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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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진인은 17세기 알바진 전투 이후 청나라로 이주한 러시아 코사크의 후손이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황실 근위대의 별도 부대를 형성하여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만주족, 몽골족, 심지어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들과도 결혼하여 다양한 혈통으로 구성되었다. 알바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며 중국 사회에 동화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약 1,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의화단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일부는 소련으로 이주했지만, 현재도 베이징과 톈진에 공동체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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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진인 | |
---|---|
기본 정보 | |
![]() | |
총 인구 | 약 500명 |
거주 지역 | 중국 |
언어 | |
사용 언어 | 중국어 |
종교 | |
주요 종교 | 중국 정교회 |
민족적 관계 | |
관련 민족 | 러시아인 만주족 한족 |
2. 역사적 배경
알바진인은 17세기 중반 알바진 전투의 결과로 청나라로 이주한 러시아 코사크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1650년대부터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던 알바진 요새를 둘러싼 전투에 참여했다.
1685년 알바진 요새가 함락된 후, 일부 코사크인들은 청나라에 항복했고, 이들은 베이징으로 이송되어 황실 근위대인 '황색 줄무늬 기'(황색양황기)에 편입되었다. 이들의 첫 번째 지도자는 만주족 고용인인 타타르인 아나니 우루슬라노프(울랑게리)였다.[1]
알바진인들은 베이징 북동쪽 구석에 거주하며, 바오이에 소속되어 활 제작 등 비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만주족, 몽골족 여성, 심지어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들과도 결혼하며 점차 중국 사회에 동화되었다.[1][2][3][4][5]
하지만 알바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이들은 버려진 라마교 사원을 성 니콜라스 교회로 개조하고, 알바진에서 가져온 성 니콜라스 성상을 모셨다. 1713년부터 러시아 정교회는 베이징에 선교단을 파견했고, 알바진인들은 중국 정교회의 핵심이 되었다. 1727년 캬흐타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 사절단의 베이징 영구 주둔이 허용되면서, 알바진인들의 신앙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2. 1. 알바진 전투와 이주
알바진인들은 1650년대부터 러시아 코사크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알바진 전투의 결과로 청나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1667년에 포로로 잡힌 33명의 코사크 후손들과 1649년 이전에 베이징에 정착하여 남 로마 가톨릭 대성당의 교인이 된 여러 코사크들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알바진인 이전에 중국에 러시아인들이 있었다는 이 이야기는 사실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1]알바진인들은 '황색 줄무늬 기'로 알려진 황실 근위대의 별도 부대를 형성했다. 그들의 첫 번째 지도자는 만주족 고용인인 타타르인 아나니 우루슬라노프(울랑게리)였다. 야코블레프, 두비닌, 로마노프라는 러시아 성은 중국어로 각각 야오(姚), 두(杜), 루오(羅)로 표기되었다. 청나라는 솔론 과부들이 알바진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다.[1] 그들은 몽골족과 만주족 여성과 결혼했다.[2][3][4] 알바진인과 결혼할 수 있는 여성들은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들이었다.[5] 이들의 사제 막심 레온티예프는 버려진 라마교 사원에서 신성한 예배를 볼 수 있었다. 코사크족이 알바진에서 대피시킨 성 니콜라스의 오래된 성상이 이 성당에 놓였다.
알바진 부대는 만주 황기(鑲黃旗)에 배치되었고 베이징의 "타타르 시" 북동부에 살았다.[6] 알바진인들은 군대가 아닌 바오이 회사로 만들어졌다.[7]
1685년 알바진의 첫 번째 포위 공격 이후, 대부분의 코사크인들은 네르친스크를 통해 러시아 영토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약 45명은 만주족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 다수는 만주 제국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원주민 아내나 첩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이전에 포로로 잡히거나 귀순한 다른 약 70명의 러시아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황색 깃발 기병대의 네 번째 연대 제17중대에 등록되었고, 북동쪽 구석에 있는 베이징의 타타르 시(오로스 관과는 다른 곳)에 공간을 할당받았다. 이곳은 전투 부대가 아닌 '가구' 단위였으며 활 제작과 같은 비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일부는 네르친스크로 가는 사자로 사용되었다.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에 통역가나 정보원으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8]
그들에게는 오래된 불교 사찰이 주어졌고, 이곳은 성 니콜라스 교회로 개조되었다. 사제는 1673년 아무르에서 다른 70명의 남자들과 함께 포로로 잡힌 막심 레오노프였다. 러시아 정부는 성 니콜라스 교회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692년 이데스 사절단 동안 베이징에 정교회 교회를 짓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툴리셴이 1712년 러시아로 갔을 때, 1년 전쯤 막심 신부가 사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제를 요청하는 서신을 가져갔다. 그는 대수도원장과 9명의 부사제(약 50명의 신도를 위해 봉사)와 함께 돌아왔다. 1722년 이즈마일로프 사절단이 왔을 때, 사제 1명과 3명의 부사제만이 생존해 있었다. 캬흐타 조약의 제5조는 교회, 사제 1명, 보조 3명, 현지 언어를 배우는 학생 6명의 영구적인 주둔을 승인했다. 이들 중 알렉세이 레온테프는 1768년 캬흐타 협약 협상에 도움을 주었다.
