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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몬 게오르기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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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1882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한 불가리아의 군인, 정치인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발칸 전쟁에 참전했고, 1920년에 군에서 퇴역했다. 이후 여러 정치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34년 쿠데타를 통해 총리가 되었다. 게오르기에프는 1934년부터 1935년까지, 1944년부터 1946년까지, 그리고 1946년에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불가리아 공화국 선포 이후 부총리 및 외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산업화 정책에 기여했다. 그는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으며, 196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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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몬 게오르기에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키몬 게오르기에프
국적불가리아
출생일1882년 8월 11일
출생지파자르지크, 동루멜리아 (현재 불가리아)
사망일1969년 9월 28일
사망지바르나, 불가리아
배우자베스카 로데바
자녀마리아 게오르기에바, 코르넬리아 게오르기에바
별칭스타리야 프레브라타지야 (늙은 쿠데타 주동자)
서명
정치 경력
직위제24대 불가리아의 총리
임기 시작1934년 5월 19일
임기 종료1935년 1월 22일
군주보리스 3세
이전니콜라 무샤노프
이후펜초 즐라테프
직위 2제24대 불가리아의 총리
임기 시작 21944년 9월 9일
임기 종료 21946년 11월 22일
군주 2시메온 2세 (1944–1946)
대통령 2바실 콜라로프 (1946)
이전 2콘스탄틴 무라비에프
이후 2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소속 정당인민동맹
민주동맹
즈베노
조국전선
군사 경력
소속 군대불가리아 육군
복무 기간1902–1935
계급대장
기타 정보

2. 초기 생애

파자르지크 출신으로 소피아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발칸 전쟁에는 중대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대대장으로 참전했으며,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부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었다. 1920년 중령 계급으로 군에서 퇴역했다.

2. 1. 출생과 가계

키몬 게오르기에프 스토야노프는 1882년 8월 11일 당시 동 루멜리아에 속했던 타타르 파자르지크에서[2][3]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 조부인 스토얀 발카치야타는 19세기 초에 데브라쉬치차 마을에서 이 도시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1848년경에 태어난 게오르기 스토야노프 크러스토요프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칼루게로보 마을에서 파자르지크로 온 토도르 보그다노프였으며, 어머니는 1858년경에 태어난 마리아 보그다노바-아바지예바였다.[4] 그는 형과 누나가 있는 가족 중 막내였으며, 태어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했다.[5]

2. 2. 군 복무

그는 1897년 파자르지크에서 초등 교육을 마쳤다.[6] 처음에는 공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유학이 어려워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6] 그는 소피아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7][8] 1902년에 졸업하고,[9] 같은 해 1월 1일 차르 궁전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페슈테라에 있는 제2 보병 트라키아 사단의 제3 예비 연대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하다가 파자르지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1905년 중위로 진급했고, 이후 지휘관이 되었다.[10]

게오르기에프의 군복 차림


불가리아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동원령이 내려지자,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새로 창설된 제44 보병 툰잔 연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제2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 연대는 디미타르 게쇼프 장군 휘하의 제2 보병 트라키아 사단에 소속되어 살로니카 전선에서 싸웠다. 게오르기에프는 카얄리 전투에서 활약하여 316명의 영국군 병사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러한 공로로 1916년 소령으로 진급했다.[13]

그는 체르나 만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의 부대는 브로드 마을과 사쿨레바 강 어귀의 주요 거점에 배치되어 10월 8일 그곳을 점령했다. 이후 며칠간 격렬한 포격과 연합군의 반복적인 공격 속에서도 게오르기에프는 효과적인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체르나 강 반대편에서 적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10월 19일 전투 중 한쪽 눈을 잃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4]

부상에서 회복한 후,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육군 본부에서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병기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2월 27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15] 살로니카 휴전 이후 동원 해제 기간 동안 전쟁부로 전출되어 1918년 10월 26일부터 검사 부서 책임자를 맡았다.[16]

육군 본부가 소피아로 복귀한 후, 게오르기에프는 군사 연합의 회원이 되어 소피아 수비대의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군사 연합 창립 총회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총회에서 조직의 첫 상임 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11월 2일에는 소피아의 제6 보병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7]

1919년 9월 9일, 100명 이상의 장교들이 가브릴 리체프의 전쟁부 장관 임명에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던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이스키 총리의 강한 반발을 샀고, 최고 군사 위원회는 이 행동을 규탄하며 군사 연합 해산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같은 날, 게오르기에프는 징집 부적격자라는 명목으로 부르가스의 제39 연대 지휘관으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그는 휴가를 신청했으나, 지휘부는 그를 소피아에서 멀리 보내려 휴가를 강제로 종료시켰다. 결국 1919년 10월 12일, 게오르기에프는 사임을 요청했고, 군에서 해임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18] 그는 1920년에 군복을 벗었다.[19][20]

