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모토 세이초는 1909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서 태어난 일본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마쓰모토 기요하루이며, 필명인 세이초는 이름의 한자를 음독한 것이다. 아사히 신문에서 근무하며 광고 디자인을 담당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1950년 단편 소설 "사이고의 돈"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1957년 "텐토센"과 "메노카베"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회파 추리소설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추리소설 외에도 역사 소설, 논픽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일본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1992년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쓰모토 세이초 - 기타큐슈 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기타큐슈 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은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생애, 업적을 소개하고 자택 서재 등을 재현하며 연구 센터 역할도 수행하는 기념관이다. -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자 - 노사카 아키유키
노사카 아키유키는 1930년에 태어나 소설 《반딧불의 묘》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작사가, 평론가,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작가이다. -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자 -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로, 엔지니어 생활과 병행하여 소설을 쓰다 1985년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후 작가로 데뷔, '비밀',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통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인기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다양한 장르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는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데뷔하여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영화감독, 언론인 등으로 활동하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일본의 작가이다. -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 오가와 요코
오가와 요코는 1988년 등단하여 아쿠타가와 상, 요미우리 문학상 등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에세이 작가, 번역가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쓰모토 세이초 |
본명 | 마쓰모토 기요하루 |
출생일 | 1909년 12월 21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교바시 정 후쿠오카현 기쿠군 이타비쓰 촌 (현재의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 |
사망일 | 1992년 8월 4일 |
사망 장소 | 도쿄도 신주쿠구 가와다 정 (도쿄 여자 의과대학교 병원) |
안장 장소 | 후지미다이 영원 |
국적 | 일본 |
직업 | 작가, 언론인 |
활동 기간 | 1950년 - 1992년 |
언어 | 일본어 |
학력 | 이타비쓰 심상고등소학교 |
웹사이트 | 기타큐슈 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 |
작품 정보 | |
장르 | 현대 소설 추리 소설 역사 소설 시대 소설 근현대사 고대사 논픽션 |
주요 작품 | 소설 어떤 "고쿠라 일기" 전(1952년) 점과 선(1958년) 눈의 벽(1958년) 제로의 초점(1959년) 모래 그릇(1961년) 검은 가죽 수첩(1980년)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1960년) 쇼와사 발굴(1964년 - 1971년) 고대사 의혹(1966년 - 1967년) |
데뷔 작품 | 사이고 찰 |
수상 | |
수상 내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1953년) 일본 탐정 작가 클럽 상(1956년) 분게이슌주 독자상(1959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1966년) 기쿠치 간상(1970년) 아사히 상(1990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마쓰모토 미네타로 |
어머니 | 오카다 타니 |
사위 | 와타나베 고지 (전 외무심의관)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모리 오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간 에도가와 란포 나카야마 기슈 마키 이쓰마 가야마 시게루 레이먼드 챈들러 |
영향을 받은 인물 | 미야베 미유키 요코야마 히데오 모리무라 세이이치 기리노 나쓰오 다카무라 가오루 |
2. 생애
마쓰모토 세이초는 1909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현재는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모토 기요하루(松本 清張)였으며, '세이초'는 필명으로, 그의 이름의 한자를 일본식 음독으로 읽은 것이다.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익 회사에 취직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서 광고 레이아웃 디자인을 담당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일을 중단했고, 전쟁이 끝난 후 아사히 신문으로 복귀하여 1950년에는 도쿄 지사로 전근했다.[1]
마쓰모토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았다. 반항적인 십 대 시절에는 금서였던 혁명 관련 서적들을 읽기도 했다.[1] 1950년 '주간 아사히'의 소설 공모전에 단편 소설 〈사이고의 돈(西郷札)〉을 출품하여 3위에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6년 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1]
그는 여러 편의 장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단편 소설도 썼는데, 한때는 다섯 편의 소설을 동시에 잡지 연재 형식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단편 소설로는 도망친 애인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재회하는 이야기인 「추격」(Harikomi)이 있다.
1952년 〈어느 '고쿠라 일기' 전(Aru 'Kokura-nikki' den)〉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1] 그 외에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상(菊池寛賞),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1]
평생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마쓰모토 세이초는 자신의 글에서 반미 감정과 반일 감정을 드러냈다. 1960년 안보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발표한 논픽션 작품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 Nihon no kuroi kiri)》에서는 미국의 비밀 요원들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며 전후 시대의 많은 미제 사건들을 다루었다.[1] 그의 작품들은 일본 사회의 부패를 드러내는 데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1968년에는 세계 문화 대회 대표로 쿠바를 방문했고, 같은 해 말에는 베트남 대통령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가기도 했다.[1]
고고학과 고대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관심은 동북아시아, 서역, 켈트족까지 미쳤다. 1977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엘러리 퀸을 만났고, 1987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자신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점에 대해 강연을 했다.[1]
마쓰모토 세이초는 1992년 82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고쿠라)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 1. 출생과 유년기 (1909년 ~ 1920년)
마쓰모토 세이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아, 작가로 출세하기 전까지의 기록은 주로 자서전인 《반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14]세이초의 아버지 마쓰모토 미네타로는 돗토리현 니치난초의 다나카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 요나고시의 마쓰모토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청년기에 히로시마로 가서 서생이나 간호 잡역부 등을 하였으며, 히로시마현 가모군 시와 촌(현재의 히가시히로시마시 시와초) 출신의 농가 딸로 방적 공장에서 일하던 오카다 다니와 결혼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후쿠오카현 기쿠군 이타비쓰 촌(지금의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날 그와 관련된 다수의 간행물 또는 기타큐슈의 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을 비롯한 대다수의 일본 자료에는 고쿠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쿠라는 그의 출생 신고가 접수된 장소이며,[4] 정작 세이초 자신은 1990년 요미우리 신문 인터뷰에서 "태어난 곳은 고쿠라시(지금의 기타큐슈 시)이지만, 실은 히로시마입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실제로는 지금의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에 전시된 세이초의 어릴적 기념사진에는 히로시마시에 실재했던 지명인 '히로시마 교하시(広島京橋)'라는 사진관 이름이 선명히 기재되어 있다.
