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나라 전투
1. 개요
알메나라 전투는 1710년 7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카탈루냐에서 벌어졌다. 스페인 군은 프랑스 지원을 받아 카탈루냐로 진격했으나, 구이도 슈타렘베르크가 이끄는 동맹군에 의해 패배했다. 전투 결과, 스페인군은 아라곤으로 퇴각했고, 빌라다리아스는 지휘권을 박탈당했으며, 8월 사라고사 전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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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 스페인 -
사라고사 전투
사라고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연합군이 스페인 부르봉 군에게 승리한 전투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을 열었으나 전략적 영향은 크지 않았고, 연합군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1710년 스페인 -
브리우에가 전투
브리우에가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퇴각하던 동맹군 중 영국군을 기습하여 포위, 항복시킨 전투로, 이후 연합군의 철수와 바르셀로나 공성전으로 이어졌다. -
1710년 분쟁 -
사라고사 전투
사라고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연합군이 스페인 부르봉 군에게 승리한 전투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을 열었으나 전략적 영향은 크지 않았고, 연합군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1710년 분쟁 -
브리우에가 전투
브리우에가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퇴각하던 동맹군 중 영국군을 기습하여 포위, 항복시킨 전투로, 이후 연합군의 철수와 바르셀로나 공성전으로 이어졌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참가한 전투 -
데팅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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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참가한 전투 -
브리우에가 전투
브리우에가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퇴각하던 동맹군 중 영국군을 기습하여 포위, 항복시킨 전투로, 이후 연합군의 철수와 바르셀로나 공성전으로 이어졌다.
2. 배경
1710년 봄, 펠리페 5세가 이끄는 스페인 군은 3월 15일 아라곤 지방에서 세그레 강을 넘어 카탈루냐에 입성했다. 6월에는 카를 대공이 동맹군에 합류했다.
7월, 구이도 슈타렘베르크 장군은 증원군을 받은 후 공격을 결심하고, 노게이라 강을 건너 알메나라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스태너프는 발라게르에서 알파라스 다리를 통해 세그레 강을 7월 27일 성공적으로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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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 스페인 전쟁은 5월 15일, 펠리페 5세와 제2대 비야다리아스 후작 프란시스코 카스티요 파하르도가 이끄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 군대가 발라게르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구이도 폰 슈타렌베르크 장군은 카탈루냐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는데, 영국 파병대 장교들의 활약으로 스페인군의 세그레 강 저지에 성공했다. 6월, 펠리페 5세는 증원군을 받아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으로 다시 발라게르를 공격했다.
7월, 슈타렌베르크는 증원군을 받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Noguera Ribagorçana 강을 건너 Almenar 산 정상에 진을 쳤다. 이어 스탠호프는 Lérida 북쪽 발라게에서 세그레 강을 건너 Alfarràs 다리(Alfarràs)로 진군하여 7월 27일 다리를 건넜다.
3. 전투 과정
1710년 7월, 구이도 슈타렘베르크 장군은 원군을 지원받고 공격을 결심했다. 그는 노게이라 강을 건너 알메나라 고지대에 위치를 잡았다. 스태너프는 발라게르에서 알파라스의 다리를 통해 세그레 강을 7월 27일 도강하는 데 성공한 후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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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다리아스는 기병대에게 공격을 명령하면서 전투를 개시했고, 초반에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초전의 우세는 흩어진 적을 추격하는 데 낭비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영국 보병대는 대열을 2열로 편성하고 적을 추격하던 스페인군 좌익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역시 공격을 감행, 펠리페 5세가 있던 우익을 격멸하여 그의 목숨을 위협하였다. 펠리페 5세는 거의 잡힐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스탠홉과 조지 카펜터가 이끄는 연합군 좌익의 영국, 네덜란드, 독일 기병대는 부르봉 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궤주하게 만들었고, 2열까지 붕괴시켰다. 영국군 사상자에는 제3 드래곤 연대 대령인 로치퍼드 백작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스페인군 전열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전투는 오후 늦게 벌어져 연합군이 승리를 추격하지 못했고, 부르봉군은 흩어진 기병을 수습하여 사라고사 시내에 재집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