3. 초기 정치 경력

1920년 군에서 물러난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군사 연합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1921년 인민 동맹 창설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21][22][23] 그는 1922년 입헌 블록 창설을 위한 야당 협상에도 참여했다.[24]

1923년 불가리아 쿠데타 당시 군사 연합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쿠데타 이후 민주 연합 창설에 기여하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25][26] 1925년 성 네델랴 교회 공격 사건 당시 부상을 입기도 했다.[27]

1926년 안드레이 랴프체프 내각에서 철도, 우편 및 전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나,[28] 이후 민주 동맹 내 반대 세력으로 돌아섰다. 1927년 다미안 벨체프와 함께 정치 서클 "즈베노"를 창설했고, 1930년 민주 동맹과 최종적으로 결별하며 즈베노를 이끌었다.[29][30] 즈베노는 권위주의적이고 국가 법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게오르기에프는 이를 통해 강력한 국가 개입을 주장했다.[31][32]

결국 1934년, 게오르기에프는 군사 동맹과 함께 1934년 쿠데타를 주도하여 니콜라 무샤노프 정부를 무너뜨리고 총리직에 올랐다.[33][34][35]

3. 1. 군사 연합과 인민 동맹

1920년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군에서 해임된 후, 연말까지 군사 연합의 다른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니콜라 라체프, 다미안 벨체프, 그리고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군사 연합을 점진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군대 내 조직 구조는 개편되었으며, 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줄었지만 더욱 엄격한 비밀리에 운영되었다.[21]

게오르기에프의 정치 경력은 1921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인민 동맹이라는 조직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군사 연합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했다.[22][23] 또한 1922년에는 입헌 블록 창설을 목표로 하는 야당 간의 협상에도 참여했다.[24]

3. 2. 1923년 쿠데타

1923년 쿠데타 전날,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왼쪽에서 두 번째이다.


그는 1923년 불가리아 쿠데타에 참여한 군사 연합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밤에는 이반 루세프의 집에 있었다.[25] 쿠데타 이후, 그는 여러 정당을 통합하여 민주 연합을 창설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3년 10월에는 불가리아 노동자 사회 민주당(광범위한 사회주의자)과 선거 연합을 결성하기 위한 협상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1월 18일 선거에서 소피아 농촌 컬리지의 부대표로 선출되었다.[26]

1925년 4월, 게오르기에프는 민주 연합 소피아 조직의 의장이자 군사 연합의 주둔지 지도자였던 은퇴한 콘스탄틴 게오르기에프 장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성 네델랴 교회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이 폭탄 테러로 사망한 니콜라 라체프에게 헌정된 기사에서 테러범들을 불가리아에 대한 "죽음의 일격"을 준비하는 "괴물"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해 말, 페트리치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 대표로 피린 지역에 파견되었다.[27]

3. 3. 안드레이 랴프체프 내각

1925년 말,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알렉산더 찬코프 정권의 교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당시 민주 동맹 내에서 내각 변화를 주장하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찬코프에게 이러한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새로운 내각 구성 논의 과정에서 내무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26년 1월 4일, 그는 안드레이 랴프체프가 이끄는 첫 번째 내각에서 철도, 우편 및 전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8]

내각에서 물러난 후, 게오르기에프는 페타르 토도로프가 편집하는 '류치'(Luch) 신문을 중심으로 모인 민주 동맹 내 반대 세력에 합류했다. 이들은 '방사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더 강력한 개입, 행정부의 당파적 인사 임용 제한, 그리고 IMRO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를 옹호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랴프체프 총리는 전쟁부 장관 이반 발코프를 해임하는 등 일부 양보를 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방사주의자 그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알렉산더 찬코프를 포함한 일부 인사들이 내각에 참여했지만,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이끄는 더 강경한 반대 세력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같은 해 9월, 게오르기에프는 의회에서 간첩 사건과 관련하여 전쟁부 장관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결국 11월, 게오르기에프를 중심으로 한 강경 반대파는 민주 동맹과 최종적으로 결별하고 정치 서클 "즈베노"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29]

3. 4. 즈베노

1934년 소피아 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제4회 국제 비잔틴 연구 학술회의 개회식에 참석한 키몬 게오르기에프.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1927년 다미안 벨체프와 함께 정치 서클 "즈베노"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의 사회 정치적 환경 개선을 목표로 했다.[30] 즈베노는 정당의 이익을 초월하고 국가적 목적을 가진 권위주의적 권력을 지지한다고 선언했으며, 주로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영감을 받은 국가 법인주의를 표방했다.[31] 또한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며 파시스트 유형의 강력한 "초정당적" 권위주의적 권력을 옹호했다.

