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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스테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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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톨리 스테셀은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뤼순 요새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러일 전쟁 중 뤼순 요새를 방어했으나, 일본군에 항복하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특사로 감형되었다. 스테셀은 러시아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뤼순 요새를 잘 지켜낸 공로로 칭송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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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스테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로마자 표기Anatolii Mikhailovich Stoessel
독일어 표기Anatolij Stößel
러시아어 표기Анато́ли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ссель
출생일1848년 7월 10일
사망일1915년 1월 18일
출생지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지크멜니크, 포돌리아 현, 러시아 제국(현재 빈니차 주, 우크라이나)
아나톨리 스테셀
아나톨리 스테셀 (1890년대)
군사 정보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66년 – 1906년
최종 계급대장
참전 전투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
의화단 운동
러일 전쟁
난산 전투
여순항 포위전
기타 정보

2. 생애

아나톨리 스테셀은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다. 184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66년 파벨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청나라의화단 운동 진압 등에 참전하며 경력을 쌓았고, 여러 부대의 지휘관을 역임했다.[1]

1903년 8월, 스테셀은 만주 뤼순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관동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였으나, 후임 뤼순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중장과의 지휘권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했다.[1]

뤼순 포위전 당시, 초기에는 부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의 활약으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며 방어했으나, 콘드라첸코의 전사와 주요 방어 거점 함락 이후 1905년 1월, 요새 내 잔존 병력과 물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에게 항복했다. 이 조기 항복 결정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1]

전쟁 후 스테셀은 뤼순 요새를 조기에 항복시킨 책임을 물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1908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금고 1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09년 니콜라이 2세 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었다.[1][2] 군에서 추방된 후에는 모스크바에서 차 상인으로 지내다가 1915년 흐밀니크(현재 우크라이나 빈니차주)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아나톨리 스테셀은 184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인 이반 마트베예비치 스테셀 중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6년 파벨 군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군 경력을 시작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여러 부대를 지휘했는데, 1897년에는 제16 라도가 보병 연대장을 맡았고, 같은 해부터 1899년까지는 제44 캄차카 보병 연대장을 지냈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는 제3 동시베리아 저격여단을 이끌었다. 이 시기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 운동(1899년~1901년)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1900년 7월 톈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다.[1]

1903년 8월 12일, 스테셀은 만주 뤼순에 주둔한 러시아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1897년부터 뤼순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동안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여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게 요새화된 곳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스테셀은 같은 해 3월 관동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와 동시에 요새 전술 전문가로 알려진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중장이 스테셀의 후임으로 뤼순 요새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테셀은 당초 요새 사령관 지위를 넘겨주지 않으려 했고, 스미르노프가 자신의 부하라는 식으로 명령을 해석하며 뤼순에 계속 머물렀다. 이로 인해 뤼순 요새에는 두 명의 사령관이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스테셀은 스미르노프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보급 및 증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차르에게 스미르노프를 비난하는 내용의 오해 소지가 있는 보고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04년 7월 3일, 만주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이 구축함을 타고 뤼순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이를 무시했다.[1] 결국 뤼순 요새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방어하는 러시아 관동군이 신설되고 스테셀이 그 사령관이 되면서, 스미르노프 중장에게 요새 사령관직을 넘겨주었으나, 이러한 초기 지휘권 혼란은 이후 방어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2. 2. 뤼순 요새 사령관

1903년 8월, 스테셀은 만주 뤼순항의 러시아 제국군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당시 러시아 제국1897년부터 뤼순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요새 중 하나로 만들었다.

뤼순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러시아 만주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은 요새 전술 전문가였던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중장을 후임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스테셀은 처음에 요새 사령관 지위를 고집하며 스미르노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아, 한동안 뤼순 요새에는 두 명의 사령관이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1904년 3월, 뤼순을 포함한 지역 일대를 방어하는 관동군이 신설되고 스테셀이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스미르노프가 공식적인 뤼순 요새 사령관이 되었다.[1] 그럼에도 스테셀은 뤼순에 계속 머물며 스미르노프의 명령을 종종 무시하고 보급품 및 증원 요청을 거부했으며, 1904년 7월 3일에는 쿠로파트킨 장군이 구축함을 타고 뤼순항을 떠나라는 명령조차 따르지 않았다.[1]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1904년 7월부터 일본군 제3군이 뤼순 포위전을 시작하자, 스테셀은 방어전을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 방어 계획 수립과 실행은 요새 축성 및 전술 전문가였던 부하(정확히는 스미르노프의 부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에게 거의 일임하였다. 콘드라첸코의 효과적인 지휘 덕분에 러시아군은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요새를 방어했다. 스테셀은 1904년 8월, 일본군이 제안한 여성 및 비전투원의 안전한 철수를 거부하기도 했다.[1]

