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스케토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타 스케토모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로주였다. 그는 오미 미야가와 번주 호리타 마사토키의 아들로 태어나, 오타 스케노부의 양자가 되어 가케가와 번주를 이었다. 지샤 부교,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고, 1837년 로주가 되었으나 덴포 개혁으로 인해 미즈노 타다쿠니와 갈등을 겪고 물러났다. 이후 1858년 다시 로주로 복귀했으나, 존왕양이 지사 탄압 문제로 파면되었고, 1863년 세 번째 로주를 지냈다. 그는 1867년에 사망했으며, 덴포 시대의 학자 마쓰자키 겐도가 "나를 노하게 하는 자는 충신이다"라고 말하며 간언을 장려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타씨 - 오타 스케무네
오타 스케무네는 에도 시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다이묘가 된 인물로, 쇼군 측근인 육인중으로 활동하고 막부의 중요 사업에 참여하였다. - 오타씨 - 다나구라번
다나구라번은 에도 시대 무쓰국 다나구라정에 위치했으며, 센고쿠 시대 다테 씨와 사타케 씨의 세력 다툼 지역이었고, 에도 시대 초기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세웠으나 여러 번주 교체와 후다이 다이묘들의 전봉이 잦았으며,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폐번치현되었다. - 가케가와번주 - 마쓰다이라 다다토모 (1634년)
마쓰다이라 다다토모는 에도 시대 이이야마 번을 다스린 다이묘로, 치수 사업, 관개 시설 정비, 신전 개발 등을 통해 번의 기반을 다지고 노다 기자에몬을 등용하여 번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오사카 가반 등 요직을 역임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 가케가와번주 - 아오야마 요시나리
아오야마 요시나리는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고 쇼인반두, 고쇼 등의 직책을 거쳐 가케가와 번과 아마가사키 번의 번주를 역임하며 번정의 기초를 다진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였다. - 홋타씨 - 홋타 마사모리
홋타 마사모리는 하급 무사 출신으로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츠보네와의 인척 관계를 통해 로쥬까지 오른 다이묘로, 이에미쓰 사망 후 순사하여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출신 배경에 대한 논쟁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 홋타씨 - 홋타 마사토시
홋타 마사토시는 에도 시대 다이묘이자 막부 로주, 다이로를 지낸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미쓰부터 쓰나요시 시대까지 막부의 중진으로 활약하며 '덴나의 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나바 마사야스에게 암살당했다.
오타 스케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오타 스케모토 |
한자 표기 | 太田 資始 |
출생 | 간세이(寛政) 11년 7월 28일 (1799년 8월 28일) |
사망 | 게이오(慶応) 3년 5월 18일 (1867년 6월 20일) |
사망 장소 | 에도(江戸), 일본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도모사부로(友三郎) 조사부로(丈三郎) (유명) 마사히로(正寛) (초명) 도슌(道醇) (호) |
별명 | 다몬(多門) |
직업 | 다이묘(大名) 로주(老中) |
관직 | |
관위 | 종오위(従五位) 하 셋쓰노카미(摂津守) 종사위(従四位) 하 지주(侍従) 빈고노카미(備後守) 빗추노카미(備中国) |
막부 | 지샤부교(寺社奉行) 오사카조다이(大坂城代)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로주(老中)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 → 도쿠가와 이에요시(家慶) |
번 | 도토미국(遠江国) 가케가와 번(掛川藩) 번주 |
가문 | |
씨족 | 홋타 씨(堀田氏) → 오타 씨(太田氏)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홋타 마사카즈(堀田正穀) 양아버지: 오타 스케토모(太田資言) |
형제자매 | 홋타 마사타미(堀田正民) 아사노 미치히로(浅野道博) 스케모토(資始) 혼다 스케노부(本多助信) 정실 소네(曽根) 모실 진보(神保) 모실 사카이(酒井) 모실 다카기(高木) 모실 오오카(大岡) 모실 |
배우자 | 정실: 오타 스케토모(太田資言)의 딸 계실: 요시(良) (우에스기 나리아키(上杉斉定)의 여섯째 딸?) |
자녀 | 스케요시(資功) 아키모토 아야토모(秋元礼朝) 나이토 마사타카(内藤政挙) 스케미(資美) 다카라(宝) 가즈(籌) 소마 미쓰타네(相馬充胤) 계계실 단시(短子) 마쓰다이라 다다시게(松平忠誠) 정실 |
2. 생애
오타 스케토모는 오미-미야가와 번의 홋타 마사자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10년 오타 스케토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다이묘가 되었고, 스케토키의 딸과 결혼했다. 1812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정식으로 알현했고, 1818년에는 소샤반에 임명되었다.[1]
1822년 지샤-부교에 임명되었고, 1828년에는 오사카 조다이를 거쳐 1831년부터 1834년까지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다.[1] 1837년에는 로주가 되었으나, 덴포 개혁 중 아게치 레이 문제로 미즈노 다다쿠니와 갈등을 빚었다. 미즈노 실각 후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이익을 증진시켰지만, 나리아키에 의해 1841년 로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강제 퇴임 후 가케가와 번을 장남 오타 스케카쓰에게 물려주었으나, 도쿠가와 이에나리 사후 1858년에 다시 로주로 복귀하여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마나베 아키카쓰와 함께 일했다.[3] 1863년에도 잠시 로주직을 수행했다.