게오르기에프는 1930년 민주 동맹과의 관계를 끊었고, 1931년 불가리아 총선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의 그룹의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즈베노의 지도자가 되었고, 1932년 초부터는 자신이 편집인으로 참여한 신문 ''이즈그레프''를 발행했다. 이 신문을 통해 공산주의소련을 비판하고 "질서와 경제 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을 명분으로 강력한 정부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었다.[32]

1934년 1월, 즈베노 회원 대다수는 알렉산더 츠안코프의 인민 사회 운동에 가담했지만,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이끄는 소규모 그룹은 독립적으로 단체를 유지했다. 즈베노는 사회적 기반이 약한 소규모 조직이었으나, 과거 정부 전복을 계획했던 군사 동맹과 접촉하고 있었다.[33]

3. 5. 1934년 쿠데타

1934년 쿠데타는 군사 동맹과 즈베노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니콜라 무샤노프 정부를 권력에서 몰아냈다. 이는 당시 유럽에 퍼져 있던 권위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34]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이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집에서 군사 동맹 중앙 정부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5월 19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다미안 벨체프와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다.[35]

쿠데타 성공 후 게오르기에프는 총리에 취임했다. 그의 정부는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본뜬 협동조합주의적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1935년 7월 23일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4. 총리 재임 (3선)

1946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키몬 게오르기에프 내각은 개편되었다. 이는 불가리아 공산당(BPC)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외교 및 재정 정책 노선을 수정하기 위한 조치였다.[89][2] 게오르기에프는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내각 내 즈베노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같은 해 여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주도로 군대 내 반공 세력 숙청이 본격화되었고, 이는 다미안 벨체프 전쟁 장관 등 게오르기에프의 측근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90] 게오르기에프는 벨체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결국 그의 해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91]

8월에는 파리 평화 조약 준비를 위한 불가리아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를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다.[92] 귀국 후 잠시 전쟁부 장관직을 맡기도 했으며[93], 10월에는 제6차 대국민 의회 선거를 위한 조국 전선 선거 운동을 이끌었다. 선거 결과 공산당이 압승하고 즈베노는 미미한 성과를 거두면서, 게오르기에프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었다.[94] 이 시기 내각 운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4. 1. 제1차 게오르기에프 내각 (1934-1935)

키몬 게오르기에프, 1930년대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1934년 5월 19일 쿠데타를 통해 총리직에 올랐다.[36] 그는 총리직과 더불어 외무 및 종교부 장관(1934년 5월 19일~23일), 법무부 장관(1934년 5월 23일~1935년 1월 22일)을 역임했으며, 쿠데타 당일에는 임시로 육군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2] 그의 내각은 정치 조직 즈베노와 군사 동맹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은 쿠데타를 비판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BCP는 이 쿠데타를 파시스트 쿠데타로 규정했지만,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효과적인 반대 전선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쿠데타 세력은 "국가 초정당 권력" 수립을 선언하며 국회를 폐지하고, IMRO를 해산했으며, 파시즘적인 방식으로 정부 기구를 재편하려 했다.[37]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와 키몬 게오르기에프, 1934년


게오르기에프 정부는 집권 직후 국회를 해산하고, 터르노보 헌법 제47조를 근거로 내각이 법령을 통해 통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934년 6월 14일에는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그 재산을 국유화했다. 군과 지방 자치 단체를 통합하고 기존의 자치 정부를 폐지했으며, 그 자리는 정부가 임명한 관리들로 채웠다. 교사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수십 개의 학교를 폐쇄하여 2,000명 이상의 교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또한, 전국의 많은 마을 이름을 전통적인 이름 대신 불가리아식 이름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벌였다.[38] 엄격한 언론 검열이 도입되어 많은 인쇄물이 금지되었다.[39]

경제 분야에서는 국가 수입을 늘리고 농업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명분 아래 곡물, 알코올, 담배 거래에 대한 국가 독점권을 설정했다. 이는 해당 분야의 경제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편, 대공황으로 상환이 어려워진 농민 부채의 최대 40%를 탕감하고 나머지는 상환 조건을 조정했으며, 강제 집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어려움을 겪던 여러 민간 은행을 통합하고 국가 자본을 투입하여 불가리아 신용 은행을 설립했으며, 두 개의 대형 국영 은행도 불가리아 농업 협동 은행으로 합병했다. 내무부 산하에는 특별세로 재원을 마련하는 공공 지원 서비스를 신설하고, 공립 병원에서 빈곤층에 대한 무료 치료를 도입했다.[40]

1934년 9월 4일에는 국가 안전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사실상 IMRO를 불법화했다. IMRO의 활동에 대한 조사는 군사 법원, 경찰, 군대에 맡겨졌으며, 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함께 무기 및 재산 몰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2년 동안 소피아 군사 법원은 IMRO 활동가들이 불가리아 남서부에서 저지른 살인, 납치, 갈취 등 수십 건의 사건을 처리했으며, 조직의 지도자 이반 미하일로프에 대한 사형 21건을 포함하여 다수의 중형이 선고되었다.[41]