노기(왼쪽 중앙), 스테셀(오른쪽 중앙)과 참모들


그러나 1904년 12월, 일본군이 203고지를 점령하고 동계관산, 이룡산, 송수산 등 주요 정면 방어 보루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특히 12월 15일, 방어의 핵심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이 동계관산 북보루 전투 중 전사하면서[1] 러시아군의 방어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스테셀은 콘드라첸코의 후임으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알렉산더 포크(Alexander Fok)를 임명했다.[1]

결국 1905년 1월 1일, 완타이(만두산)가 함락되자 스테셀은 다른 고위 장교들과의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본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장군에게 항복을 제안했다. 당시 요새에는 아직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상당량의 식량 및 탄약이 남아있었기 때문에,[1] 그의 이러한 조기 항복 결정은 많은 러시아군 장교들의 분노를 샀으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1905년 1월 2일, 수이시잉에서 항복 협정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다른 러시아군 포로들과 달리 스테셀은 영국 여객선을 타고 편안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1]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스테셀은 뤼순 요새를 조기에 항복시킨 책임을 물어 1906년 9월 30일 러시아 제국군에서 해임되었고, 곧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08년 2월 7일, 군법 회의는 그에게 겁쟁이로서 뤼순항을 일본군에게 항복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1] 하지만 이 형은 나중에 금고 1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09년 5월 6일 니콜라이 2세 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었다.[2] 일부에서는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스테셀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것이 감형의 주된 이유라고 보기도 한다. 석방된 후 스테셀은 군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차 상인 등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15년 흐밀니크(오늘날 우크라이나 빈니차주에 위치)에서 사망했다.

2. 3. 러일 전쟁과 뤼순 포위전

1903년 8월, 스테셀은 뤼순 요새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뤼순항은 러시아 제국1897년부터 점령하여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 만주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은 뤼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요새 전술 전문가인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중장을 후임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스테셀은 처음에는 요새 사령관 지위를 고수하며 스미르노프에게 지휘권을 넘기지 않아, 한동안 뤼순 요새에는 두 명의 사령관이 상주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이후 뤼순항을 포함한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러시아 관동군이 신설되고 스테셀이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스미르노프에게 요새 사령관직을 넘겨주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스테셀은 같은 해 3월 관동군 사령관으로 승진했으며, 스미르노프는 공식적으로 뤼순항 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스테셀은 여전히 뤼순에 머물며 스미르노프를 자신의 부하처럼 취급했고, 그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보급품 및 증원 요청을 묵살했다. 또한 차르에게 스미르노프를 비난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보고를 보내기도 했다. 1904년 7월 3일에는 총사령관 쿠로팟킨이 구축함을 타고 뤼순항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무시했다.[1]

뤼순 포위전(1904년 7월 ~ 1905년 1월)이 시작되자 스테셀의 지휘는 무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일본군이 난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인 1904년 8월, 여성과 비전투원을 뤼순항 밖으로 철수시키라는 일본 측의 제안을 거부했으며, 가을에는 요새 내 식량 부족 사태를 초래했다. 포위전 초기에는 요새 축성 및 전술 전문가였던 부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에게 방어 계획의 대부분을 맡겨 일본 제3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1904년 12월, 일본군에게 203고지를 빼앗긴 것을 시작으로 동계관산, 이룡산, 송수산 등 주요 정면 방어 보루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결정적으로 12월 15일, 방어의 핵심 인물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이 동계관산 북보루에서 전사하자 스테셀은 후임으로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던 알렉산더 포크를 임명했다. 이후 12월 18일에는 동계관산 북보루가, 12월 28일에는 어룡 요새가 일본군의 갱도 폭파로 파괴되었다. 12월 31일에는 마지막 주요 요새였던 송수산마저 함락되었다.

1905년 1월 1일, 완타이 고지가 함락되자 스테셀과 포크는 다른 러시아 고위 참모진과 아무런 상의 없이 일본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이 갑작스러운 결정에 많은 러시아 장교들은 분노했다. 노기 장군은 항복 제안을 수락했고, 양측은 1905년 1월 2일 수이시잉에서 항복 협정에 서명했다. 항복 후 뤼순 요새를 점령한 일본군은 내부에 상당한 양의 식량과 탄약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으며, 이 때문에 일본군과 일부 러시아 측 인사들은 스테셀이 너무 일찍 항복했다고 여겼다. 항복한 러시아군은 전쟁 포로로 수용되었으나, 스테셀은 영국 여객선을 타고 편안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1]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스테셀은 1906년 군에서 해임되고 체포되었다. 1908년 2월 군법회의에서 그는 뤼순을 조기에 항복시킨 책임을 물어 겁쟁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1] 그러나 이 형은 이후 금고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감형에는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가 스테셀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1909년 5월, 니콜라이 2세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으나[2] 군에서는 추방되었다. 그는 이후 모스크바에서 차 상인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15년 흐밀니크(현재 우크라이나 빈니차주)에서 사망했다.