이밖에 세이초 자신이 "지금까지의 작품 가운데 자전적인 성격이 가장 진한 소설",[5] "나의 아버지와 다나카 가(家)의 관계는 거의 사실 그대로 썼다"고 기술하고 있는 《부계의 손가락》(父系の指)에서 "나는 히로시마의 K초(町)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고 쓰고 있다. 일본 내 세이초 연구의 제1인자로 꼽히는[6] 시인 겸 문예평론가 고하라 히로시는 이 부분에 대해 통상 사소설에 쓰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사실을 왜곡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며, 그냥 '히로시마'라고 써도 될 것을 굳이 '히로시마의 K마을'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점을 들어, 기념 사진의 건과 합쳐 생각할 때 오구라는 본적지일 뿐 출생지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세이초의 출생지는 히로시마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고하라는 세이초가 말한 K마을을 히로시마역에서 가까운 교바시정(지금의 미나미구)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의 관장이자 그의 담당 편집자이기도 했던 후지이 야스에는 저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잔상》(2002년)에서 "마쓰모토 세이초는 히로시마 태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후지이는 "낡은 한 장의 사진이 히로시마 태생의 방증이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년월일이나 출생지에 대한 공식 기록을 바꿀 수는 없다. 그것들은 당사자가 생전에 자주, 계속 확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면서도, 2009년에 아사히 신문이나 주고쿠 신문지상에서 세이초가 히로시마 태생이긴 하지만 그의 호적등본을 비롯한 모든 공식 기록의 출생지가 고쿠라로 되어 있으며 세이초 본인이 출생지에 대한 정정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굳이 타인이 바꿀 수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지 후지이에 의해 "마쓰모토 세이초는 히로시마 태생"이라고 지적된 뒤, 세이초 관련 문헌에서 그의 출생지를 히로시마로 적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7]
세이초가 태어난 것은 1909년(메이지 42년) 12월 21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2월 12일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에도 전시되어 있는 세이초의 탄생기념사진 뒤에는 '메이지 42년 2월 12일생, 동년 4월 15일 찍음'으로 먹으로 적혀 있고, 현존하는 다른 기념사진에도 '메이지 42년 2월 12일, 동년 6월 27일 찍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 사진을 찍고 뒷면에 이러한 기록을 남긴 사진관은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 실제로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의 생일을 두 번이나 잘못 적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1909년 2월 12일이 세이초의 실제 생일인 것으로 추정된다. 12월 21일이라는 날짜는 그의 출생신고가 수리된 호적상의 생일일 가능성이 높은데, 히로시마에서 고쿠라로 이주한 그의 부모가 미처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의 권유로 신고를 했는데 그때 신고가 늦었다고 관리에게 질책당할까봐 일부러 생일을 앞당겨 기입했을 것,이라는 등의 사정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세이초는 실제로는 1909년 2월 12일에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으며 두 번째 사진을 찍은 그 해 6월 27일까지는 히로시마에 거주했고, 출생신고를 했다고 여겨지는 그 해 12월 21일 경까지의 사이에 일가는 히로시마를 나와 고쿠라에 12월 21일경 출생 신고를 제출, 그 뒤 조부모가 있는 시모노세키시에 이주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이초는 '반생의 기록'에서 "히로시마에서 미네타로와 다니(세이초의 부모)가 규슈의 고쿠라로 옮긴 사정은 잘 모른다.(중략) 그래서, 탄광 경기로 번창하던 기타규슈의 소문을 듣고 슬며시 간몬 해협을 건넌 것은 아닐까 상상한다. 메이지 42년 12월 21일에 내가 태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다.[176] 세이초의 위로 두 명의 누나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어릴 때에 사망했다.
1910년, 조부모가 있는 시모노세키시 단노우라(壇ノ浦)로 이사하였다. 집의 절반이 돌벽 위에 걸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바다가 소용돌이치는 곳이었다. 거기서 지나는 행객들을 상대로 떡장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3년 뒤 선로 건설 과정에서 다이너마이트로 히노야마(火の山) 산기슭을 붕괴시키는 도중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세이초의 가족들은 다시 다나카초(田中町)로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하층의 직업을 전전했지만 학문에 대해서는 동경을 가져 때때로 세이초를 뉘어놓고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외동 아들로 귀염을 받던 세이초는 11세까지 시모노세키에서 자랐다.


2. 2. 고난과 문학적 성장 (1920년 ~ 1945년)
1916년 시모노세키시립 세이가 보통소학교에 입학했으나,[177] 1920년 가족이 고쿠라 시로 이주하면서 텐진시마 진조소학교(天神島尋常小学校)로 전학하였다. 고쿠라에 정착한 것은 세이초가 당시 소학교 5년생(10세에서 11세) 때로 추정된다. 세이초의 부모는 그곳에서 후루센바 정(古船場町)의 목욕탕지기로 살다가 후에 작은 판잣집을 빌려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세이초의 술회에 따르면 앞에는 흰 잿물이 흐르는 작은 개천이 있고 인근 제지회사에서 나오는 폐수의 악취가 감도는 곳이었다고 한다. 1922년 판궤 진조 고등소학교(板櫃尋常高等小学校)[178]에 입학. 부모는 다이하치구루마(大八車)[179]를 몰며 노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이듬해 음식점을 열었다. 집안 환경으로 더 이상 학업을 유지할 수 없었던 세이초는 1924년 학교를 졸업한 뒤 가와기타(川北) 전기주식회사(지금의 일본 파나소닉 에코시스템즈 주식회사의 전신) 고쿠라 출장소의 급사로 취직한다. 얼마 뒤 집안 형편이 차츰 안정되면서 할머니 댁에서 잠시 살았는데, 이 무렵부터 순요도(春陽堂) 문고나 신초샤에서 발간한 문예지를 읽게 되었고, 특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좋아했다고 한다.그러나 1927년 출장소가 폐쇄되면서 직장을 잃고, 고쿠라 시의 다카자키(高崎) 인쇄소에 석판 인쇄 견습공으로 채용되고 나아가 다른 인쇄소에도 견습으로서 들어가지만, 1929년 동료 중 한 사람이 프롤레타리아 문예지를 구독하던 중 좌익계 용의자로 몰리면서 함께 형무소에 갇혀 호된 옥살이를 치렀고, 세이초의 아버지는 그의 장서들을 모두 불사르고 독서를 금지시키고 말았다. 1931년에 인쇄소가 무너지면서 다카자키 인쇄소로 돌아갔다가, 시마이(嶋井) 오프셋 인쇄소에서 다시 견습생활을 거쳐 미타비다카자키(みたび高崎) 인쇄소로 돌아와, 아내 우치다 나오(内田ナヲ)를 만나 결혼하였다. 이 무렵 인쇄소 주인이 사망하자 장래에 불안을 느낀 그는 1937년부터 자영을 시작하였는데, 아사히 신문 서부 지사의 광고부 의장계 임시 촉탁으로 일하기도 했다. 1943년에 정식으로 아사히 신문사의 사원이 되지만, 평소 교련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집되어 쿠루메 제56사단 보병 제148연대에 입대, 이듬해 6월에 전속되어 위생병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그의 부대는 용산에 주둔하다가 1945년에 전라북도 정읍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상등병 진급과 동시에 일본의 패망을 맞았다.