외교 정책에서도 변화를 추구했다. 이전 내각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도, 그해 초 발칸 조약을 체결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목표로 삼았다. 정부는 불가리아의 의회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외교 정책 방향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 재건, 모든 강대국 및 이웃 국가와의 평화와 좋은 관계 유지"를 외교 정책 목표로 선언했다. 또한 "영토 전역에 대한 공권력 재건"을 선언하며 IMRO 해산 의지를 분명히 했고, 즉시 지방 행정 구역을 7개 부서로 재편하여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주지사를 임명했다. 과거 IMRO의 영향력이 강했던 페트리치 지구도 이 개편에 포함되었다.[42] 유고슬라비아와는 통상 조약을 체결했으며, 9월 말에는 알렉산다르 1세가 소피아를 방문하여 수천 명의 환영을 받았다. 이전 내각에서 시작된 소련과의 관계 개선 협상을 이어받아 1934년 7월에는 양국 간 최초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43][44]

그러나 1934년 가을부터 집권 세력 내부에서 펜초 즐라테프가 이끄는 친군주주의 세력과 다미안 벨체프가 이끄는 친공화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게오르기에프는 즐라테프를 전쟁부 장관직에서 해임하려 했으나 군사 연합의 반대로 실패했다. 11월 연합 회의 이후 벨체프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조직 내에서는 내각의 여러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45] 결국 1935년 1월 22일, 보리스 3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反)쿠데타를 일으켰고[46][47], 게오르기에프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는 친군주주의자인 펜초 즐라테프가 임명되었다. 게오르기에프는 새 내각의 법무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48]

4. 2. 1930년대 말

다미안 벨체프, 절친이자 정치적 동지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는 여전히 다미안 벨체프, 즈베노 회원, 그리고 소련 대사 표도르 라스콜니코프를 포함한 외국 외교관 및 언론인들과 활발하게 접촉했다.[49]

그는 유고슬라비아 신문 ''프라우다''와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 대한 신정부의 비난을 거부하고 비판했다. 전날 알렉산다르 츠안코프도 비슷한 인터뷰를 했다. 1935년 4월 18일, 그는 성 아나스타시아 섬에 유배되었다. 많은 장관들이 사임했고, 군사 연합은 지도력을 잃고 안드레이 토셰프가 이끄는 내각이 구성되었다.[50] 신정부는 군사 연합 내 급진 세력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키몬 게오르기예프는 소피아를 떠나 부르가스로 가야 했다.[51] 그는 벨체프의 쿠데타 시도와 관련되어 10월 2일 얌볼에서 체포되었다. 10월 14일 석방되었지만 3일 후 잠시 체포되었으나, 그가 음모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부르가스에 유배되었다. 다미안 벨체프의 재판 동안 그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게오르기예프는 그의 법적 후견인이었다.[52] 즈베노는 불가리아 농민 연합과 불가리아 공산당인 좌익 야당에 더 가까워졌다.[2] 게오르기예프는 끊임없이 국가 보안에 의해 감시받았지만, 집권 세력과 공공 행사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았다.[53]

의회가 구성된 후, 쿠데타 이후의 칙령법을 승인해야 했고, 논쟁 과정에서 야당, 특히 디미타르 기체프는 즈베노, 군사 연합, 그리고 키몬 게오르기예프 개인을 쿠데타 이후의 행동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는 "나의 프로그램"이라는 팜플렛으로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고 게오르기예프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39년에 사건은 기각되었다.[54] 1936년부터 게오르기예프와 즈베노가 타르노보 헌법의 부활을 옹호했지만, 그들은 외교 정책 노선을 유지했다. 1939년 3월, 그는 팜플렛 "우리의 외교 정책 상황에 대한 관점"(Brazdy Library의 첫 번째 책)을 출판했는데, 그는 불가리아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인정했지만, 국제적 고립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하고 1937년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조약의 유지를 옹호했다.[55]

4.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게오르기 퀴세이바노프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옹호했다. 1939년 10월 정부 개편 과정에서는 차르 보리스 3세와 만나 정치 상황을 논의하고 다미안 벨체프를 비롯한 군사 연합 활동가들의 석방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6] 1940년 11월, 게오르기에프는 소련이 제안한 상호 원조 조약을 지지했다. 당시 이 조약은 즈베노 외에 공산주의자, BZNS-Pladne, 일부 급진파 등 소수만이 지지하는 입장이었다.[57]

1941년 1월, 게오르기에프는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차르에게 불가리아의 중립 유지를 요구하는 공동 면담 요청서에 서명했다. 그는 2월 11일 보그단 필로프 총리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가리아는 삼국 동맹에 가입하고 독일군이 그리스로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다.[58]

파시즘에 반대하는 즈베노의 주요 인물로서, 게오르기에프는 불가리아 공산당과 접촉하여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2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주도로 조국 전선이 창설되자, 게오르기에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조국 전선 전국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36] 공산주의자들은 라초 안젤로프를 통해 게오르기에프와 연락을 취했으며, 초기 조국 전선 활동은 주로 서로 다른 조직 간의 연락을 유지하고 공동 문서를 배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59]