2. 4. 항복과 그 이후

뤼순 포위전 말기인 1904년 12월, 일본군에게 203고지를 빼앗기고 동계관산, 이룡산, 송수산 등 주요 정면 방어 보루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스테셀이 의지하던 부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이 1904년 12월 15일 치쿠안 요새에서 전사하자, 스테셀은 무능하다고 평가받던 알렉산더 포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1] 이후 일본군은 지뢰 공격을 감행하여 12월 18일 치쿠안 요새, 12월 28일 어룡 요새를 파괴하고 점령했다.

1904년 12월 31일, 마지막 주요 요새였던 성수 요새마저 일본군의 지뢰 공격으로 파괴되고 함락되었다. 다음 날인 1905년 1월 1일, 스테셀과 포크는 다른 고위 참모진과 상의 없이 일본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에게 항복을 제안했다. 이는 많은 러시아 장교들의 분노를 샀다.[1] 노기 장군은 항복을 받아들였고, 1월 2일 수이시잉에서 양측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당시 뤼순 요새에는 1만 명이 넘는 병력이 남아 있었고,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많은 양의 식량과 탄약을 발견하면서 스테셀의 조기 항복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1]

항복 후 스테셀은 다른 포로들과 달리 영국 여객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1] 그러나 1906년 9월 30일 러시아 제국군에서 해임되었고, 곧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겁쟁이처럼 뤼순 요새를 조기에 항복시킨 혐의로 기소되었고, 1년간의 심리 끝에 1908년 2월 7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1]

사형 선고는 이후 금고 10년형으로 감형되었는데, 여기에는 항복을 받았던 일본군 장군 노기 마레스케의 구명 운동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1909년 4월(또는 5월 6일[2]), 황제 니콜라스 2세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사면 후 군에서 추방된 스테셀은 모스크바에서 차 상인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15년 흐밀니크(현재 우크라이나 빈니차주)에서 사망했다.

3. 평가

아나톨리 스테셀에 대한 평가는 그의 러일 전쟁여순항 포위전에서의 역할과 행적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나뉜다. 러시아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노기 대장의 강력한 라이벌로서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3]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내에서도 그의 능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나타났다.

특히 여순 요새의 조기 항복 결정[4][5]과 유능한 부하였던 콘드라첸코 소장과의 관계 및 역할 분담[6]은 스테셀의 군사적 능력을 평가하는 주요 쟁점이다. 그의 개인적인 면모나 기사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도 전해진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들은 스테셀이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임을 시사한다.

3. 1. 러시아에서의 평가

여순항(뤼순) 개성 문제에 관한 군법회의 심문. 왼쪽부터 전 여순요새 사령관 스밀로프, 전 동시베리아 저격병 제4사단장 포크, 전 관동군 참모장 레이스, 전 관동군 사령관 스테셀, 포크의 변호인 돔브로프스키 중장.