2. 3. 작가 데뷔와 사회파 추리소설의 탄생 (1945년 ~ 1960년)
1952년 기키 다카타로의 권유로 《미타문학》[181]에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나 낙선하였지만, 심사위원이었던 나가이 다쓰오에 의해 "아쿠타가와상에 더 적합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후에 아쿠타가와상 선고위원회에 넘겨져 사카구치 안고의 격찬을 받고 제2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였다.[180]1953년 12월 1일,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로 전근하여 도쿄로 상경하였다. 1956년 5월 31일, 이노우에 야스시의 조언으로 아사히 신문사를 퇴사하고 작가로서 독립하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여러 편의 장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단편 소설도 썼는데, 그중에는 여자가 도망친 애인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재회하는 이야기인 「추격」(Harikomi일본어)이 있다.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 안보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검은 안개」를 통해 반미 분위기를 이용했다.[1] 이 작품에서 기업가적인 탐정은 미국의 비밀 요원들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데, 이 음모는 전후 시대의 많은 유명 사건과 미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2. 4. 논픽션과 역사소설, 그리고 사회 참여 (1960년 ~ 1992년)
1960년 1월, 세이초는 《문예춘추》에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 연재를 시작한다. 《일본의 검은 안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미군 군정 7년 동안 일본에서 일어났던 열 가지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을 다룬 것으로, 연재 당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켜 '검은 안개'라는 말이 정계 및 재계의 부정부패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았다.[1] 연재 중 여러 논쟁을 일으켜 오카 쇼헤이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이후 세이초는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 소설 형식을 취한 작품 (《소설 도쿄제국대학》 등)
- 평론으로 쓴 작품 (《기타 잇키 논》 등)
- 소설이지만 작품 속에 논문을 포함시킨 작품 등,
다양한 스타일의 서술을 시도했다. 세이초는 "처음 《일본의 검은 안개》를 발표할 때, 소설가라는 입장을 고려하여 '소설'로 쓸 생각이었다"고 한다.[27]
1961년에는 전년도 고액 납세자 순위 작가 부문 1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의 1류 소설가로 자리잡았다. 이후 13회 1위. 스기나미구 다카이도로 이사했으며, 나오키상 전형 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나쁜 녀석들》, 《모래 그릇》, 《짐승의 길》, 《덴포 도록》을 발표한다.

1961년 9월, 히라노 겐이 《군상》에서 "마쓰모토 세이초, 미나카미 쓰토무 등의 우수한 사회파 추리소설들이 대두하면서 순문학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 것에서 이토 세이, 다카미 준 등과 순문학 논쟁이 일어났다. 후쿠다 쓰네아리에 의하면, 이 논쟁은 같은 해 1월 오카 쇼헤이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푸른 이리》를 비판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오오카는 세이초나 미나카미 등의 소설을 평론가들이 너무 띄워주었다며 비판하고 있었다.[29]
이후 세이초는 1963년, 에도가와 란포의 후임으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 이사장을 맡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회장직에 있었다.[30][31] 1963년 11월부터 1964년 1월에 걸쳐 고대사 지식을 반영한 《육행수행》을 발표한다. 이후 소설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세상에 외치는 저작들을 발표한다. 세이초는 "이 소설(《육행수행》)은 논문으로서 쓰여진 것도 아니고, 나의 야마타이국론을 소설화한 것도 아니다. (중략) 책으로 정리되니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나의 야마타이국론으로 여겨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그 후 2년 후에 《중앙공론》에 『고대사의』를 집필했다"고 말했다.[33]
마쓰모토 세이초는 여러 장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단편 소설도 썼는데, 한때는 다섯 편의 소설을 동시에 잡지 연재 형식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 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이초는 1968년 세계 문화 대회 대표로 쿠바를 방문했고, 같은 해 말 베트남 대통령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갔다.
고고학과 고대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세이초는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관심은 동북아시아, 서역, 켈트족까지 미쳤다.
3. 작품 세계
마쓰모토 세이초는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눌 수 있으며, 픽션은 다시 추리소설, 현대소설, 평전적 소설, 역사·시대소설로, 논픽션은 근현대사와 고대사로 분류할 수 있다.[1]
그는 여러 편의 장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단편 소설도 썼는데, 한때는 다섯 편의 소설을 동시에 잡지 연재 형식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많은 범죄 소설은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추격」(Harikomi)이다. 이 작품은 여자가 도망친 애인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재회하는 이야기를 다룬다.[1]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상(菊池寛賞),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2년에는 「고쿠라 일기 전설」(Aru 'Kokura-nikki' den)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1]
평생 활동가였던 그는 자신의 글에서 반미 감정과 반일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예를 들어, 1960년 안보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 Nihon no kuroi kiri)라는 논픽션 작품을 통해 반미 분위기를 이용했다. 이 작품에서 기업가적인 탐정은 미국의 비밀 요원들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데, 이 음모는 전후 시대의 많은 유명 사건과 미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1]
고고학과 고대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소설과 많은 수필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의 관심은 동북아시아, 서역, 그리고 켈트족까지 미쳤다.[1]
3. 1. 추리소설