1943년 8월 10일에는 키릴 드라말리예프, 니콜라 페트코프, 키몬 게오르기에프, 그리고리 체쉬메제프, 디모 카자소프 등이 참여하는 조국 전선 전국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구성되었다.[59][60] 같은 해 8월 28일 차르 보리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보그단 필로프 총리는 정국 수습을 위해 게오르기에프를 포함한 야당 정치인들과 상의했다. 9월 1일, 게오르기에프는 다른 9명의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타르노보 헌법의 복원과 불가리아 대국민 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불가리아의 외교 정책 방향을 전환할 기회로 삼으려 했으나,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61]

1943년 가을, 조국 전선 내부에서는 마케도니아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게오르기에프는 니콜라 페트코프의 지지를 받아 통일되고 독립적인 마케도니아 국가 창설을 주장하는 글을 작성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없으면 군 장교들 사이에서 조국 전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의 관계 및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구상하던 발칸 연방 문제 때문에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주저했다. 결국 12월, 마케도니아의 유고슬라비아 반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타협적인 내용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다.[62]

1944년 초, 게오르기에프와 즈베노 소속 국회의원 페트코 스타이노프는 조국 전선 외부의 정당까지 아우르는 야당 연합 행동을 추진했다. 게오르기에프는 정부와 의회에 중립 정책 복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점령군 철수,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연설문을 준비했다. 이 연설문은 1월 11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하고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전날 소피아에 가해진 폭격으로 회의가 무산되면서 게오르기에프 개인 명의로 전달되었다.[63]

폭격 이후 게오르기에프는 가족과 함께 부르가스로 피신했으나, 1월 12일 그곳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내 소유의 저택에 머물다가 이후 도시 외곽 포도원의 별장으로 옮겨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8월 말까지 지냈다.[64] 연금 상태에서도 게오르기에프는 주로 흐리스토 스토이코프를 통해 소피아의 동지들과 활발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1944년 봄, 조국 전선 지도부는 비밀 정부 구성을 논의하며 게오르기에프를 수반으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게릴라 활동 지역의 불안정성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64] 4월에는 니콜라 무샤노프, 아타나스 부로프, 크루스티요 파스투호프, 디미타르 기체프, 알렉산더 기르기노프, 페트코 스타이노프, 베르길 디모프, 니콜라 페트코프,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등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섭정단과 총리에게 독일과의 관계 단절과 정부 교체를 요구하는 새로운 호소문을 발표하는 데 참여했다. 8월 6일에는 소피아에서 열린 여러 야당 지도자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그의 노력으로 공산주의자들도 참여하게 되었고, 이 회의에서 소위 '13인 선언'이 채택되었다.[65]

4. 4. 1944년 쿠데타

1944년 초, 키몬 게오르기에프와 즈베노와 가까운 국회의원인 페트코 스타이노프는 조국 전선 외부의 정당들을 포함한 야당의 공동 행동을 조정하려고 시도했다. 게오르기에프는 정부와 의회에 중립 복원, 유고슬라비아그리스에서 점령군을 불가리아로 복귀시키고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연설문을 준비했다. 이 연설문은 1월 11일 다양한 야당 지도자들이 논의하고 서명할 예정이었지만, 전날의 폭격으로 회의가 열리지 못했고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개인 자격으로 연설문을 보냈다.[63]

폭격 후,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가족과 함께 부르가스로 떠났고, 1월 12일 가택 연금되었다. 처음에는 아내의 상속 저택에서 살았지만, 그 후 도시 외곽의 포도원 안에 있는 별장으로 영구적인 경찰 감시를 받으며 이주했고, 8월 말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44년 봄, 조국 전선 지도부는 불가리아를 위한 비밀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고려했고, 그는 이를 이끌고 지하로 들어갈 준비를 했지만, 게릴라들이 정부를 위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설립되지 못했다.[64] 게오르기에프는 부르가스에서 수도 소피아와 활발한 연락을 유지했는데, 주로 흐리스토 스토이코프를 통해서였다. 4월에는 니콜라 무샤노프, 아타나스 부로프, 크루스티요 파스투호프, 디미타르 기체프, 알렉산더 기르기노프, 페트코 스타이노프, 베르길 디모프, 니콜라 페트코프, 콘스탄틴 무라비에프가 서명한 섭정단과 총리에게 독일과의 관계를 끊고 정부를 바꾸라는 야당 지도자들의 새로운 호소에 참여했다. 8월 6일에는 소피아에서 다양한 야당 지도자들의 회의에 참여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라 공산주의자들도 참여하여 소위 13인의 선언을 채택했다.[65]

