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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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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포크는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러시아 제국 군인이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콘스탄티노프 포병 학교를 졸업하고, 헌병 특별 군단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으며, 러일 전쟁 당시 뤼순 방어전을 지휘했으나, 지휘 능력 부족으로 비판받았다. 뤼순 요새 함락 후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 후 군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1908년 군에서 제대했다. 이후 제1차 발칸 전쟁에 불가리아 육군 지원병으로 참전했으며, 1926년 불가리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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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포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드르 포크
이름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포크
로마자 표기Aleksandr Viktorovich Fok
출생1843년 9월 6일
사망1926년 12월 2일
사망 장소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소속러시아 제국
불가리아 왕국
군 종류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64년 - 1906년
최종 계급육군중장
별칭일곱 악마
참전
주요 전투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의 난
러일 전쟁
난산 전투
제1차 발칸 전쟁
훈장
훈장 내역[[File:RUS Order of Saint George 3rd class ribbon 2000.svg|30px|link=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2. 생애

알렉산드르 포크는 러시아 제국 군에서 활동했던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헌병대에서 복무했으며,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는 등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러일 전쟁에서는 뤼순 방어 사령관으로 참전했으나, 난산 전투에서의 졸전과 뤼순 공방전에서의 소극적인 대처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예비군 투입을 거부하고 항복을 주장한 점은 그의 군사적 판단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이후 포크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고, 제1차 발칸 전쟁에 불가리아군 지원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알렉산드르 포크는 당시 러시아 제국 군에 많이 재직했던 독일계 러시아인 중 한 명이었다.[3]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콘스탄티노프 포병 학교를 졸업했다.[1] 1871년부터 1876년까지 국가 보안을 담당하는 정예 제복 보안 경찰 부대인 헌병 특별 군단에서 복무했다.[1]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1] 1890년에는 근위 보병 제16연대장에 취임하였다.[4] 1900년에는 동시베리아 저격 제4여단장으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였다.[1]

2. 2. 러일 전쟁 참전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포크는 뤼순에 주둔하며 동시베리아 저격 제4사단을 지휘했다.[1] 랴오둥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에 맞서 뤼순 방어를 위해 진저우성과 그 뒤에 솟은 난산에 포진했다.[3] 그러나 5월 난산 전투에서 무책임한 철수와 니콜라이 트레차코프 대령 지원 실패로 다롄항을 일본군에 넘겨주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3]

뤼순 공방전에서는 동서 반룡산 보루에 예비군 파병 명령을 거부, 1904년 8월 21일 지휘관에서 해임되었다.[3] 그럼에도 총사령관 아나톨리 스테셀에게 의탁하여 그의 휘하로 뤼순 요새에 잔류, 자신의 군대는 뤼순 도심 방어를 위한 총예비군으로 보존했다.[3]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 전사 후, 스테셀은 포크를 뤼순 육상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중장으로 진급시켰다.[5] 10월에는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을 받았다. 이후에도 예비군 사용이나 전선 부대 증강을 거부했으며, 연말에 일본군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가 제시한 항복 조건을 수용할 것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

2. 3. 러일 전쟁 이후

러일 전쟁 당시 뤼순에 주둔한 제4 시베리아 소총 사단 (러시아 제국)을 지휘했다. 난산 전투에서 성급하게 후퇴하고 니콜라이 트레티야코프 대령을 지원하지 않아 러시아의 패배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 뤼순 공방전 중 동반롱과 서반롱의 요새에서 무너지는 러시아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예비군을 전진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1904년 8월 21일 지휘권을 박탈당했다.[1][2]

아나톨리 스테셀 장군의 참모로 남았으며, 스테셀은 포크를 포트 아서의 육상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만 콘드라첸코 장군 사망 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1][2] 1904년 10월 성 게오르기 훈장 (3급)을 받았다. 사령관으로서 전선 부대에 예비군이나 증원을 투입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했으며, 8개월간의 포위 공격 후 1904년 말 일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수용할 것을 처음으로 촉구했다.

뤼순 요새 함락 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귀국 후 1906년 말 군사 법정에 회부되어 체포되었지만, 무죄로 풀려나 1908년 군에서 제대했다.[1]

군에서 은퇴했지만, 1912-1913년 발칸 전쟁에 불가리아군의 자원병으로 참여했다. 1926년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망했으며,[1] 유언에 따라 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외곽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러일 전쟁 당시 포크는 뤼순 방어전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성급한 퇴각과 지원 거부로 러시아군 패배에 일조했으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여 지휘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예비군 투입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항복을 주장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부적절한 모습을 보였다.[1][2]

포트 아서 함락 후, 포크는 일본군 포로로 잡혔다가 귀국했지만, 대중의 비판을 받아 군사 법정에 회부되었다. 무죄로 풀려났으나,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군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1]

3. 1. 부정적 평가

러일 전쟁 당시 포크는 뤼순에 주둔한 제4 시베리아 소총 사단 (러시아 제국)을 지휘했다. 그는 성급하게 퇴각하고 난산 전투에서 니콜라이 트레티야코프 대령을 지원하지 않아 러시아군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 포츠머스 해전 중에는 동반롱과 서반롱 요새에서 무너지는 러시아군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예비군을 전진시키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거부하여 1904년 8월 21일에 지휘권을 박탈당했다.[1][2]

포크는 사령관으로서 전선 부대에 예비군이나 증원군을 투입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했으며, 8개월간의 포위 공격 이후 1904년 말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수용할 것을 처음으로 촉구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4. 영전

훈장등급수여일
-- 성 게오르기 훈장3등급1903년
-- 성 게오르기 훈장3등급1904년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성 스타니스라후 훈장
1등급
성 안나 훈장
1등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
2등급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The Truth about Port Arthur
[3] 문서 柘植「アレクサンドル・フォーク中将」
[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5]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6]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7]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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