마쓰모토 세이초는 1955년부터 《장콤미(張込み)》를 시작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7년 단편집 《가오(顔)》로 제10회 일본탐정작가클럽상(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잡지 《타비(旅)》에 《텐토센(点と線)》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간행되어 또 다른 장편 추리소설 《메노카베(眼の壁)》와 함께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이초 이전, 세이초 이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서는 '세이초 붐'이 일어났다.[182]그 후에도 《제로노쇼텐(ゼロの焦点)》, 《카게로우에즈(かげろう絵図)》, 《쿠로이가슈(黒い画集)》, 《이즈마타 훅사(歪んだ複写)》 등을 출판하며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그의 다작은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고,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작가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는 한국 잡지 《사상계》 1962년 8월호에 "아침부터 밤까지 쓰고 있습니다만 몇 명의 비서를 시켜 자료를 모아들이게 하고 그 자료를 쓸 뿐이니까요. 마쓰모토로 말하자면 인간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タイプライター)'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세이초는 "사무처리를 하는 어시스턴트가 한 명 있을 뿐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반론했다.[25] 그러나 후에 손에 경련이 오는 바람에 구술 필기를 시킨 후 가필하는 식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1961년 출판된 수필 《검은 수첩》에서는 트릭의 존중이나 본격 추리의 재미는 긍정하면서도, 소수의 마니아만을 염두에 두고 설정과 묘사의 기발함만을 겨루는 상황이 추리 소설의 침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하며, 더 많은 사람들의 현실에 부합하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2]
사건 자체보다 사건의 '동기' 묘사에 집중하면서 세이초의 소설에서는 심리 묘사가 깊어졌다. 추리소설을 통해 '인간'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세이초 이전부터 논의가 계속되어 온 고전적인 문제이다. 세이초가 작가로서 세상에 나올 때 큰 역할을 한 키키 고타로와 코가 사부로에 의한 쇼와 11년-12년의 《고가·키키 논전》이 유명하다.[68] 에도가와 란포는 《탐정소설 본격주의 타도의 순문학론을 고창한 것》이라고 평가했다.[69] 또한 추리소설에는 사회성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 기쿠치 간의 단편소설에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보였던 세이초는 특히 단편소설을 많이 집필했다. 초기 작품 대부분은 단편이며, 문학적인 완성도 측면에서 단편을 높이 평가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킨 《검은 화집》을 시작으로 연작 형식의 단편 발표가 계속되어 세이초 창작 활동의 큰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장편 집필이 주가 되면서 단편 창작량은 감소했지만, 말년에도 단편 시리즈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소설관》, 《풀의 지름》을 발표하는 등, 죽는 순간까지 단편 창작 시도는 계속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여러 편의 장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단편 소설도 썼는데, 한때는 다섯 편이나 되는 소설을 동시에 잡지 연재 형식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많은 범죄 소설들은 잡지에 첫선을 보였는데, 그중에는 여자가 도망친 애인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재회하는 이야기인 「추격」(Harikomi)이 있다.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상(菊池寛賞),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2년에는 「고쿠라 일기 전설」(Aru 'Kokura-nikki' den)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3. 2. 역사소설
데뷔 초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의 소설 집필은 역사 소설이 중심이었으며, 『구루마야도(くるま宿)』, 『수라이 로지(秀頼走路)』, 『54만 석의 거짓말(五十四万石の嘘)』, 『코고메(いびき)』 등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이러한 세이초의 역사 단편에서는 역사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져 가는 불운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76] 앞서 서술한 유치장 구금 경험이 반영된 『코고메(いびき)』 등 한때의 작가 자신의 생활 경험이 작품 전반에 현저하게 드리운 작품도 볼 수 있다. 또한 세이초가 처음으로 장편을 시도한 소설도 역사 소설이었다. 작가로서의 지명도가 올라 집필량이 급증한 뒤로도 연작 시대 소설 『무숙인별장(無宿人別帳)』을 연재하는 등 한동안은 시대·역사 소설이 병행해 쓰였다.역사 소설에 관해 세이초는 "오가이(鷗外)처럼 사실을 극명하게, 담담하게 한문을 섞어 쓰는 것만이 '풍격 있는' 역사 소설은 아니다. 사실의 하층에 파묻혀 있는 인간을 발굴하는 것이 역사 소설가의 할 일인 것이다. '사실'이란 결국 당시의 인간 심리의 교섭이 남긴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역사 소설은 '사실'이라는 형태의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파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소설'과 '사실'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77]
출판사의 시리즈 기획으로 에도 시대를 논한 『막말의 동란(幕末の動乱)』이 정리되었는데, 그 경험을 살리는 형태로 대작 『카게로 그림(かげろう絵図)』·「덴포 도록(天保図録)」이 태어났다.
세이초는 또 기쿠치 칸(菊池寛)의 『일본합전담(日本合戦譚)』(1932 - 34년, 올 독물(オール讀物)에 연재)의 모티프를 살리는 형태로 『사설 일본 전투담』(올 독물(オール讀物)에 연재했다)을 집필하고 있다. 또, 오카모토 키도(岡本綺堂)의 『한시치 포물장(半七捕物帳)』을 비롯한 죄인명부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단편 집성형의 연작으로서 『채색에도절회도(彩色江戸切絵図)』, 『다홍색 인쇄 에도의 소문(紅刷り江戸噂)』을 집필했다. 여기서도 추리소설과 같이 시리즈 캐릭터의 등장은 피해지고 있다(『범』, 『견세물사』는 유일한 예외).
3. 3. 논픽션
마쓰모토 세이초는 논픽션 작품 외에도, 나카에 조민을 다룬 『불의 허주(火の虚舟)』,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소재로 한 소설 『상징의 설계(象徴の設計)』, 오쿠보 도시미치에서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등을 거쳐 1980년에 이르는 일본의 수상에 관한 『사관·재상론(史観・宰相論)』 등 주로 인물을 통해 근현대사를 다시 검토하는 작업을 이어갔다.문예춘추는 이후에도 세이초에게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써 줄 것을 기대했다. 중단된 문예춘추의 기획 중 하나로 「전후 내각론(戦後内閣論)」이 있다.