이후 요네자와 번의 우에스기 나리사다의 딸과 재혼했다. 1867년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 있는 묘호케이지에 있다.
2. 1. 초기 생애
오타 스케토모는 오미-미야가와 번의 홋타 마사자네의 셋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마사히로였다. 1810년 오타 스케토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지명되었으며, 스케토키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1812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받았으며, 1818년에는 소샤반에 임명되었다. 분카 10년 12월 16일(1814년 2월 5일)에는 종5위하・빗추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분세이 원년(1818년) 10월 24일, 주자반에 취임한다.2. 2. 관직 진출
오타 스케토모는 오미-미야가와 번의 홋타 마사자네의 셋째 아들이었다. 1810년 오타 스케토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지명되었으며, 스케토키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1812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받았으며, 1818년에는 소샤반에 임명되었다.[1]1822년 7월 17일 지샤-부교에 임명되었고, 1828년 11월 22일에는 오사카 조다이에 임명되었으며, 1831년 7월 4일부터 1834년 5월 19일까지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다.[1]
1837년 5월 6일, 그는 로주가 되었고, 이 직위에서 그는 인기가 없었던 덴포 개혁의 조항, 특히 에도와 오사카 인근의 다이묘들이 다른 지역의 동일한 양의 토지를 위해 그들의 영지를 넘겨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한 도쿠가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아게치 레이 문제로 선임 로주 미즈노 타다쿠니와 자주 충돌했다. 미즈노가 퇴출된 후, 스케토모는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그러나 나리아키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스케토모를 교체하는 것이었고, 1841년 7월 20일에 은퇴를 요청받았다.[2]
강제 퇴임 후, 스케토모는 가케가와 번을 장남 오타 스케카쓰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에나리의 사망 후, 그는 1858년 6월 23일부터 1859년 7월 23일까지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및 마나베 아키카쓰와 함께 다시 로주로 복귀하여 봉사했다.[3] 그는 1863년 4월 27일부터 5월 14일까지 짧게 세 번째 임기를 가졌다.
분카 7년(1810년) 8월 11일, 오타 스케노부의 말기 양자(사위)가 되어 도토미 가케가와 번주를 이었다. 분카 9년(1812년) 9월 15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했다. 분카 10년 12월 16일(1814년 2월 5일), 종5위하・빗추노카미에 서임된다. 분세이 원년(1818년) 10월 24일, 주자반에 취임한다.
2. 3. 미즈노 다다쿠니와의 갈등
오타 스케토모는 덴포 개혁의 조항, 특히 아게치 레이 문제로 선임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와 자주 충돌했다. 아게치 레이는 에도와 오사카 인근의 다이묘들이 다른 지역의 동일한 양의 토지를 위해 그들의 영지를 넘겨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한 도쿠가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2] 스케토모는 미즈노 다다쿠니의 정책에 매번 반대했으며, 미즈노 다다쿠니를 막부에서 쫓아내려 히타치 국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 출부를 요청하여,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뒤에서 조종하여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포 개혁을 무너뜨리려 획책했다.그러나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출부를 거부하고, 이 움직임이 미즈노 다다쿠니에게 알려지면서, 오히려 스케토모가 1841년 7월 20일에 로주에서 파면되어 은퇴하게 되었다.[2]
2. 4. 로주 재임과 사망
오타 스케토모는 1837년 5월 6일 로주가 되었으나, 덴포 개혁의 일환이었던 아게치 레이 문제로 선임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와 자주 충돌했다. 아게치 레이는 에도와 오사카 인근 다이묘들의 영지를 다른 지역의 동일한 양의 토지와 교환하게 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한 도쿠가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2] 미즈노가 실각한 후, 스케토모는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이익을 증진시켰으나, 나리아키는 스케토모를 교체하였고, 결국 스케토모는 1841년 7월 20일에 은퇴를 요청받았다.[2]강제 퇴임 후, 스케토모는 가케가와 번을 장남 오타 스케카쓰에게 넘겼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사망 후, 1858년 6월 23일부터 1859년 7월 23일까지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마나베 아키카쓰와 함께 다시 로주로 복귀하여 봉사했다.[3] 이때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호타 마사요시, 마쓰다이라 다다카타를 파면하고, 스케토모, 마나베 아키카쓰, 마쓰다이라 노리사토 등 노중 경험자 3명을 노중으로 기용했는데, 이미 가독을 물려준 은거자를 노중으로 기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은거했기 때문에 역료 3만 표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스케토모와 나오스케는 존왕토막 지사 등의 탄압을 놓고 의견이 대립했고, 1859년에 스케토모는 다시 노중에서 파면되었다.
