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세미닉
1. 개요
앤디 세미닉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포수였으며, 1941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며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5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으며, 1957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 전까지 신시내티 레즈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코치, 마이너 리그 감독,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마이크 슈미트 등 많은 선수를 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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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포수 |
|---|---|
| 타석 | 우타 |
| 투구 | 우투 |
| 출생일 | 1920년 9월 12일 |
| 출생지 |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피어스 |
| 사망일 | 2004년 2월 22일 |
| 사망지 | 미국 플로리다주 팜베이 |
| 데뷔 리그 | MLB |
|---|---|
| 데뷔 | 1943년 9월 14일 |
| 데뷔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 마지막 리그 | MLB |
| 마지막 경기 | 1957년 9월 21일 |
| 마지막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 소속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1943–1951) 신시내티 레즈 / 레드레그스 (1952–1955) 필라델피아 필리스 (1955–1957) |
| 타율 | .243 |
|---|---|
| 홈런 | 164 |
| 타점 | 556 |
| 주요 수상 | 올스타 (1949) |
|---|
-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신 야구 선수 -
더스틴 니퍼트
더스틴 니퍼트는 메이저 리그에서 6시즌을 뛴 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와 KT 위즈에서 8시즌 동안 활동하며 외국인 선수 최다승 기록을 세우고 MVP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미국의 우완 투수이다. -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신 야구 선수 -
조지 브렛
조지 브렛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21시즌 동안 활약하며 세 차례 타격왕, 아메리칸 리그 MVP, 13번의 올스타 선정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미국의 은퇴한 프로 야구 선수이다. -
신시내티 레드레그스 선수 -
맷 배츠
맷 배츠는 1947년부터 1956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포수로 활동하며 보스턴 레드삭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등 여러 팀을 거쳤고, 은퇴 후에는 청소년 야구 지도와 범죄 예방 활동에 기여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
신시내티 레드레그스 선수 -
클로드 오스틴
클로드 오스틴은 1957년부터 1975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한 투수였으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세 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은퇴 후 코치로 활동했다. -
20세기 미국 사람 -
앤드루 쿠오모
앤드루 쿠오모는 뉴욕 주지사를 역임한 미국 민주당 정치인으로, 코로나19 팬데믹 대응과 요양원 사망자 은폐 의혹 및 성추행 혐의로 논란이 되었다. -
20세기 미국 사람 -
지미 카터
지미 카터는 해군 장교와 땅콩 농장 운영을 거쳐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도덕적, 진보적 이미지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퇴임 후 카터 센터 설립과 인도주의 활동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2. 선수 경력
세미닉은 1943년 9월 14일 23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45년까지 필리스는 세미닉을 베테랑 포수 거스 만쿠소와 함께 플래툰 시스템으로 활용했다. 그는 파워 히팅은 가능했지만, 수비 실력은 평균 이하여서 1946년, 1948년과 1949년에 내셔널 리그에서 실책으로 1위를 기록했다. 필리스 감독 에디 소이어는 그를 지도하기 위해 필리스 코치이자 전 포수였던 사이 페킨스를 영입했고, 이는 그의 수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타자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1949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 선발 포수로 야구 팬들의 투표를 받았다.
1949년 6월 2일, 필리스는 신베 공원에서 신시내티를 상대로 12–3으로 승리하면서 8회 이닝 동안 5개의 홈런을 쳐 1939년 뉴욕 자이언츠가 세운 메이저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이 이닝에서 세미닉은 2개의 홈런을 쳤고, 델 에니스, 윌리 존스, 스쿨보이 로가 각각 1개씩 쳤다. 존스는 3루타를 추가했고, 그레니 햄너의 2루타로 장타가 18개로 늘어나 여전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미닉은 총 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51년 세미닉은 맥스 레이니어의 빠른 공에 빈볼을 맞아 경기 능력이 저하되었다. 그는 포수 스모키 버지스와 트레이드되어 1952년부터 1955년 초반까지 뛰었다. 1955년에는 다시 버지스와 트레이드되어 필리스로 복귀하여 0.994의 수비율로 내셔널 리그 포수를 이끌었다. 그는 1957년 시즌을 마치고 36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 전 2년을 더 뛰었다.
2.1. 초기 생애 및 마이너 리그
세미닉은 렘코 이민 부모 사이에서 웨스트버지니아주 피어스에서 태어났지만, 앤디가 두 살 때 펜실베이니아주 뮤즈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노비 손츠현의 제기에스투프 출신 러스인이었다. 그는 1941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세미닉은 1942년 15개의 홈런과 202개의 총 루타로 애팔래치안 리그를 이끌었고, 타율에서도 리그 선두를 달렸다. 1943년에는 클래스 A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녹스빌 스모키스에서 .303의 타율을 기록했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의해 영입되었다.
2.2. 메이저 리그
세미닉은 1941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1942년 15개의 홈런과 202개의 총 루타로 애팔래치안 리그를 이끌었고, 타율에서도 리그 선두를 달렸다. 1943년에는 클래스 A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녹스빌 스모키스에서 .303의 타율을 기록했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의해 영입되었다.
1943년 9월 14일, 23세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1945년까지 필리스는 세미닉을 베테랑 포수 거스 만쿠소와 함께 플래툰 시스템으로 활용했다. 그는 파워 히팅은 가능했지만, 수비 실력은 평균 이하였고, 1946년, 1948년, 1949년에 내셔널 리그에서 실책으로 1위를 기록했다. 필리스 감독 에디 소이어는 그를 지도하기 위해 필리스 코치이자 전 포수였던 사이 페킨스를 지정했고, 이는 그의 수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타자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1949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 선발 포수로 야구 팬들의 투표를 받았다.