러시아 내에서 스테셀은 자존심이 강하고 세력 다툼에 몰두하여 작전 지휘가 형식적이고 유연성이 부족하며, 결단력과 상상력이 부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부하들에게는 규율과 충성만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관료 군인' 유형으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당시 부하 장병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스테셀에 대한 평가는 "보통 수준의 장군" 또는 "어리석은 장군"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러일 전쟁 당시 제3군의 맹공격으로부터 여순요새를 끈질기게 방어하며 노기 대장의 라이벌로서 일본군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수사영의 회견'[3]과 같은 문부성의 기록물에서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사 연구가 진전되고 러시아 측의 평가가 알려지면서, 스테셀을 '어리석은 장군'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비록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스테셀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축성 기술과 요새 농성전 전문가이자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을 신뢰하여 작전 계획을 거의 일임했으며, 그의 계획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러한 스테셀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을 장기간 여순요새에 묶어두고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데 기여했으며, 일본군의 전체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여지가 있다. 또한, 군기를 어지럽히는 자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내렸기 때문에 여순요새 내 러시아군의 규율은 비교적 높게 유지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순요새의 조기 항복 책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항복 당시 요새에는 여전히 전투를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식량, 탄약이 남아 있었다는 주장[4]과 함께, 스밀로프 등 강경 항전파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항복을 결정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비 병력이 개전 초기의 4분의 1로 줄어들었고, 계속된 전투로 병사들의 피로가 극심했으며, 티푸스, 괴혈병, 조류독감 등 질병이 만연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는 점[5]을 고려할 때, 스테셀의 항복 결정이 불가피하고 타당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개인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스테셀은 '수사영의 회견' 당시 노기 대장에게 두 아들의 전사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칼을 찬 채 항복 조인에 임하도록 배려해 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서로의 용맹을 칭찬했다. 이는 그가 기사도 정신을 중시하는 군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말년에는 전사한 부하들의 유자녀 4명을 양자로 삼고, 노기 대장의 순사 소식을 듣고 익명으로 조의금을 보내는 등 인정 많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군사사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만약 여순요새 사령관이 스테셀이 아닌 다른 유능한 지휘관이었다면,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 훨씬 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며 전쟁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편, 콘드라첸코의 주요 임무는 요새를 최대한 오래 지키며 일본 제3군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음에도, 그는 제2차 총공격 시점까지 자주 요새 밖으로 나가 반격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일본군이 점령한 요새 외곽 지역(7월 3일)이나 반룡산 보루(9월 30일)에 대한 반격은 모두 일본군의 피해는 미미했던 반면 러시아 측의 피해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만약 콘드라첸코가 최고 지휘관이었다면 불필요한 병력 소모로 인해 요새가 실제보다 더 빨리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6] 실제로 여순요새 함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비 병력의 고갈이 꼽히는데, 보급이 끊긴 포위된 요새의 상황을 고려하면 콘드라첸코의 공격적인 전술은 방어전에 반드시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스테셀은 콘드라첸코의 거듭된 출격 요청을 거부했는데, 농성전의 본질을 고려하면 스테셀의 판단이 더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3. 2. 일본에서의 평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제3군의 맹공격으로부터 여순요새를 오랫동안 방어하며 노기(乃木) 대장의 라이벌로서 일본군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문부성 쇼가(唱歌) '수사영(水師営)의 회견'[3] 등에서는 스테셀을 러시아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사 연구가 진행되고 러시아 측의 평가가 알려지면서, 스테셀을 '어리석은 장군'으로 보는 시각이 일본 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스테셀이 축성 기술 및 요새 농성전 전문가이자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을 신뢰하여 작전 계획을 거의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은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로 인해 러시아군은 일본군을 장기간 여순요새에 묶어두고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으며, 이는 일본군의 전체 작전에 큰 차질을 주었다. 또한 군기를 어지럽히는 자를 엄벌에 처해 여순요새 내 러시아군의 규율을 높게 유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여순요새의 조기 항복 결정에 대해서는 비판이 따른다. 항복 당시 요새에는 아직 충분한 병력과 식량, 탄약이 남아 있어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음에도[4], 스밀로프 등 강경 항전파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항복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비 병력이 개전 초기의 4분의 1로 줄었고, 병사들의 피로 누적과 함께 장티푸스, 괴혈병, 조류독감 등이 만연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는 점[5]을 고려하면, 스테셀의 항복 결정이 불가피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수사영 회견' 당시 노기 대장에게 두 아들의 전사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노기로부터 칼을 찬 채 항복 조인에 임하는 예우를 받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서로의 분투를 칭찬한 일화는 그가 기사도 정신을 중시하는 군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말년에는 전사한 부하들의 유자녀 4명을 양자로 삼고, 노기 대장의 순사 소식을 듣고 익명으로 조의금을 보내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일부 군사사 연구가들은 만약 여순요새 사령관이 스테셀이 아닌 다른 유능한 인물이었다면 일본군의 피해가 더욱 컸을 것이며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콘드라첸코가 계속 지휘했다면 요새 밖으로 나가 반격하는 작전을 자주 펼쳐 불필요한 병력 소모를 야기했을 것이고, 오히려 요새가 더 빨리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6] 실제로 여순요새 함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예비 병력 고갈이었음을 감안하면,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콘드라첸코의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스테셀의 농성 전략이 더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3. 3. 종합적 평가



러시아 내에서 스테셀은 자존심이 강하고 세력 다툼에 몰두하며, 작전 지휘는 형식적이고 유연성이 부족하며 결단력과 상상력도 부족한 인물로 평가된다. 부하들에게는 규율과 충성만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관료 군인' 유형으로 여겨졌으며, 당시 부하 장병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스테셀은 "평범한 장군" 또는 "무능한 장군"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면,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 제3군의 맹공격으로부터 여순요새를 오랫동안 방어하며 노기 대장의 호적수로서 일본군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했다. 문부성 쇼카(唱歌) '수사영의 회견'[3] 등에서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사 연구가 진행되고 러시아 측의 평가가 알려지면서, 스테셀이 실제로는 유능하지 못했다는 '무능한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아들이는 시각이 늘어났다.

