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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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은 9세기에 포르투갈 백국으로 시작되어, 1139년 아폰수 1세가 국왕을 칭하며 성립되었다. 이후 레콩키스타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1242년에는 알가르브 왕국을 병합하여 알가르브 왕을 겸하게 되었다. 1383년에는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으며, 1415년부터 대항해 시대를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상 제국으로 발전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을 거쳐, 브라간사 왕조가 성립되었다. 1800년대 초 나폴레옹 전쟁과 브라질 독립을 겪으며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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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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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
일반 명칭 | 포르투갈 |
다른 이름 | 포르투갈-알가르브 왕국(라틴어: Regnum Portugalliae et Algarbiae, 포르투갈어: Reino de Portugal e dos Algarves) 1415년 이후,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왕국(포르투갈어: 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 1815년에서 1822년 사이 |
건국 시기 | 1139년 |
멸망 시기 | 1910년 |
건국 사건 | 오리케 전투 |
건국 날짜 | 1139년 7월 25일 |
멸망 사건 | 1910년 10월 5일 혁명 |
멸망 날짜 | 1910년 10월 5일 |
이전 국가 | 포르투갈 백국 코투 미스투 |
다음 국가 | 포르투갈 제1공화국 브라질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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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표어 | "이 표징으로 그대는 정복하리라" |
국가 | "" (1809–1834) "애국 찬가" [[파일:Hymno Patriotico.ogg]] Hino da Carta (1834–1910) "헌장 찬가" [[파일:Hino da Carta.ogg]] |
공용어 | 포르투갈어 라틴어 |
수도 | 코임브라 (1139–1255) 리스본 (1255–1910)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국교) |
통화 | 포르투갈 디네이루(1139–1433) 포르투갈 헤알(1433–1910) |
면적 | 90,000km² (1300년) |
인구 | 800,000명 (1300년), 9,270,000명 (1800년), 12,434,000명 (1900년) |
통치 체제 | 봉건 입헌 군주제 (1139–1698) 절대 군주제 (1698–1820; 1823–1826; 1828–1834) 단일 의회 준입헌군주제 (1822–1823; 1826–1828; 1834–1910) |
통치자 | 군주 |
초대 통치자 | 아폰수 1세 |
마지막 통치자 | 마누엘 2세 |
초대 통치 시작 | 1139년 |
마지막 통치 종료 | 1910년 |
총리 | 총리 |
초대 총리 | 페드루 데 소우사 홀스타인, 팔멜라 후작 |
마지막 총리 |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데 소우사 |
초대 총리 시작 | 1834년 |
마지막 총리 종료 | 1910년 |
입법부 | 코르테스(1139–1706; 1816–1820) 없음(칙령 통치)(1698–1820; 1823–1826; 1828–1834) 포르투갈 국가의 총회 및 특별 코르테스(1820–1822) 코르테스 제럴(1820–1823; 1826–1828; 1834–1910) |
상원 | 귀족 회의(1822–1838; 1842–1910) 상원 의원 회의(1838–1842) |
하원 | 대의원 회의(1822–1910) |
연혁 | |
주요 사건 | 사모라 조약(1143년 10월 5일) 독립 회복(1640년 12월 1일) 리스본 암살 사건(1908년 2월 1일) |
기타 | |
통화 | 포르투갈 디네이루(1139–1433) 포르투갈 헤알(1433–1910) |
데모님 | 포르투갈인 |
2.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
포르투갈 왕국은 9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수스 3세의 신하였던 비마라 페레스(Vimara Peres)가 현재의 포르투갈 북부 지역에 포르투갈 백국을 세웠으며, 이 백국은 1097년 레온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아폰수 1세가 1139년 왕을 칭하고 카스티야-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며 시작되었다. 초기 보르고냐 왕조 시대에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현재 포르투갈 본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은 하위 섹션 '레콩키스타와 영토 확장'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1095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는 부르고뉴 출신 귀족들과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분배했다. 부르군트 자유백 빌헬름 1세의 아들인 라이문트는 알폰소 6세의 적녀 우라카와 결혼하여 갈리시아 지역 통치권을 얻었다. 라이문트의 사촌이자 프랑스 카페 왕조의 로베르 2세의 증손자인 앙리(엔히크)는 알폰소 6세의 서녀 테레사(테레사)와 결혼하여 갈리시아 남쪽의 포르투갈 백작령을 받았다. 