만년에 이르러 논픽션에서 소설 작품으로 계획이 변경되어 『신들의 난심(神々の乱心)』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일본 근대사 전공인 유마 가쿠(有馬学)에 따르면, 『쇼와사 발굴(昭和史発掘)』에서 세이초가 활용한 자료는 당시 연구자들의 시각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없이는 수집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추측이 생겼지만, 세이초는 “자료의 탐색 수집은 주간 분춘(週刊文春) 편집부원인 후지이 야스에이(藤井康栄)가 혼자서 담당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와 일본 문학자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는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와 『쇼와사 발굴』에는 세이초의 전후 역사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전후 역사학이 '권력 대 민중 운동'의 틀에 얽매여 권력(=천황(天皇))의 문제를 검토하는(=천황제는 봉건제의 잔재이며 일본 낙후의 상징이라는) 이데올로기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에 대해, 패전 일본을 통치한 GHQ의 음모라는 관점을 도입하고, 또한 법칙성에 기초한 역사의 발전(=마르크스주의(マルクス主義))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을 추구하여 배경을 탐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역사학에는 없었고, 『일본의 검은 안개』의 방법이 새로운 것이었다. 『일본의 검은 안개』는 천황을 둘러싼 논의에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많은 역사학자들은 세이초의 논의를 경시·무시했지만, 후에 세이초는 『쇼와사 발굴』에서 파시즘(ファシズム) 문제에 임하여, 전후 역사학이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를 염두에 두고 사상 통제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에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파시즘'을 강조하는 패턴을 취했던 것에 대해, 세이초는 하사관(下士官)이나 병사 레벨까지 자료 발굴·언급 대상을 확대하여, 2·26사건(二・二六事件)에서 봉기한 청년 장교나, 도쿄재판(東京裁判)에서의 A급 전범(A級戦犯)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쟁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아래로부터 파시즘'을 원했던 것을 논증하려고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4. 주요 작품 목록
- 장편 소설
- * 점과 선(点と線) (1958년)
- * 눈의 벽(眼の壁) (1958년)
- * 제로의 초점(ゼロの焦点) (1959년)
- * 검은 수해(黒い樹海) (1960년)
- * 파도의 탑(波の塔) (1960년)
- * 안개의 깃발(霧の旗) (1961년)
- * 모래그릇(砂の器) (1961년)
- * 나쁜 녀석들(わるいやつら) (1961년)
- * 검은 복음(黒い福音) (1961년)
- * 구형의 황야(球形の荒野) (1962년)
- * 시간의 풍속(時間の習俗) (1962년)
- * 짐승 길(けものみち) (1964년)
- * D의 복합(Dの複合) (1968년)
- * 중앙 유사(中央流沙) (1968년)
- * 듣지 못한 장소(聞かなかった場所) (1971년)
- * 먼 접근(遠い接近) (1972년)
- * 불의 길(火の路) (1975년)
- * 유리의 성(ガラスの城) (1976년)
- * 건네받은 장면(渡された場面) (1976년)
- * 소용돌이(渦) (1977년)
- * 천재 화가(天才画の女) (1979년)
- * 검은 가죽 수첩(黒革の手帖) (1980년)
- * 나라 시대의 마술사(眩人) (1980년)
- * 야광의 계단(夜光の階段) (1981년)
- * 욕망의 거리(彩り河) (1983년)
- * 미궁 지도(迷走地図) (1983년)
- * 뜨거운 비단(熱い絹) (1985년)
- * 성수 배열(聖獣配列) (1986년)
- * 안개의 회의(霧の会議) (1987년)
- * 검은 하늘(黒い空) (1988년)
- * 붉은 빙하기(赤い氷河期) (1989년)
- * 신들의 광기(神々の乱心) (1997년)
- 중・단편 소설
- * 사이고의 화폐(西郷札) (1951년)
- * 고쿠라 일기 전설(或る「小倉日記」伝) (1952년)
- * 얼굴(顔) (1955년)
- * 소리(声) (1955년)
- * 잠복(張込み) (1955년)
- * 지방지 신문을 사는 여자(地方紙を買う女) (1957년)
- * 1년 반 기다려(一年半待て) (1957년)
- * 귀축(鬼畜) (1958년)
- * 아마기 고개(天城越え) (1958년)
- * 손가락(指) (1969년)
- * 의혹(疑惑) (1982년)
- 역사 소설 및 논픽션
- * ''일본의 검은 안개'' (日本の黒い霧) (1960년)
- * ''쇼와사 발굴'' (昭和史発掘) (1965년 ~ 1972년)
- * ''기타 이키 논'' (北一輝論) (1976년)
- * ''2·26사건'' (二・二六事件) (1986년 ~ 1993년)
- * 『邪馬台国論考』(야마타이코쿠 론코) (1968년)
- * 『清張歴史シリーズ 日本古代史』(세이쵸 력시 시리즈 닛폰 고다이시) (1976년 ~ 1983년)
- * 『ペルセポリスから飛鳥へ』(페르세폴리스카라 아스카에) (1979년)
- 주요 관계 출판사
- * 문예춘추(文藝春秋): 기쿠치 칸(菊池寛)이 창립한 출판사로, 마쓰모토 세이초는 芥川상 수상 이후 말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기고했다. 전체 작품의 약 4분의 1이 문예춘추의 여러 잡지에 실렸다.[85] 주요 관계자는 다음과 같다.
- ** 후지이 야스나리(藤井康栄): 마쓰모토 세이초 담당 편집자의 대표적인 인물. 『별책 검은 그림첩』(別冊黒い画集) 시리즈와 『쇼와사 발굴』(昭和史発掘) 취재를 담당했다. 『마쓰모토 세이초 전집』(松本清張全集) 편집을 거쳐, 기타큐슈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관장을 역임했다.[86]
- ** 한도우 카즈토시(半藤一利): 후지이의 상사로, 『현대 관료론』(現代官僚論)을 담당했고, 『주간 분슌』(週刊文春)과 『문예춘추』(文藝春秋) 편집장으로서 『사이카이도 단키』(西海道談綺) 취재 여행에 동행했다.[86]
- ** 모리 시로(森史朗): 1970년부터 『문호』(文豪)와 『고대 탐구』(古代探求) 등 3년간 마쓰모토 세이초를 담당했고, 후에 『빈 하늘의 성』(空の城)을 담당했다.[92]
- ** 다카하시 카즈키요(高橋一清): 『강한 개미』(強き蟻)와 『사이카이도 단키』(西海道談綺)를 담당했다.
- * 코분샤(光文社): 『점과 선』(点と線) 발행 이후 많은 작품을 발행하여 "마쓰모토 세이초 = 추리소설"이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카파 노벨스(カッパ・ノベルス) 초대 편집장 이가 히로미쓰(伊賀弘三良)가 중심이었다.[87] 사쿠라이 히데노리(櫻井秀勲)는 『파도의 탑』(波の塔)을 담당했다. 이가와 사쿠라이가 쇼덴샤(祥伝社)를 설립했을 때, 마쓰모토 세이초는 『인간 수역』(人間水域)을 "논 북"(ノン・ブック) 창간작으로 제공했다.
- * 신초샤(新潮社): 장편 소설 연재 및 단편 발표 등, 말년까지 많은 작품의 발표 무대였다.
- ** 스가 케이코(須賀契子): 『나쁜 녀석들』(わるいやつら), 『짐승의 길』(けものみち), 『야광의 계단』(夜光の階段) 등에서 마쓰모토 세이초를 담당하며 30년 이상 관계를 이어갔다.[88]
- ** 오지 히로후미(王子博夫): 『금단의 련가』(禁忌の連歌) 시리즈를 담당했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결혼식 주빈을 맡았으나, 『검은 가죽 수첩』(黒革の手帖) 완결 1년 후 도메이 고속도로(東名高速道路)에서 사고사했다.[89]
- ** 쓰쓰미 신스케(堤伸輔): 『성수 배열』(聖獣配列)과 『붉은 빙하기』(赤い氷河期)를 담당했다.[90]
- * 주오공론샤(中央公論社) (현: 주오공론신샤(中央公論新社)): 미야타 마리에(宮田毬栄)가 『검은 복음』(黒い福音)을 담당했다.[93]
- * 아사히 신문사(朝日新聞社): 주킨 아쓰유키(重金敦之)가 『검은 양식』(黒の様式), 『검은 도설』(黒の図説), 『노래 없는 노래집』(歌のない歌集) 등 『주간 아사히』(週刊朝日) 게재 작품을 중심으로 담당했다.[91]
5. 한국과의 관계
마쓰모토 세이초는 생전에 일본 고대사에 대한 탐구를 담은 저서 《고대사의》(古代史疑, 1968년)를 간행한 것을 시작으로, 고분 시대를 논한 《유고의고》(遊古疑考), 일본 신화를 다룬 《고대탐구》(古代探求) 등 일본 고대사에 관한 평론이나 수필을 다수 집필하였다. 그의 고대사에 대한 조예는 소설 《D의 복합》, 《거인의 물가》, 《불의 길》 등으로도 나타났다.[19]
1945년 일본 패전 후, 마쓰모토 세이초는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틈틈이 교토시, 나라현 나라시와 아스카 지방의 오래된 사찰을 견학했다.[19]
6. 평가 및 영향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추리소설계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그의 작품은 문학적,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평가받았다.
1980년대 초, 세이초는 일본국유철도 문제에 대해 '국철의 자주 재건을 바라는 7인위원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노사 양측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30] 1983년에는 그의 작품 드라마화가 과열되자, 원작 테마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개 기획 사무소'를 설립하고 감사역을 맡았다.