8월 말, 의회는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이끄는 조국 전선 내각을 포함한 새로운 정부 구성에 대한 다양한 선택 사항을 고려했다. 8월 27일 그는 경찰 경비와 함께 참코리아의 섭정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은 그에게 공산주의자 없이 내각에 합류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게오르기에프는 거절했고, 그 후 석방되어 소피아로 돌아갔다. 8월 30일, 그는 특정 개인이 서명한 조직의 첫 번째 공식 문서인 불가리아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발표한 조국 전선의 14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66]

그 후 며칠 동안 키몬 게오르기에프의 집은 조국 전선이 준비한 쿠데타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조직의 지도자들이 매일 방문했다. 다미안 벨체프는 완전히 게오르기에프의 집으로 이사했다. 9월 6일, 이반 보네프가 이끄는 몇 명의 파르티잔으로 구성된 상시 무장 경비대가 그곳에 배치되었다.[67] 이반 마리노프 장군의 평화적인 정부 교체 시도가 실패한 후, 조국 전선의 좁혀진 국가 위원회는 9월 7일 키몬 게오르기에프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군사 쿠데타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10시, 쿠데타 수행을 위한 연합의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다미안 벨체프가 이끄는 군사 연합 활동가 회의가 열렸다.[68] 9월 8일 아침, 조국 전선의 대표자들 - 키몬 게오르기에프, 니콜라 페트코프, 디미타르 네이코프, 키릴 드라마리예프, 디모 카자소프 - 는 총리와 만나 지난 며칠 동안 야당 시위의 해산을 항의하고 주요 도시에서 집회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69]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9월 8일 오후 4시에 조국 전선 국가 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다. 정부 구성이 결정되고 정책 텍스트가 승인되었다.[70]

미래 정부의 구성과 새로운 섭정은 9월 8일 오후 4시 게오르기에프의 집에서 키몬 게오르기에프, 도브리 테르페셰프, 니콜라 페트코프, 다미안 벨체프 간의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내각에는 불가리아 공산당, 즈베노, 불가리아 농민인민연합-플라드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각각 4명의 대표, 무소속 2명이 포함되고, 총리는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될 것이며, 이는 소련 독재자 요제프 스탈린과 합의된 결정이었다.[71] 게오르기에프는 쿠데타의 밤을 다미안 벨체프, 니콜라 페트코프, 트라이초 도브로슬라브스키와 함께 이글스 브리지 근처 얀코 안토노프의 집에서 보냈다.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 - 도브리 테르페셰프, 안톤 유고프, 게오르기 찬코프, 안젤 차네프, 카탸 아브라모바 - 가 그 당시 있었던 피터 브란체프의 아파트의 이웃이었다.[72]

쿠데타는 9월 9일 오전 2시에 전쟁부 건물 점거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반 마리노프 전쟁 장관은 쿠데타에 동조하여 제1보병사단과 예비 장교 학교에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4시간 이내에 수도의 주요 행정 및 통신 노드가 통제 하에 들어갔고 쿠데타의 정치 지도자들이 전쟁부로 이동했다. 오전 6시 25분,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라디오를 통해 불가리아 국민에게 짧은 포고문을 읽고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발표했으며, 이는 얼마 후 키릴 공작과 니콜라 미호프의 칙령에 의해 승인되었다.[73][74][70] 쿠데타 성공 후, 게오르기에프는 조국 전선 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했다.

4. 5. 제2차 게오르기에프 내각 (1944-1946)

새 정부의 첫 단계는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1944년 9월 9일 저녁, 디미타르 미할체프, 키릴 스탄체프, 디미타르 가네프 및 라이초 슬라브코프를 포함한 대표단이 제3 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 표도르 톨부힌 원수에게 파견되었고, 같은 날 오후 10시에 요시프 스탈린은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 군사 행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17일,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소피아 법원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정부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75][76]

즈베노는 9월 18일에 공식적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10월 1일 전국 회의를 통해 정치 정당인 인민 연합 즈베노로 전환되었고,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집행국 의장이 되었다. 즈베노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기반을 넓히며 전국적인 조직 구조를 구축하려 했으나, 지역 수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에 직면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즈베노 회원들이 체포되거나, 민병대에 의해 금품을 갈취당하고, 조국 전선 지역 조직 가입이 거부되며 "파시스트"로 낙인찍히는 일이 발생했다.[77]

새 정부 출범 초기 몇 달간은 내무부와 법무부를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공포 정치가 자행되었다. 여러 추정에 따르면 11월 말까지 최소 2,000명에서 최대 30,000명이 재판 없이 살해되었다. 11월 중순, 불가리아 각료회의는 공개적으로 이러한 사적 제재(린치)를 반대한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중단되지 않았다.[78] 소련의 요구에 따라 10월 10일, 불가리아군은 전쟁 시작 시 점령했던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및 트라키 지역에서 철수했다. 1944년 10월 28일, 외무부 장관 페트코 스타이노프가 이끄는 대표단(니콜라 페트코프, 도브리 테르페셰프, 페트코 스토야노프 장관 포함)은 모스크바에서 연합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불가리아는 국내에 주둔한 소련군의 유지 비용 부담, 연합 통제 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정부 운영, 독일과의 전쟁 참여 등 가혹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다.[79]