엔히크 백작은 레콩키스타에 적극 참여하며 백작령의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했고, 레온 왕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과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엔히크 백작 사후, 그의 아들 아폰수 엔히크스(아폰수 엔히크스)는 불과 4세였기에 어머니 테레사가 섭정을 맡았다. 테레사는 남편의 정책을 계승하여 포르투갈 백작령의 독립을 추진했으며, 1121년에는 스스로 '포르투갈 여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갈리시아 귀족 페르난두 페레스 데 트라바와 가까워지면서 포르투갈 귀족 및 아들 아폰수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1128년, 기마랑이스 근처에서 벌어진 사웅마메드 전투에서 아폰수 엔히크스가 이끄는 군대가 어머니 테레사와 그 지지 세력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폰수는 포르투갈 백작령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독자적인 세력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7] 그는 레콩키스타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영토를 넓혔고, 1139년 오리크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을 선포했다.[7]
포르투갈의 완전한 독립은 1143년에 공식화되었다. 아폰수 1세는 당시 카스티야와 레온의 군주이자 자신의 사촌이었던 알폰소 7세와 사모라 조약을 체결하여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1179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국왕 칭호를 인정받음으로써, 포르투갈은 국제 사회에서도 독립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이로써 부르고뉴 가문(보르고냐 왕가)이 통치하는 포르투갈 왕국(1143년 ~ 1383년)이 성립되었다.[7] 이후 포르투갈의 모든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아폰수 1세의 후손이다.
3. 중세 시대 (1139년–1415년)
1383년,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왕인 페르난두 1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인 1383-85년 위기가 발발했다. 페르난두 1세의 딸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한 상태였고, 카스티야는 이를 빌미로 포르투갈 합병을 시도했다. 이에 포르투갈 귀족과 민중 다수는 카스티야의 지배에 반대하며 페르난두 1세의 서자이자 아비스 기사단 단장이었던 주앙을 지지했다.
이 위기는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주앙이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카스티야 군대를 격파하면서 결정적인 국면을 맞았다. 이 승리로 주앙은 주앙 1세로 즉위하여 아비스 왕조(1385년–1580년) 시대를 열었고, 포르투갈은 독립을 지키며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3. 1. 레콩키스타와 영토 확장
포르투갈 왕국의 기원은 9세기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수스 3세의 봉신이었던 비마라 페레스가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세운 포르투갈 백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백국은 1097년에 레온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095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의 사위이자 부르군트 자유백 빌헬름 1세의 아들인 라이문트에게 갈리시아 지역의 통치권을 주었고, 또 다른 사위이자 라이문트의 사촌인 앙리(엔히크)에게는 자신의 서녀 테레사와 혼인시키며 포르투갈 백작령을 맡겼다. 엔히크 백작은 영지를 넓히고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엔히크 사후, 그의 아들 아폰수는 불과 4세였기에 어머니 테레사가 섭정을 맡았다. 테레사 역시 남편의 뜻을 이어 포르투갈의 독립을 추구하며 1121년에는 스스로 여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갈리시아 귀족 페르난두 페레스와의 관계로 아들 아폰수를 비롯한 포르투갈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1128년 사웅마메드 전투에서 아폰수가 어머니 테레사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포르투갈 백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아폰수는 백국의 힘을 키워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시켰고, 1139년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임을 선포했다. 1143년에는 그의 사촌이자 기존의 상위 군주였던 카스티야와 레온의 알폰소 7세로부터 포르투갈의 독립과 왕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어 1179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국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보르고냐 왕가(1143-1383)가 다스리는 포르투갈 왕국이 완전히 성립되었다.
왕국 성립 이후에도 레콩키스타는 계속되었다. 아폰수 1세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그의 후계자들 역시 이슬람 세력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1242년, 산슈 2세는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알가르베 지방을 정복하여 알가르브 왕국을 세웠고, 이후 포르투갈 국왕은 알가르베 국왕의 칭호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모든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아폰수 1세의 후손이다.