1984년, TV 아사히의 《뉴 다큐멘터리 드라마 "쇼와"ㅡ마쓰모토 세이초 사건에 관한》 감수를 맡아 해설자로 출연했다. 1987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제9회 세계 추리 작가 회의에 일본 추리 작가 최초로 참석해 강연했다. 그는 일본 추리소설의 우수성을 알리고, 해외 번역 필요성을 강조했다. 프랑수아 리비에르와의 대담에서 '네오·본격 추리소설'을 제창하며, 추리소설의 골격과 부주제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세이초는 야마타이국 논쟁에서 규슈설을 주장했으며, 전국혁신간 대표 간사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 현대사 발굴 등 다년에 걸친 폭넓은 작가 활동'으로 아사히상을 수상했다. 만년에는 시대소설 집필에 힘썼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히에이 산 방화 사건을 다룬 작품과 그르노블 원자력발전소 관련 추리 장편 소설을 구상했다.
1992년 뇌출혈로 쓰러져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유서에는 "난 노력만은 해왔다"라는 말이 기록되었다.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쓰모토 세이초상이 제정되었고, 1998년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기쿠치 간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받았다. 1952년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평생 활동가로서 자신의 글에서 반미 감정과 반일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안보 투쟁 절정기에 발표한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는 미국 비밀 요원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내용을 담아 반미 분위기를 이용했다.[1]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일본 사회의 부패를 드러냈으며, 쿠바와 베트남을 방문했다.
고고학과 고대사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소설과 수필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관심은 동북아시아, 서역, 켈트족까지 뻗었다.
1977년 일본을 방문한 엘러리 퀸을 만났고, 1987년 프랑스 추리 작가들 초청으로 그르노블에서 자신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점에 대해 강연했다.
6. 1. 일본 문학사에서의 위치
1960년 1월, 세이초는 《문예춘추》에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 연재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미군 군정 7년 동안 일본에서 일어났던 열 가지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을 다루었다. 연재 당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켜 '검은 안개'라는 말이 정치, 경제계의 부정부패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잡았다.[29] 또한 연재 중 여러 논의를 일으켜 오카 쇼헤이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이후 세이초는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소설 형식을 취하거나(《소설 도쿄 제국대학》 등), 평론으로 쓰거나(《기타 잇키 론北一輝論》 등), 소설에 논문을 삽입하는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다. 세이초는 "처음 《일본의 검은 안개》를 발표할 때, 소설가라는 입장을 떠올리며 '소설'로서 쓸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29] 1961년에는 전년도 고액 납세자 순위 작가 부문 1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에서 1류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3회 1위를 기록했고, 스기나미구 다카이도로 이사했으며 나오키상 전형 위원을 맡았다. 이후 《나쁜 녀석들》(わるいやつら), 《모래그릇》(砂の器), 《짐승의 길》(けものみち), 《덴포 도록》(天保図録)을 발표했다.
1961년 9월, 아사히 신문에 히라노 겐이 잡지 《군상》에서 "마쓰모토 세이초, 미나카미 쓰토무 등의 우수한 사회파 추리소설들이 대두하면서 순문학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이토 세이, 다카미 준 등과 순문학 논쟁이 일어났다.[29] 후쿠다 쓰네아리에 따르면, 이 논쟁은 같은 해 1월 오카 쇼헤이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창랑》을 비판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오오카는 이어서 세이초나 미나카미 쓰토무 등의 소설을 비평가들이 너무 띄워주었다며 비판하고 있었다.
1963년, 세이초는 에도가와 란포의 후임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을 맡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회장직에 있었다.[30][31] 1963년 11월부터 1964년 1월에 걸쳐 자신의 고대사 지식을 현저하게 반영한 《육행수행》을 발표했다. 이후 소설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보다 깊게 세상에 알리는 저작들을 발표했다. 세이초는 "이 소설(육행수행)은 논문으로 쓰여진 것도 아니고, 내 야마타이국론을 소설화한 것도 아니다. (...) 책으로 정리되니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내 야마타이국론으로 여겨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그 후 2년 후에 '중앙공론'에 『고대사의』를 집필했다"고 말했다.[33]
세이초의 역사, 특히 고대사에 대한 관심은 기타큐슈를 중심으로 각지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길러졌다. 세이초는 "내가 쓰는 '역사'는 고대사와 현대사에 관계된 것이 많고, 그 가운데는 빠져 있다. 사람들로부터 자주 질문받는 점이지만 이것은 '잘 모른다'는 점에 매료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사에는 사료가 적기에, 현대사는 자료가 너무 많지만 그 가치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어느 쪽이나 공백의 부분이 있다. 역사는 역시 추리의 즐거움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세이초가 제시한 고대사 관련 가설은 이후 고고학 및 역사학 연구 성과에 의해 현재는 사실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도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켜 학계에 자극을 주었던 그 '착상'을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도 존재한다.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학자 아리마 마나부에 의하면, 논픽션 《쇼와사 발굴》에서 세이초가 인용한 사료들은 당시 연구자가 봐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없으면 모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와 일본 문학자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의 검은 안개》와 《쇼와사 발굴》에서 세이초의 당시 일본 전후 역사학(학문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6. 2. 사회적 영향
마쓰모토 세이초는 작품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작가였다.1960년 1월, 세이초는 《문예춘추》에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 연재를 시작했다.[1]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정 7년 동안 일본에서 일어난 10가지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을 다루었으며, '검은 안개'라는 용어가 정계 및 재계의 부정부패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잡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이초는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소설 도쿄 제국대학》 등), 평론(《기타 잇키 논北一輝論》 등), 소설과 논문을 결합한 작품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다. 1961년에는 작가 부문 고액 납세자 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 대표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 9월, 아사히 신문에 히라노 겐이 "마쓰모토 세이초, 미나카미 쓰토무 등의 사회파 추리소설 대두로 순문학 개념은 역사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면서, 이토 세이, 다카미 준 등과 순문학 논쟁이 벌어졌다.[29]
1963년, 에도가와 란포의 뒤를 이어 일본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을 맡았고,[30]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했다.[31] 1963년 11월부터 1964년 1월까지는 고대사 지식을 반영한 《육행수행》(陸行水行)을 발표하며, 소설 외에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82년 3월 30일에는 '노조 억누르기'로 평가된 일본국유철도 문제에 대해 《국철의 자주 재건을 바라는 7인위원회》 회원으로 참가하여, 노사 양측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1983년, 세이초 작품의 드라마화가 과열되자, 원작 테마를 벗어난 영상화를 막기 위해 '안개 기획 사무소'를 설립하고 감사역을 맡았다(2000년 해산).
1984년에는 《뉴 다큐멘터리 드라마 "쇼와"ㅡ마쓰모토 세이초 사건에 관한》(TV 아사히 아사히 방송)의 감수를 맡아 해설자로 출연했다.