2. 2. 청나라 팔기군 편입과 역할
알바진인들은 '황색 줄무늬 기'(황색양황기)로 알려진 황실 근위대의 별도 부대를 형성했으며, 만주족 고용인인 타타르인 아나니 우루슬라노프(울랑게리)가 이들을 지휘했다.[1] 이들은 만주 황기(鑲黃旗)에 배치되어 베이징의 "타타르 시" 북동부에 살았다.[6] 알바진인들은 군대가 아닌 바오이 소속이었다.[7]1685년 알바진의 첫 번째 포위 공격 이후, 대부분의 코사크인들은 네르친스크를 통해 러시아 영토로 돌아갔지만, 약 45명은 만주족에게 항복했다. 이들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이전에 포로로 잡히거나 귀순한 다른 약 70명의 러시아인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황색 깃발 기병대의 네 번째 연대 제17중대에 등록되었고, 베이징 타타르 시의 북동쪽 구석( 오로스 관과는 다른 곳)에 거주했다. 이들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활 제작과 같은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가구' 단위였다. 일부는 네르친스크로 가는 사자로 활용되었다.[8]
2. 3. 러시아 정교회 신앙 유지와 중국 사회 동화
알바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며 베이징에 성 니콜라스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1685년 알바진 요새 함락 이후 청나라에 항복한 코사크인들과 그 가족들로, 베이징 북동쪽 구석에 거주하며 황실 근위대의 일원이 되었다.[6] 이들은 만주족, 몽골족 여성, 심지어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들과도 결혼했다.[1][2][3][4][5]알바진인들은 점차 중국 사회에 동화되어 러시아어를 잃고 중국어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러시아 정교회 신앙은 계속 유지했다. 1713년부터 러시아 정교회는 베이징에 정기적으로 선교단을 파견했고, 알바진인들은 중국 정교회의 핵심이 되었다.[8] 19세기 말에는 그 수가 1,000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성장했다.
1727년 캬흐타 조약 제5조는 러시아 정교회 사절단이 베이징에 영구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조항에 따라 교회, 사제 1명, 보조 3명, 현지 언어를 배우는 학생 6명의 주둔이 승인되었다. 알바진인 출신 알렉세이 레온테프는 1768년 캬흐타 협약 협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3. 알바진인의 문화와 사회
알바진인은 솔론족 과부, 몽골족, 만주족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2][3][4]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 출신 여성과도 결혼했다.[5]
이들은 러시아어를 잃었지만,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며 중국 정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1713년부터 러시아 정교회는 베이징에 선교단을 파견했다.[6] 1831년 이아킨프 비추린은 베이징에 알바진인이 94명 있다고 보고했고, 19세기 말에는 그 수가 1,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중국의 모든 기독교인과 유럽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1900년 6월 11일, 미트로판 신부를 포함한 222명의 중국 정교회 신자들이 순교했고, 이들은 나중에 거룩한 순교자로 선포되었다.[6] 1956년, 베이징에 있던 중국 정교회 순교자들의 매장지와 예배당은 소련 대사의 요청으로 파괴되었다.[6]
3. 1. 혼인과 가족 구성
알바진인들은 솔론족 과부들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 이들은 몽골족, 만주족 여성과도 결혼했다.[2][3][4] 베이징 감옥의 범죄자 출신 여성들도 알바진인과 결혼했다.[5]3. 2. 종교적 정체성
알바진인들은 러시아어를 잃었지만,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며 중국 정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1713년부터 러시아 정교회는 베이징에 선교단을 파견했다.[6] 1831년 이아킨프 비추린은 베이징에 알바진인이 94명 있다고 보고했고, 19세기 말에는 그 수가 1,000명으로 추산되었다.의화단 운동 당시 중국의 모든 기독교인과 유럽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1900년 6월 11일, 미트로판 신부를 포함한 222명의 중국 정교회 신자들이 순교했고, 이들은 나중에 거룩한 순교자로 선포되었다.[6] 1956년, 베이징에 있던 중국 정교회 순교자들의 매장지와 예배당은 소련 대사의 요청으로 파괴되었다.[6]
4. 현대의 알바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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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Widmer 1976
https://books.google[...]
[2]
서적
Aldrich 2008
https://books.google[...]
[3]
서적
Baddeley 1919
https://books.google[...]
[4]
서적
Standaert 2001
https://books.google[...]
[5]
서적
Widmer 1976
https://books.google[...]
[6]
서적
Widmer 1976
https://books.google[...]
[7]
서적
Widmer 1976
https://books.google[...]
[8]
서적
Eastern Destiny:Russia in Asia and the North Pacific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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