4. 근세 시대 (1415년–1777년)
15세기 초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해상 탐험을 주도하며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걸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포르투갈 해상 제국 시대를 열었다. 특히 주앙 2세 재위 기간인 1488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 항로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7]
그러나 1580년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하게 되면서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스페인과의 동군연합 시기를 겪었다.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일어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고, 브라간사 왕조의 주앙 4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여 포르투갈의 독립을 회복했다.
4. 1. 대항해 시대와 해상 제국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활약하며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걸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며 포르투갈 해상 제국을 이루었다. 엔리케 왕자가 사망한 1460년까지 포르투갈은 원양 항해에 적합한 선박을 개발하고 개량하여 유럽에서 가장 앞선 해양 기술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주앙 2세(재위 1481년~1495년)의 통치 시기인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7]
그러나 1580년,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리스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완전히 병합되지는 않았으나,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는 동군연합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이베리아 연합).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은 점차 커졌고, 결국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통해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되찾았으며, 아비스 왕조의 방계인 브라간사 왕조의 주앙 4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여 포르투갈의 주권을 회복했다.
4. 2. 이베리아 연합과 왕정 복고 전쟁
1580년, 아비스 왕조의 마지막 왕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이 기회를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리스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 제국에 완전히 병합된 것은 아니었지만,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이베리아 연합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스페인의 통치에 대한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갔다. 결국 1640년, 스페인의 지배에 반발한 포르투갈 귀족들이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을 통해 60년간 이어졌던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은 해소되었으며, 아비스 왕조의 방계 가문인 브라간사 왕조의 주앙 4세가 새로운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왕정을 복고했다.
5. 근대 시대 (1777년–1910년)
19세기 동안 이어진 내정 혼란 속에서 공화주의 사상이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20세기 초, 리스본의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영향력 있는 언론을 중심으로 공화주의 지지 세력이 커져갔다. 비록 전국적으로는 소수였지만, 1908년 2월 1일 발생한 리스본 암살 사건은 공화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빌라 비소사 공작궁에서 돌아오던 카를루스 1세 국왕과 왕위 계승자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가 리스본의 테헤이루 두 파수에서 공화주의 급진파에게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과 왕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카를루스 1세의 차남인 마누엘 2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공화주의 세력은 더욱 힘을 얻었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으로 브라간사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렸고,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로써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포르투갈 왕국은 멸망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5. 1. 나폴레옹 전쟁과 브라질 독립
180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포르투갈에게 대규모 영토 할양과 영국 상선의 배척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이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4월 전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군은 스페인과 함께 포르투갈에 침입하여 포르투갈군을 격파했다(오렌지 전쟁). 결국 같은 해 6월, 포르투갈은 영국 상선 배척, 영토 할양(현재의 기아나), 전쟁 배상금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바다호스 조약에 서명하며 전쟁을 종결시켰다.[8]1808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확산을 피해 주앙 6세 국왕을 비롯한 포르투갈 왕실과 정부가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궁정을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유럽 역사상 군주가 식민지로 수도를 옮긴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를 임시 수도로 삼아 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베 연합 왕국이 선포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1821년에 주앙 6세와 왕실은 본국 포르투갈로 복귀했다. 하지만 왕실이 떠난 브라질에서는 독립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결국 페드루 왕자가 브라질에 남아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을 세웠다. 포르투갈은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브라질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5. 2. 자유주의 전쟁과 내정 혼란
180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규모 영토 할양과 영국 상선의 배척을 요구하였다. 포르투갈이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4월 전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군은 스페인과 함께 포르투갈에 침입하여 포르투갈군을 격파하였다(오렌지 전쟁). 같은 해 6월, 포르투갈은 영국 상선 배척, 영토 할양(기아나), 전쟁 배상금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바다호스 조약에 서명하며 전쟁은 종결되었다.[8]1808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군의 침공을 피해 왕실과 궁정이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이전하였다(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이전). 이로 인해 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베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다. 1821년, 주앙 6세와 왕실은 포르투갈 본국으로 복귀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브라질 제국의 브라질 독립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1828년에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자유주의 전쟁(포르투갈 내전)이 발발하여 183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전쟁은 절대주의를 지지하는 미겔 1세와 자유주의 헌법을 지지하는 페드루 4세(브라질의 페드루 1세) 및 그의 딸 마리아 2세 사이의 갈등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했지만, 이후에도 포르투갈의 내정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세력을 키웠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일어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멸망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6. 군주정의 몰락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내정 혼란과 나폴레옹 전쟁, 브라질 독립, 포르투갈 내전 등으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공화주의 사상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특히 리스본의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영향력 있는 언론을 중심으로 공화주의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다. 비록 당시 포르투갈 전국적으로 공화주의는 소수 의견에 머물렀으나, 1908년 2월 1일에 발생한 리스본 암살 사건은 공화주의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빌라 비소사 공작궁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오던 카를루스 1세 국왕과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가 리스본의 테헤이루 두 파수에서 공화주의 급진파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국왕과 왕세자가 동시에 사망하자, 카를루스 1세의 차남인 마누엘 2세가 갑작스럽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마누엘 2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기반이 흔들리고 있던 왕정을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발발하면서 군주정은 강제로 종식되었다.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포르투갈에는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포르투갈의 군주정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19년 1월 19일, 북부 도시 포르투에서 북부 왕국이 선포되며 잠시 왕정 복고가 시도되기도 했으나, 이 시도는 불과 한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포르투갈에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왕정 복고 시도가 일어나지 않았다.