1987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제9회 《세계 추리 작가 회의》에 일본 추리 작가 최초로 참석하여 강연했다.
세이초는 고대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단비》(断碑), 《돌의 뼈》(石の骨) 등의 단편을 썼고, 《일본의 검은 안개》, 《쇼와사 발굴》 등 논픽션 작품 외에도 《불의 허주》(火の虚舟), 《상징의 설계》, 《사관 · 재상론》(史観・宰相論) 등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세이초가 제시한 고대사 가설은 이후 연구에서 일부 부정되기도 했지만, 일반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 학계에 자극을 준 점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노우에 미쓰사다, 우에다 마사아키 등은 세이초의 《고대사의》를 높게 평가했고, 사와라 신은 세이초의 발상이 자극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역사학자 가도와키 데이지, 고고학자 모리 고이치는 세이초가 정치사 중심 학계에 국제 교류, 무역사, 페르시아 문화 영향력 등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학자들에게 긴장감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아리마 마나부는 《쇼와사 발굴》에서 세이초가 인용한 사료 수준이 높다고 평가했고, 나리타 류이치와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의 검은 안개》와 《쇼와사 발굴》에서 세이초의 전후 역사학 비판 의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이초는 'GHQ의 모략'이라는 관점을 도입하고, 개별 사건의 배경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을 논증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세이초는 평생 활동가로서 반미, 반일 감정을 드러냈다.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일본의 검은 안개》를 통해 반미 분위기를 이용했고, 기업 탐정이 미국 비밀 요원의 음모를 밝히는 내용을 담았다.[1] 1968년에는 세계 문화 대회 대표로 쿠바를 방문하고, 베트남 대통령을 만나러 베트남을 방문했다.
세이초는 현실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이어갔고, 젊은 현대사 연구자들을 위한 《계간 현대사》를 창간했다. 일본 공산당은 인정했지만, 전학공투회의는 평가하지 않았다.[131]
1965년, 일본 사회당 오카다 하루오 의원은 자위대 '미야 연구' 존재를 폭로했는데, 오카다는 정보 제공자가 세이초라고 밝혔다.[132] 세이초는 침묵했다.[133]
세이초는 50세 넘어 처음 해외에 나갔지만, 이후 활발히 해외 활동을 했다. 해외 추리소설을 쓰고, 고대사 문화 답사, 사회주의 국가 취재를 했다. 말년에는 서유럽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썼다.
세이초는 E. S. 가드너를 일본 추리 작가 협회 회장으로 초청했고, 세이초 원작 영화 중 《모래그릇》이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다. 세이초는 영어를 잘했고, 아사히 신문 서부 본사에서 외국인 대응을 맡았으며, 해외 취재에서 직접 영어로 대응했다.
7. 수상 경력
- 1953년 - 「어떤 ‘고쿠라 일기’ 전승」으로 제28회 아쿠타가와상 수상. 같은 해, 「추추금」으로 제1회 올 신인상 가작 수상.
- 1957년 - 단편집 「얼굴」(Kao)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1]
- 1967년 -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2]
- 1970년 - 《쇼와사 발굴》 등으로 제18회 기쿠치 간 상 수상.[3] 같은 해 《일본의 검은 안개》, 《심층 해류》, 《현대 관료론》으로 일본 저널리스트회의상 수상.[4]
- 1971년 - 《부재중인 집의 사건》으로 제3회 소설 현대 골든 독자상 수상.[5]
- 1990년 - 아사히 상 수상.[6]
8. 기타
전국혁신간(全國革新懇, 평화, 민주, 혁신의 일본을 지향하는 전국모임의 통칭) 대표 간사를 맡았다. 고생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듯이, 가끔 오만 불손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때도 있었다. 자신의 작품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직접 배우로서 출연하기도 했다. 〈야마타이 국 논쟁〉(邪馬台国論争)에서는 큐슈설을 주창했다.
1990년,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 현대사 발굴 등 다년에 걸치는 폭넓은 작가 활동》으로 1989년도 아사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 무렵 세이초의 시대·역사 소설 집필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1992년 봄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히에이 산 방화 사건을 엔랴쿠지의 시점에서 그린 작품과 그레노블 원자력발전소에 관한 추리 장편 소설을 구상하는 등 다시 집필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1992년 4월 20일 뇌출혈로 도쿄 여자의과대학병원에 입원, 수술은 성공했지만 7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간암이 발견되었다. 결국 8월 4일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9년 6월 10일 밤에 작성된 그의 유서에는 "난 노력만은 해왔다" 등의 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신들의 난심》(神々の乱心), 《에도재담 고슈영악당》 등은 미완으로 끝났다. 법명은 '''청한원석문장(清閑院釋文張)'''이다.
1994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마쓰모토 세이초상이 제정되었다.
8. 1. 필명
본명은 '마쓰모토 기요하루(きよはる)'이며, '''세이초'''(せいちょう)는 그의 이름의 한자 표기인 '淸張'을 음독한 필명이다.[175] 이는 소설가 나카야마 기슈(中山義秀, 본명은 나카야마 요시히데)의 필명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 편집자들도 그의 이름을 '기요하루'로 읽었다고 한다.문예춘추의 담당 편집자는 세이초의 필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전하고 있다.
- 소설가 나카야마 기슈를 본떠 음독으로 했다. 세이초는 “기슈”가 본명이라고 착각했지만, “일단 그것으로 정해버린 이상,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으니 ‘세이초’로 한 거야.”
- 1950년대 중반까지는 “키요하루”로 통했지만, “모두가 ‘세이초 씨’라고 부르니까 과감하게 그쪽을 펜네임으로 했다.”[3]
8. 2. 기념관
1998년 기타큐슈시에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서재와 서고를 재현하였다.[49] 기념관은 고쿠라키타구에 있다.참조
[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Point and Line (1958) - IMDb
https://www.imdb.com[...]
[3]
간행물
週刊誌創刊時代の松本清張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4]
뉴스
中国新聞
2009-04-02
[5]
서적
松本清張傑作選 戦い続けた男の素顔―宮部みゆきオリジナル セレクション
新潮社
[6]
웹사이트
清張とその時代
https://www.kinokuni[...]
2020-05-26
[7]
웹사이트
ふくおかクロニクル 福岡ゆかりの人々
https://rkb.jp/fukuo[...]