1863년 4월 27일부터 5월 14일까지 짧게 세 번째 로주 임기를 가졌다. 막부는 노련한 스케토모를 계속 노중에 앉히려 했지만,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은 채 1867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3. 인물됨
마쓰자키 겐도는 스케토모가 직언하는 선비를 좋아하여 "나를 노하게 하는 자는 충신이다"라며 신하의 간언을 장려했다고 말하고 있다.[1] 스케토모가 아끼던 말이 죽어 심하게 슬퍼하자 신하들이 걱정하여 여러 방법으로 위로하려고 했다.[2] 스케토모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신하들을 모아 "지금까지 소중한 가신들이 많이 죽었는데 슬퍼한 적이 없는데, 말 따위에 슬퍼하는 것은 사물의 경중을 그르치는 것이며, 군주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두 번 다시 죽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2] 야마다 산센의 『상고록』에서는 위의 두 가지 일화에 "가케가와 공, 군주로서의 그릇이 있다"라는 표제를 붙여 수록하고 있다.[3]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오사카 마치 부교소의 요리키였는데, 스케토모가 오사카 성대였을 때 면식이 있었다.[4] 이후 스케토모가 교토 쇼시다이로 재임 중이던 1833년(덴포 4년)에 저서 『세신도 착기』를 바쳤다.[4] 청렴하고 고집스러운 오시오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4년 후인 1837년(덴포 8년)에 오사카 히가시마치 부교인 아토베 요시스케와의 갈등으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을 일으켰다.[4]
오시오는 난 직전에 로주 등 막부 각료들의 뇌물 수수 및 부정 행위 등을 규탄하는 건의서를 하야시 뎃사이에게 급사 편으로 에도에 보냈다.[5] 로주 및 니시노마루 로주 6명 중에서 오시오에게 규탄받지 않은 사람은 스케토모와 와키사카 야스토 두 사람뿐이다.[5] 야스토는 지샤 부교에서 니시노마루 로주격이 되었기 때문에 오사카에 부임한 적이 없어 오시오와 접점이 없었다.[5] 규탄받은 4명은 스케토모와 마찬가지로 오사카 성대를 역임했다.[5]
4. 연보
- 1799년(간세이 11년): 출생
- 1810년: 오타 스케토키의 급사로 가독 상속 및 스케토키의 딸과 결혼.
- 1812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정식으로 알현.
- 1818년: 소샤반 임명.
- 1822년 (분세이 5년): 지샤-부교(사찰 봉행) 임명 (7월 17일).[1]
- 1828년 (분세이 11년): 오사카 조다이(오사카 성대) 임명 (11월 22일).[1]
- 1831년 (덴포 2년): 교토 쇼시다이 역임 (7월 4일 ~ 1834년 5월 19일).[1]
- 1834년 (덴포 5년): 니시노마루 로주
- 1837년 (덴포 8년): 혼마루 로주 (4월 2일).[2]
- 1841년 (덴포 12년): 로주 면직, 은거 (6월 3일).[2]
- 1858년 (안세이 5년): 로주 재임 (6월 23일) ~ 1859년 7월 23일까지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마나베 아키카쓰와 함께 봉사.[3]
- 1859년 (안세이 6년): 로주 면직 (7월 23일).[3]
- 1863년 (분큐 3년): 로주 3번째 취임 (4월 27일), 1개월 만에 사임 (5월 14일).
- 1867년 (게이오 3년): 사망 (6월 20일). 향년 68세. 묘는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 있는 묘호케이지에 있다.
5. 가계
홋타 마사자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10년 오타 스케토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지명되었으며, 스케토키의 딸과 결혼했다.[1] 이후 요네자와 번의 우에스기 나리사다의 딸과 재혼했다.
부모 |
---|
정실, 계실 |
자녀 |
6.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University of Tüebingen
2008-04-11
[2]
서적
The Emergence of Meiji Japan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GeoRulersAtlas web site, rōjū
http://www.atlasword[...]
[4]
문서
秋元志朝の養子
[5]
문서
一説では側室の子
[6]
문서
内藤政義の養子
[7]
문서
一説では太田資功の四男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