1910년 공화 혁명 이후, 과거 포르투갈 제국 시절 확보했던 해외 식민지들은 20세기 후반까지 포르투갈 공화국의 해외 속주 형태로 유지되었다. 식민지 독립 전쟁 등을 거치며 1975년에는 포르투갈 아프리카의 주요 지역이었던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이 독립하였고, 마지막으로 1999년에 아시아에 남아있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면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는 모두 정리되었다.
7. 역대 군주
자세한 내용은 포르투갈 군주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포르투갈 왕국은 1129년, 포르투갈 백작령의 아폰수 1세가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139년부터 왕을 자칭하면서 시작되었다. 보르고냐 왕조의 아폰수 1세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산슈 2세 시대인 1242년에는 알가르브 지방을 정복하여 알가르브 왕국을 세웠고, 이후 포르투갈 국왕은 알가르브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1383년 페르난두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페르난두 1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그의 서자였던 주앙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으며, 결국 주앙이 카스티야 군대를 물리치고 주앙 1세로 즉위하여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
아비스 왕조 시대에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스페인과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며 포르투갈 해상 제국을 이루었다. 엔리케 왕자의 지원 아래 항해술이 발전했으며, 주앙 2세 치세인 1488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7]
1580년,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리스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완전히 병합되지는 않았으나,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 상태(이베리아 연합)에 놓였다.
스페인 지배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발발했고,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분가인 브라간사 왕조의 주앙 4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브라간사 왕조 시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1808년 왕실이 브라질로 이전하는 사건(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베 연합 왕국)이 있었으며, 1821년 궁정이 본국으로 돌아온 후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1828년부터 1834년까지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포르투갈 내전이 벌어지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화주의 세력이 성장하였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7. 1. [[보르고냐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기원은 9세기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수스 3세의 가신 비마라 페레스가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세운 포르투갈 백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은 1097년 레온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1095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의 사위이자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손자인 엔히크에게 서녀 테레사와 결혼시키고 갈리시아 지역 산하의 포르투갈 백작령을 주었다. 엔히크는 백작령을 확장하고 독립적인 권한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엔히크 사후, 그의 아들 아폰수 1세는 불과 4세였기에 어머니 테레사의 섭정을 받았다. 테레사 역시 남편의 뜻을 이어 포르투갈의 독립을 추진하며 1121년에는 스스로 여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귀족 페르난두 페레스와의 관계로 아들 아폰수 1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1128년 사웅마메드 전투에서 아폰수 1세가 어머니 테레사 세력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 백국의 힘을 키워 독자적인 세력으로 만들었고, 1139년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마침내 1143년, 본래 포르투갈 백국의 상위 군주이자 사촌이었던 카스티야와 레온의 알폰소 7세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고 국왕 지위를 승인받았다. 또한 1179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국왕으로 인정받으면서, 아폰수 1세(재위 1139년~1185년)를 시조로 하는 보르고냐 왕조(1143년 ~ 1383년) 시대의 포르투갈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보르고냐 왕조는 레콩키스타를 지속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산슈 2세 통치 시기인 1242년에는 남부의 알가르브 지방을 정복하여 알가르브 왕국을 세웠고, 이후 포르투갈 국왕은 알가르브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1383년, 페르난두 1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조는 위기를 맞았다. 페르난두 1세의 딸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왕비였던 베아트리스가 왕위를 주장했으나, 페르난두 1세의 서자였던 주앙 1세가 이에 맞섰다. 주앙 1세는 알주바로타 전투 등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즉위하여 새로운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
이후 이어지는 모든 포르투갈의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아폰수 1세의 후손이다.