12월 3일, 다미안 벨체프 국방부 장관의 제안으로 각료회의는 인민 법원에 기소된 군 장교들이 전선에서 용맹을 보이면 사면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다음 날 공산주의자들은 이 법령을 "반혁명적"이라 비난하며 반대 시위를 조직했고, 12월 6일에는 연합 통제 위원회 위원장 세르게이 비류조프의 압력으로 법령이 철회되었다. 이후 며칠간 공산주의자와 소련 장교들이 참모총장직과 정보 부서를 장악했으며, 국방부에 두 개의 차관직을 신설하여 차지했다.[80]

1945년 1월 26일, 각료회의는 18개 조항으로 구성된 "인민 권력 보호를 위한 법령"을 승인했다. 이 법령에는 사형을 규정한 조항 5개와 종신형을 규정한 조항 4개가 포함되었으며, 이후 몇 년간 이 법령은 반대파와 장교들을 기소하는 주요 근거가 되어 전체주의 정권 강화에 이용되었다.[81] 1월 23일부터 31일까지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요시프 스탈린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만났다. 방문의 주된 목적은 소련의 중재 하에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간의 동맹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조약에 대한 비밀 의정서는 양국이 동등한 관계를 맺을지(불가리아 입장), 아니면 불가리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여섯 번째 공화국으로 편입될지(유고슬라비아 입장)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미래의 연방 창설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불가리아가 평화 조약 체결 전까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고 본 영국미국의 반대로 체결되지 못했다.[82]

1945년 2월 9일,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조국 전선 제1차 회의에서 정부 활동 보고를 했다. 인민 법원의 결정에 따른 첫 처형이 집행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자기 파괴, 임의성 및 폭력의 사례"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신속히 억제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인민 법원을 통한 과거 청산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는 각료회의가 법령으로 통치하고 조국 전선 외부의 정치 조직이 불법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불가리아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회복되었다고 선언했다.[83]

1945년 봄, 조국 전선 내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농민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불가리아 농민연합(BZNS)이 분열되었다. 니콜라 페트코프가 이끄는 BZNS의 주요 세력(BZNS - 니콜라 페트코프)은 야당으로 돌아섰고, 친공산주의 성향의 분파(BZNS (카지온)) 인사들이 정부 내 농민연합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84]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키몬 게오르기에프와 다미안 벨체프는 트라이초 코스토프를 만나 조국 전선을 다당 연립으로 유지하고 정부 내에서 즈베노의 입지를 보장받겠다는 약속을 받았다.[85] 그 결과, 1945년 위기 동안 즈베노는 조국 전선에 잔류했으며, 게오르기에프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충성하며 즈베노 내 반대 의견을 잠재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6]

게오르기에프 정부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26일로 선거를 계획했다. 미국영국은 자유로운 선거 실시를 위해 연기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선거일 바로 전날, 스탈린의 개인적인 지시로 선거는 11월로 연기되었다. 이후 몇 주 동안 야당이 합법화되고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11월 18일에 치러진 선거는 야당이 보이콧한 가운데 실시되었으며,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부르가스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87] 12월, 미국과 영국은 불가리아 정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야당 대표 2명을 정부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1946년 1월 5일,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키몬 게오르기에프, 다미안 벨체프, 안톤 유고프는 야당 지도자인 니콜라 페트코프와 코스타 룰체프를 만났다. 그러나 야당 지도자들은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종식을 요구하며 정부 참여를 단호히 거부했다. 1월 7일, 게오르기에프는 스탈린에게 소환되어 야당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강하게 질책받았다. 1월 10일에는 소련 외무부 제1차관 안드레이 비신스키가 소피아에서 페트코프와 룰체프를 만났지만, 그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88]

4. 6. 제3차 게오르기에프 내각 (1946)

1946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키몬 게오르기에프


1946년 3월, 키몬 게오르기에프 정부는 개편되었다. 이는 불가리아의 전체주의 정권 도입 지연을 비판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스탈린은 불가리아 공산당(BPC)과 불가리아 농민인민연합(BZNS)의 내각 내 영향력 강화, 외무부 장관 페트코 스타이노프의 해임 및 외무부 직원 숙청, 재무부 장관 촌초 콜라코프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기에프는 스탈린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신임을 유지하며 총리직을 유지했고, 무임소 장관직도 겸임했다.[89][2]