현대에 와서 스테셀은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그가 축성 기술과 요새 방어전 전문가이자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던 콘드라첸코 소장을 신뢰하여 작전 계획을 거의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스테셀의 결정 덕분에 러시아군은 여순항 포위전에서 장기간 일본군을 묶어두고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으며, 이는 일본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군기를 어지럽히는 자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내려 여순요새 내 러시아군의 규율을 높게 유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여순요새의 조기 항복 책임에 대해서는 논란이 따른다. 항복 당시 요새에는 아직 충분한 병력과 식량, 탄약이 남아 있어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주장[4]과 함께, 스밀로프 등 항전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항복을 결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비 병력이 개전 초기의 4분의 1로 줄어들었고, 계속된 전투로 병사들의 피로가 극심했으며 티푸스, 괴혈병, 조류독감 등 질병이 만연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는 점[5]을 고려할 때, 스테셀의 항복 결정이 불가피하고 타당했다는 견해도 있다.

인간적인 면모도 전해진다. '수사영의 회견' 당시 노기 대장의 두 아들이 전사한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노기 대장으로부터 칼을 찬 채 항복 조인식에 임하는 예우를 받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서로의 분투를 칭찬한 일화는 그가 기사도 정신을 중시한 군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말년에는 전사한 부하들의 유자녀 4명을 양자로 삼았고, 노기 대장의 자결 소식을 듣고 익명으로 조의금을 보내는 등 인정 많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일부 군사사 연구가들은 만약 여순요새 사령관이 스테셀이 아닌 다른 유능한 인물이었다면,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 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고 전쟁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콘드라첸코 소장의 전술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의 주 임무는 요새를 지키며 일본 제3군을 최대한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것이었음에도, 제2차 총공격 이전까지 요새 밖으로 나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가 잦았다. 예를 들어, 일본군이 점령한 요새 외곽 지역에 대한 반격(7월 3일)이나 반룡산 보루에 대한 반격(9월 30일) 등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경미했던 반면 러시아군의 피해는 컸다. 이 때문에 콘드라첸코가 지휘를 계속했다면 불필요하게 병력을 소모하여 실제 역사보다 더 빨리 요새가 함락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 실제로 여순요새 함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비 병력 고갈이 꼽히는데, 보급이 끊긴 포위 상태에서 콘드라첸코의 적극적인 공세는 방어전에 불리했다는 평가다. 반면 스테셀은 콘드라첸코의 잦은 출격 요청을 거부했는데, 농성전의 본질을 고려하면 스테셀의 판단이 더 합리적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4. 일화

강한 성격의 아내 베라에게는 평생 머리를 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장병들이 미남이라고 생각하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콘드라첸코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부인의 행동에 아무 말도 못하고, 참모들에게 "아내의 행동에 부정이 있다면 제지해달라"고 항상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스테셀의 피아노에 얽힌 이야기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베라 부인이 뤼순 요새에서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피아노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가쿠인대학에 보존되어 있다. 뤼순 함락 당시 스테셀로부터 노기 마레스케에게 증정된 것이 뤼순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가나자와 제9사단에 넘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5. 수상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리본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리본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 성 안나 훈장 리본
    성 안나 훈장 3등급, 2등급, 1등급
  • 성 블라디미르 훈장 리본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 3등급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리본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등급, 2등급, 3등급
  • 욱일장 2등급 리본
    욱일장, 2등급 (일본)
  • 붉은 독수리 훈장 리본
    붉은 독수리 훈장, (프로이센)
  • 푸르 르 메리트 리본
    푸르 르 메리트, (프로이센)
  • 용기 훈장 리본
    용기 훈장 (불가리아)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뉴스 "... the 'hero' of Port Arthur, Gen. Anatoly Stoessel, who had been sentenced to imprisonment for ten years in the Fortress of St. Peter and St. Paul for the surrender of Port Arthur, was pardoned by the Emperor." https://timesmachine[...] New York Times 1909-08-15
[3] 기타
[4] 서적 ソ連から見た日露戦争
[5] 서적 ソ連から見た日露戦争
[6] 서적 坂の上の雲では分からない旅順攻防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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