7. 2. [[아비스 왕조]]
1383년, 부르고뉴 왕조의 페르난두 1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페르난두 1세의 딸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왕비였던 베아트리스가 왕위를 주장했지만, 페르난두 1세의 서자이자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주앙이 이에 맞섰다. 주앙은 카스티야 군대를 물리치고 1385년 주앙 1세로 즉위하여 아비스 왕조를 열었다.아비스 왕조 시대에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이끌며 스페인과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며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엔리케 왕자가 사망한 1460년까지 포르투갈은 원양 항해에 견딜 수 있는 배를 개량하여 유럽 최첨단의 해양 개발 국가로 성장하였다. 주앙 2세(재위: 1455년~95년) 치세인 1488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7]
그러나 1580년,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아비스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이를 기회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리스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스페인 제국에 병합되지는 않았지만,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 상태, 즉 이베리아 연합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지배에 대한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은 점차 커졌고, 결국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일어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아비스 왕조의 방계인 브라간사 가문의 주앙 4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며 브라간사 왕조 시대를 열었다. 아비스 왕조는 1385년부터 1580년까지 지속되었다.
7. 3.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이베리아 연합)
1580년, 아비스 왕조의 엔리케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이 기회를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리스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스페인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지는 않았으나, 1581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이베리아 연합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스페인의 통치에 대한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갔다. 결국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일어나 이베리아 연합은 해체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아비스 왕조의 방계 가문인 브라간사 왕조의 주앙 4세가 새로운 포르투갈 왕으로 즉위하여 독립을 회복했다.
7. 4. [[브라간사 왕조]]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을 통해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이 해소되면서 아비스 왕조의 분가인 브라간사 왕조가 시작되었다. 주앙 4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180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규모 영토 할양과 영국 상선 배척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이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4월 전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에 침입하여 포르투갈군을 격파했다(오렌지 전쟁). 결국 같은 해 6월, 영국 상선 배척, 영토 할양, 전쟁 배상금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바다호스 조약에 서명하며 전쟁이 종결되었다.[8] 1808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왕실과 정부가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이전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다(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베 연합 왕국). 1821년 궁정이 포르투갈 본국으로 복귀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828년부터 1834년까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포르투갈 내전이 벌어지는 등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화주의 사상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리스본의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영향력 있는 언론을 중심으로 공화주의 지지 세력이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는 소수였지만, 1908년 2월 1일 발생한 리스본 암살 사건은 공화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빌라 비소사 공작궁에서 돌아오던 카를루스 1세 국왕과 왕세자 루이스 필리페가 리스본의 테헤이루 두 파수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국왕과 왕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카를루스 1세의 차남 마누엘 2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이로써 브라간사 왕조는 막을 내리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19년 1월 19일, 포르투에서 북부 왕국이 선포되며 잠시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으나, 한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포르투갈에서 왕정 복고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10년 혁명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들을 유지했으나, 20세기 후반에 걸쳐 대부분 독립했다. 주요 식민지였던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1975년에, 마지막 해외 영토였던 마카오는 1999년에 반환되었다.
8. 갤러리
(내용 없음)
8. 1. 국기
8. 2. 문장
8. 3. 방패
참조
[1]
서적
Society and Education in Brazil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
서적
The Medieval Spa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10-11
[3]
언어
[4]
각주
[5]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uese Empire
http://dx.doi.org/1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04-13
[6]
학술지
O outro lado do Império: as disputas mercantis e os conflitos de jurisdição no Império Luso-Brasileiro
http://www.scielo.br[...]
2006-06
[7]
서적
図説ブラジルの歴史
河出書房新社
2014-10-30
[8]
서적
世界戦争事典 改訂第2版
河出書房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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