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에 키쿠고로 (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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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노에 키쿠고로 (5대)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로, 1868년 5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습명했다. 시대극, 세와모노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며 가부키 배우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마지막 무대는 1902년 가부키자에서 열렸으며, 1903년 사망하며 메이지 가부키의 황금기를 마감했다. 3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연기와 4대 이치카와 코단지의 방식을 절충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으며, 가와타케 모쿠아미의 세와모노를 특기로 했다. 끊임없는 연구와 창의적인 연기로 가부키 발전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많은 배우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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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에 키쿠고로 (5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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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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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데라지마 기요시 |
다른 이름 | (기쿠야) 2대 이치무라 구로에몬 13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8대 이치무라 가키츠 (오토와야) 5대 오노에 기쿠고로 |
직업 | 가부키 배우 |
활동 기간 | 1848년–1902년 |
가계 | |
아버지 | 5대 이치무라 다케노조 |
친척 | 3대 오노에 기쿠고로 (할아버지) 11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할아버지) 1대 반도 가키츠 (형) 6대 오노에 기쿠고로 (장남) 6대 반도 히코사부로 (막내 아들) 17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손자) 2대 오노에 구로에몬 (손자) 18대 나카무라 간자부로 (증손자) 반도 라쿠젠 (증손자) 2대 이치무라 만지로 (증손자) 4대 가와라사키 곤주로 (증손자) 6대 나카무라 간쿠로 (고손자)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고손자) 9대 반도 히코사부로 (고손자) 3대 반도 가메조 (고손자) 2대 오노에 우콘 (고손자) 6대 이치무라 다케마츠 (고손자) 이치무라 히카루 (고손자) 3대 나카무라 간타로 (현손자) 2대 나카무라 초자부로 (현손자) 6대 반도 가메사부로 (현손자)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844년 6월 4일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일 | 1903년 2월 18일 |
예명 | |
예명 | 2대 이치무라 구로에몬 13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8대 이치무라 가키츠 5대 오노에 기쿠고로 |
아호 | 바이코 (梅幸) |
별칭 | 초대 오노에 구로에몬 |
기타 | |
가문 이름 | 오토와야 |
가문의 상징 | 겹쳐진 부채에 안긴 떡갈나무 [[파일:Kasane Ōgi ni Daki Gashiwa inverted 3.png|50px]] |
주요 배역 | |
주요 배역 | '아오토조시 하나노 니시키에'의 벤텐 고조 기쿠노스케 '요시츠네 센본자쿠라'의 기쓰네 다다노부 '츠유 코소데 무카시 하치조'의 가미유이 신자 '시마치도리 쓰키노 시라나미'의 아카시노 시마쿠라 그 외 다수 |
2. 약력
벤텐코조 키쿠노스케, 3대 우타가와 도요쿠니 그림, 분큐 2년]]
1863년, 동생에게 이치무라좌를 물려주고 8대 이치무라 가키치를 습명했다. 1868년, 이치무라좌에서 5대 오노에 키쿠고로를 습명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 1. 5대 오노에 키쿠고로 계승 이후
5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시대물, 일상물, 소작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며 9대 이치카와 단주로, 초대 이치카와 사단지와 함께 '단키쿠사(團菊左)'로 불리며 메이지 극단의 정점에 올랐다.[3] 1887년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저택에서 9대 이치카와 단주로, 초대 이치카와 사단지와 함께 메이지 천황 앞에서 어람극(御覧劇)을 선보였다.[3] 이는 천황이 처음으로 가부키 공연을 관람한 사례로, 가부키 배우의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3]1899년 11월에는 9대 단주로와 함께 연극 모미지가리의 세 장면을 촬영했는데, 키쿠고로는 악마 공주 모미지 역을 연기했다. 이 장면들은 일본의 선구적인 영화 제작자인 시바타 츠네키치가 촬영했으며, 3분 50초 길이의 이 영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서사 영화이다.[4]
그는 자신의 직업에 매우 헌신적이어서, 1868년 우에노 전투 전장을 직접 방문하여 전쟁의 모습과 병사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무대에서 더 잘 묘사하고자 했다.[5]
키쿠고로는 가부키자 극장이 개장한 1889년부터 수많은 공연을 했다. 1902년 11월, 가부키자에서 "추신 카나가키 코샤쿠"라는 연극에서 벤텐 코조, 시즈에, 키나이 역을 연기하며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그는 몇 달 후인 1903년 2월 18일, 58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메이지 가부키 황금시대의 막을 내렸다.
3. 가계 및 계보
寺島 清일본어는 12대 이치무라 우자에몬을 아버지로, 3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차녀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반도 카키츠 1세였다.