1946년 여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대한 스탈린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군대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차르 크룸", "중립 장교" 등 반공 조직 혐의를 받는 장교들과 G. M. 디미트로프, 크루스토 파스투호프 같은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진행된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재판과 연계되어 진행되었으며, 미하일로비치는 재판 과정에서 G. М. 디미트로프, 아센 스탐볼리이스키, 그리고 전쟁 장관 다미안 벨체프와의 연관성이 언급되었다.[90] 이러한 상황에서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공개적으로 군사 동맹과 개인적으로 벨체프를 지지하며 그를 "가장 가깝고 뗄 수 없는 개인적인 친구, 정치적 동료, 그리고 내각의 동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 게오르기에프의 영향력은 이미 제한적이었고, 벨체프에 대한 압력은 거세졌다. 7월 2일, 공산주의자들은 군 통제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전쟁 장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결국 8월 2일, 게오르기에프는 그의 측근인 키릴 스탄체프(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음)와 다미얀 벨체프의 해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벨체프는 사실상 크룸 레카르스키로 교체되었고 연금되었다.[91]

1946년 8월 11일부터 9월 3일까지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파리 평화 조약 준비를 위한 불가리아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머물렀다. 그는 소련 외무 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미국 국무 장관 제임스 번스 등 여러 정치인들을 만났다. 불가리아는 추축국이 아닌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동구권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가 요구한 전쟁 배상금을 상당 부분 줄이는 데 성공했다.[92] 불가리아로 돌아온 후, 게오르기에프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게 개인적으로 요청하여 다미얀 벨체프의 신변 보호를 약속받았다. 9월 25일, 게오르기에프는 명목상 전쟁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고, 벨체프는 스위스 대사로 임명되어 당분간 공개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93] 게오르기에프는 1946년 9월부터 11월까지 전쟁부를 담당했으며, 이 기간 동안 대장 계급으로 진급했다.[2]

1946년 10월 5일,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소피아에서 열린 집회에서 제6차 대국민 의회 선거를 위한 조국 전선의 선거 운동 시작을 알렸다. 조국 전선은 공동 명부와 소속 정당별 개별 투표 방식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선거 결과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절대 다수를 확보한 반면, 게오르기에프가 속한 인민 연합 즈베노는 약 7만 표를 얻는 데 그쳐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게오르기에프 자신을 포함한 즈베노 지도부 인사들은 조국 전선의 공동 명부에 힘입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94]

5. 그 이후의 삶

대국민 의회 선거와 1946년 불가리아 공화국 국민투표 이후, 총리직은 공산당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맡게 되었다.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소련 정부의 신임을 잃은 페트코 스타이노프를 대신하여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격으로 그는 불가리아 대표단에 참여하여 1947년 2월 10일 파리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1947년 12월 12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두 번째 정부가 출범하면서 게오르기에프는 외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전기화 및 토지 개간 장관이 되었다. 그는 1959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으며, 잠시 건설 및 건축 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1950년까지 부총리직을 겸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다시 부총리를 지냈다.[2] 이 시기 게오르기에프는 불가리아 공산당의 완전한 통제 하에 놓인 국가 정치 지도부에서는 점차 밀려났다. 그러나 전기화 장관으로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는 전력 산업 건설이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추진하던 대규모 산업화 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47년부터 1959년까지 불가리아의 전력 생산은 6배 이상 증가했으며, 수많은 발전소, 댐, 송전 시설이 건설되었다.[95]

한편, 1948년 다미안 벨체프의 불가리아 시민권이 박탈된 이후, 국가 보안부는 게오르기에프에 대한 비밀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소련 블록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으며, 게오르기에프는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와의 우호 관계를 지지해 온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조사는 공개적인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고, 게오르기에프 본인도 몇 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96]

1949년 9월,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소위 "인민민주주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 지역에 전체주의 정권 수립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웠던 즈베노 활동가들조차도 불명예를 안게 된 다미안 벨체프, 바실 유루코프, 페트코 스타이노브 등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받았다. 결국 1949년 2월 19일 열린 회의에서 인민 연합 즈베노는 스스로의 역할을 다했다고 선언하며 해산을 결의하고 조국 전선에 완전히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즈베노는 독립적인 정치 조직으로서의 역사를 마감했다.[97] 게오르기에프는 1952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1969년 9월 28일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20] 비교적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6. 개인적인 삶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부르가스의 유력한 로데바 가문의 베셀리나 로데바와 결혼하여 두 딸, 마리아(1928–1986)와 코르넬리아(1931년 출생)를 두었다.[98] 마리아는 농학자가 되어 대학교수가 되었고, 조국 전선 간부인 기뇨 가네프와 결혼했다.[99][100]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공공 업무에 종사했으며, 아내 소유의 대규모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 1940년대에는 포도주와 포도 생산으로 약 400만불가리아 레프에서 500만불가리아 레프를 벌었다.[101]

7. 사망

키몬 게오르기에프의 묘지.


추모 명판.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1969년 9월 28일 오후 1시경, 한 달 전에 개장한 바르나 화력발전소를 방문한 직후, 불가리아 바르나에 있는 각료회의 휴게소에서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9월 30일, 토도르 지브코프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소피아 중앙 묘지에 안장되었다.[102]

8. 수상

1962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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