망한 이후 처음으로, 황태자를 위한 성대한 국장이 그의 사망 3일 후 오후 7시에 거행되었다.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아유다 수도원(Convento da Ajuda포르투갈어)에 안치되었다. 1911년 아유다 수도원이 철거되면서 그의 유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Convento de Santo Antônio포르투갈어) 묘소로 옮겨졌다. 성 안토니오 수도원에는 그의 남동생 페드루, 삼촌 조앙, 고모 파울라를 포함한 브라질 브라간사 왕가의 다른 구성원들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5. 유산
아폰수 황태자의 이른 죽음은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 아버지 페드루 2세와 브라질 제국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드리웠고, 황제의 통치 방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5.1. 제국에 미친 영향
황태자 아폰수의 이른 죽음과 이후 동생 페드루 아폰수의 죽음은 아버지 페드루 2세 개인에게 큰 슬픔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 그의 향후 행동과 브라질 제국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페드루 2세는 유일한 아들들의 죽음을 제국 체제의 종말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법적으로는 딸 이자벨이 후계자였지만, 당시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황제는 여성이 브라질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졌다. 그는 이자벨을 포함한 여성들을 존중했지만, 이자벨이 군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자벨을 차기 군주로 준비시키는 데 소홀했으며, 여성 통치자에 대한 정치권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페드루 2세는 붕괴 직전의 나라를 물려받아 통치를 시작했지만, 빠르게 성숙하며 여러 차례의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폰수가 사망할 무렵, 브라질은 전례 없는 번영과 발전, 그리고 평온을 누리고 있었다. 황제의 정치적 성공과 정책들이 결실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잃은 슬픔과 남성 후계자의 부재는 그가 자신의 후손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제국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려는 동기를 잃게 만들었다. 황제는 왕조를 유지하는 것보다 헌법을 수호하고, 브라질의 근대화와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더 집중했다. 군주제 자체는 더 이상 그에게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1889년 쿠데타로 폐위되면서 브라질 제국은 종말을 맞이했다.
6. 칭호, 작위 및 영예
(내용 없음)
6.1. 칭호 및 작위
1845년 2월 23일부터 사망일인 1847년 6월 11일까지 브라질 황태자였다. 공식 칭호는 "브라질 황태자, 아폰수 도밍스 황태자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