2.2.1. 1950년: 위즈 키즈
세미닉은 수비 및 투구 능력이 향상되면서 1950년 "위즈 키즈" 챔피언십 시즌 동안 중요한 리더십 역할을 했다. 당시 29세로 팀의 베테랑 중 한 명이었고 어린 필리스 투수진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야구 기자들은 세미닉에게 "할아버지 위즈"라는 별명을 붙였다.
1950년 8월 12일,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세미닉은 에디 스탠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반복적으로 팔을 흔들자 짜증을 냈다. 스탠키는 결국 퇴장당했지만, 세미닉은 두 번째 베이스에서 스탠키의 대체 선수인 빌 리그니에게 좌절감을 풀었다. 4회에 실책으로 출루한 후, 두 번째 베이스로 거칠게 슬라이딩하여 리그니와 충돌하여 그를 넘어뜨렸다. 경찰의 개입이 필요한 거의 10분간의 난투극이 양 팀 사이에 벌어졌고, 그 결과 세미닉과 리그니는 경기에서 퇴장당했다. 필리스는 4–3으로 승리했다.
세미닉은 1950년에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88의 타율, 24개의 홈런, 68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말에 발목을 다쳤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필리스가 뉴욕 양키스에게 패할 때까지 부상을 입은 채 경기를 계속했다. 미래의 명예의 전당 투수 로빈 로버츠는 "그 해 우리 라커룸에서 리더를 뽑아야 한다면 앤디를 뽑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열심히 경기를 했고, 그 해가 단연 최고의 해였다."라고 세미닉에 대해 말했다.
2.2.2. 부상과 트레이드
1949년 6월 2일, 필리스는 신베 공원에서 신시내티를 상대로 12–3으로 승리하면서 8회 이닝 동안 5개의 홈런을 쳐 1939년 뉴욕 자이언츠가 세운 메이저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이 이닝에서 세미닉은 2개의 홈런을 쳤고, 델 에니스, 윌리 존스, 스쿨보이 로가 각각 1개씩 쳤다. 존스는 3루타를 추가했고, 그레니 햄너의 2루타로 장타가 18개로 늘어나 여전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미닉은 총 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세미닉은 수비 및 투구 능력이 향상되면서 1950년 "위즈 키즈" 챔피언십 시즌 동안 중요한 리더십 역할을 했다. 당시 29세로 팀의 베테랑 중 한 명이었고 어린 필리스 투수진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야구 기자들은 세미닉에게 "할아버지 위즈"라는 별명을 붙였다.
1950년 8월 12일,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세미닉은 에디 스탠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반복적으로 팔을 흔들자 짜증을 냈다. 스탠키는 결국 퇴장당했지만, 세미닉은 두 번째 베이스에서 스탠키의 대체 선수인 빌 리그니에게 좌절감을 풀었다. 4회에 실책으로 출루한 후, 두 번째 베이스로 거칠게 슬라이딩하여 리그니와 충돌하여 그를 넘어뜨렸다. 경찰의 개입이 필요한 거의 10분간의 난투극이 양 팀 사이에 벌어졌고, 그 결과 세미닉과 리그니는 경기에서 퇴장당했다. 필리스는 4–3으로 승리했다.
세미닉은 1950년에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88의 타율에 24개의 홈런과 68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말에 발목을 다쳤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필리스가 뉴욕 양키스에게 패할 때까지 부상을 입은 채 경기를 계속했다. 미래의 명예의 전당 투수 로빈 로버츠는 세미닉에 대해 "그 해 우리 라커룸에서 리더를 뽑아야 한다면 앤디를 뽑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열심히 경기를 했고, 그 해가 단연 최고의 해였다."라고 말했다.
1951년 세미닉은 맥스 레이니어의 빠른 공에 빈볼을 맞아 경기 능력이 저하되었다. 그는 포수 스모키 버지스와 트레이드되어 1952년부터 1955년 초반까지 뛰었다. 1955년에는 다시 버지스와 트레이드되어 필리스로 복귀하여 0.994의 수비율로 내셔널 리그 포수를 이끌었다. 1957년 시즌을 마치고 36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 전 2년을 더 뛰었다.
2.3. 선수 시절 통산 기록
앤디 세미닉은 15년간 메이저 리그 경력을 가졌으며, 1,304 경기에 출전하여 3,921 타수에서 총 953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타율은 .243이며, 164개의 홈런과 556 타점을 올렸다. 세미닉은 자신을 상대로 도루를 시도한 주자들의 44.6%를 견제사시켰는데, 이는 역대 16위에 해당한다. 그는 내셔널 리그 포수들 중 도루 저지에서 2번, 아웃 처리, 보살 및 수비율에서 각각 한 번씩 1위를 기록했다. 은퇴 당시 포수 홈런 부문 역대 7위에 랭크되었다.
3. 선수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세미닉은 남은 생애 동안 필라델피아 구단에서 일했다. 그는 필리스의 코치(1957–58, 1967–69)였고 11개의 마이너 리그 제휴팀의 감독(1959–66, 1970–73)이었다. 그 후, 그는 필리스의 스카우트이자 순회 마이너 리그 코치로 활동했다(1974년–1980년대 중반). 특히, 그가 감독하거나 코치했던 선수 중 90명이 결국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는데, 여기에는 마이크 슈미트, 퍼거슨 젠킨스, 그렉 루진스키, 밥 분이 포함된다. 세미닉은 밥 분을 3루수에서 야구 최고의 수비형 포수 중 한 명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에 세미닉은 스프링 트레이닝과 플로리다 인스트럭셔널 리그에서 필라델피아의 포수 코치로 활동했다.
앤디 세미닉은 팜 베이, 플로리다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