5대 키쿠고로는 6대 오노에 키쿠고로, 6대 반도 히코사부로를 친아들로 두었고, 2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6대 오노에 바이코를 양자로 삼았다.
그의 증손자이자 현재 주요 배우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칸자부로 18세, 그리고 칸자부로의 아들들(키쿠고로의 증손자들)인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2세와 나카무라 칸타로 2세를 포함하여 오늘날 많은 배우들이 키쿠고로 5세의 후손이다.
4. 예술 세계
머리 묶는 신자]]
4. 1. 창의적인 연기
5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배역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배우였다. 가가가라스의 도겐 의상을 위해 직접 헌 옷 가게를 찾거나, 인정바나시 분칠원결에서는 미장 기술을 배우는 등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5] 1891년(메이지 24년) 1월 가부키좌의 풍선승평판고각에서는 풍선 조종사 스펜서를 연기하기 위해 게이오기주쿠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5]5. 일화
5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배역을 위해 영어를 배우는 등 연구심이 왕성했다.[5]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 뺨을 가리는 상태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는 것을 반복하거나, 부부싸움 중에도 아내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성미가 급했지만 솔직하고 상냥한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9대 이치카와 단주로가 근엄하고 성실하며 강한 구심력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만년에는 재치있는 애드리브(간지럼)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지만, 때로는 지나쳐서 불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1902년 마지막 공연에서는 일본 최초의 저작권 침범 재판인 '벤텐코조 사건'을 자신의 대사에 넣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등 해학적인 면모를 보였다.[6]
6. 평가 및 영향
5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로서, 가부키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벤텐코조 키쿠노스케 역은 그의 대표작으로, 분큐 2년 (1862년) 이치무라좌에서 초연된 『아오토조우시 하나노 니시키에(백량5인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역은 카와타케 신시치가 5대 키쿠고로의 외모와 몸짓을 고려하여 쓴 역할이었기에, 5대 키쿠고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6]
5대 키쿠고로는 벤텐코조가 이마에 상처를 입는 장면에서 립스틱을 활용한 연출을 선보여 3대 세키 산쥬로를 감탄하게 했다. 그는 립스틱을 재빨리 종이로 닦아내고 그 종이로 이마를 눌러 피가 묻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입술의 립스틱은 지워져 남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냈다.
그는 시대물, 세와모노, 소사고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으며, 1887년 (메이지 20년)에는 이노우에 카오루 저택에서 9대 이치카와 단쥬로, 초대 이치카와 사단지와 함께 메이지 천황 앞에서 공연을 펼쳐 가부키 배우의 지위 향상에 힘썼다.
마지막 무대는 1902년 (메이지 35년) 11월 가부키자에서 공연된 『츄신가키코우샤쿠』의 키나이 역과 『아오토조우시 하나노 니시키에』의 벤텐코조 역이었다. 비록 몸이 불편하여 여러 제약이 있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해학 정신을 잃지 않고 당시 화제가 되었던 저작권 침해 재판을 빗댄 애드리브를 넣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6]
5대 키쿠고로의 창의적인 연기 방식과 끊임없는 연구 자세는 후대 배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대표작인 벤텐코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 9대 이치카와 단쥬로, 초대 이치카와 사단지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단키쿠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가부키의 황금 시대도 저물었다.
7. 주요 작품
- 아오토조우시 하나노 니시키에 (벤텐코조 키쿠노스케)[3]
- 쓰치구모
- 이바라키
- 모미지가리 (악마 공주 모미지) - 1899년 11월, 시바타 츠네키치 촬영,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서사 영화.[4]
- 추신 카나가키 코샤쿠 (벤텐 코조, 시즈에, 키나이) - 1902년 11월 가부키자 극장 고별 공연
- 고산넨 오슈 군키 - 1879년 7월 16일 신토미자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을 위한 특별 공연.[3]
참조
[1]
웹사이트
Onoe family
http://www2.ntj.jac.[...]
Japan Arts Council
2009-05-30
[2]
서적
A Guide to the Japanese Stage
Kodansha
2004
[3]
서적
Traditional Japanese Theater: An Anthology of Play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4]
웹사이트
Film History Essentials: Momijigari (1899)
https://moviegoings.[...]
2024-09-10
[5]
서적
Danjūrō no kabuki annai
PHP Shinsho
2008
[6]
서적
五代目尾上菊五郎 尾上菊五郎自伝
日本図書センター
1997-12
[7]
서적
芸界通信 無線電話
青蛙房
1975-10
[8]
서적
六代目尾上菊五郎
演劇出版社
19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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