2017-06-04
[8]
간행물
記念館だより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9]
서적
松本清張書誌研究文献目録
[10]
뉴스
特別展「松本清張展〜清張文学との新たな邂逅」
朝日新聞
2010-05-08
[11]
서적
松本清張全集 第60巻
文藝春秋
[12]
라디오
松本清張
NHKラジオアーカイブス
2013-09-03
[13]
서적
霧の中の巨人 回想・私の松本清張
[14]
서적
松本清張 その人生と文学
[15]
뉴스
「松本清張、少年期の詩か 大正期、小倉の同人誌に名前 発行当時は地元の小学生」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18-06-14
[16]
간행물
松本清張の印刷所時代(松本清張記念館館報第15号)
https://www.seicho-m[...]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4-03
[17]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출판사 정보 없음)
[18]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출판사 정보 없음)
[19]
서적
松本清張全集 第59巻
[20]
서적
解説
(출판사 정보 없음)
[21]
간행물
私のくずかご
[22]
서적
松本清張全集 59巻
[23]
간행물
古代史・考古学への目覚め-朝日新聞社時代の松本清張-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4]
서적
雑草の実
[25]
뉴스
日本読書新聞
1962-10-22
[26]
서적
清張 闘う作家-「文学」を超えて
ミネルヴァ書房
[27]
뉴스
なぜ『日本の黒い霧』を書いたか
1960-12-04
[28]
서적
老公 松本清張全集66
文藝春秋
[29]
서적
文壇論争術
雪華社
[30]
서적
続々・推理文壇戦後史
双葉社
[31]
서적
ミステリーとの半世紀
小学館
[32]
서적
ミステリーとの半世紀
小学館
[33]
서적
松本清張自選傑作短篇集
読売新聞社
[34]
서적
二・二六事件-研究資料
[35]
간행물
ジャーナリスト松本清張さんの一面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36]
간행물
潮
潮出版社
1968-06
[37]
서적
松本清張対談 第2回「戦争と貧困はなくせるか」
[38]
서적
池田大作 行動と軌跡
中央公論新社
2006
[39]
간행물
清張の言うクリスティの「砂袋」とは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3
[40]
간행물
対談:エラリー・クイーン vs 松本清張
光文社
1978
[41]
서적
清張日記
文藝春秋
1983-09-05 #추정 날짜. 昭和57年9月5日は1982년 9월 5일 입니다. 문맥상 1983년 이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확한 출판일 확인 필요.
[42]
서적
続々・推理文壇戦後史
双葉社
1980
[43]
뉴스
読売新聞
1978-07-28
[44]
간행물
「霧プロ」始末記
1984-10-26
[45]
서적
正倉院への道
日本放送出版協会
[46]
간행물
幻の歴史小説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1
[47]
간행물
『日本の黒い霧』-私はこう読んだ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4
[48]
서적
追憶の作家たち
文春新書
2004
[49]
뉴스
来月3日に清張研究会
東京新聞
2022-11-10
[50]
웹사이트
市道を“清張通り”と命名/北九州市で記念式典
http://www.shikoku-n[...]
四国新聞
2010-05-24
[51]
웹사이트
「松本清張資料室がオープン 父の出身地・日南町で」
http://www.nnn.co.jp[...]
日本海新聞
2011-11-14
[52]
뉴스
「くろずみ清張公園」に名称変更、銘板除幕式 小倉北 /福岡
https://mainichi.jp/[...]
Mainichi Daily News
2016-04-07
[53]
웹사이트
福岡)「くろずみ清張公園」に名称の由来説明の碑が完成
https://www.asahi.co[...]
2020-08-30
[54]
웹사이트
「松本清張全集62冊消える 北九州図書館、空白の1日」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9-16
[55]
웹사이트
盗まれた清張全集 ファンが寄贈、北九州の図書館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12-11
[56]
서적
特別展「巨星・松本清張」
神奈川県立神奈川近代文学館
[57]
웹사이트
松本清張と山陰
https://digital-coll[...]
鳥取県交流人口拡大本部観光戦略課
2022
[58]
웹사이트
松本清張と山陰
https://siseidodesig[...]
株式会社 シセイ堂デザイン
[59]
웹사이트
企画展示・郷土】没後30年を迎えた松本清張と山陰のゆかり
https://www.library.[...]
鳥取県立図書館
2022-11-02/2022-12-07 #기간
[60]
서적
松本清張短篇総集
講談社
1963
[61]
서적
着想ばなし(15)
文藝春秋
1984
[62]
서적
平野謙 松本清張探求
同時代社
2003
[63]
서적
「点と線」から「霧の会議」まで - 清張ミステリーの系譜
文藝春秋
1992/2003 #두 번 출판
[64]
간행물
純文学論争以後
1971-10
[65]
서적
日本の推理小説
中央公論社
1961
[66]
간행물
『新青年』と松本清張
砂書房
1997
[67]
서적
続・推理文壇戦後史
双葉社
1978
[68]
서적
探偵小説四十年
桃源社/光文社
1961/2006 #두 번 출판
[69]
서적
幻影城
岩谷書店/光文社
1951/2003 #두 번 출판
[70]
서적
続・幻影城
早川書房/光文社
1954/2004 #두 번 출판
[71]
간행물
推理小説研究 第7号
日本推理作家協会
1969
[72]
잡지
推理小説における清張以前と以後
1978-06
[73]
문서
日本の推理小説
[74]
에세이
グルノーブルの吹奏
1988-01
[75]
에세이
調べ推理する楽しみ
[76]
서적
松本清張 時代の闇を見つめた作家
文藝春秋
2009
[77]
에세이
推理小説の周辺
[78]
잡지
事実・発掘・史料-いま再びの「昭和史発掘」
青土社
2005-03
[79]
서적
二・二六事件-研究資料
文藝春秋
1976
[80]
잡지
松本清張と歴史への欲望
2005-03
[81]
잡지
私を語る-思考と提出
學燈社
1973-07
[82]
잡지
松本清張『古代史疑』を考証する
1967-01
[83]
서적
松本清張全集 第65巻
[84]
간행물
清張古代史の現在を再検討する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5
[85]
간행물
清張古代史を語る
砂書房
1998
[86]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第7号
デアゴスティーニ・ジャパン
2009
[87]
서적
カッパ・ブックスの時代
河出書房新社
2013
[88]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第7号
[89]
잡지
担当記者「東名」の死
文藝春秋
1983
[90]
웹사이트
松本清張の日記
https://www.gqjapan.[...]
GQ Japan
2017-01-31
[91]
서적
編集者の食と酒と
左右社
2011
[92]
잡지
菊池寛の文学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1988-02
[93]
간행물
松本清張にとって鷗外とは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0
[94]
에세이
推理小説の周辺
[95]
에세이
一冊の本
朝日新聞
1960-11-03
[96]
서적
解説-時分の花
[97]
간행물
『小説研究十六講』から『小説研究十六講』へ - 菊池寛・木村毅・松本清張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1
[98]
서적
清張さん、ちょっといい話
文藝春秋臨時増刊
1992
[99]
잡지
推理小説論
1961-09
[100]
잡지
松本清張批判
1961-12
[101]
잡지
大岡昇平氏のロマンチックな裁断
1962-01
[102]
잡지
日本の文化と日本人
新日本出版社
1973-01
[103]
잡지
日本の作家100人
1971-12
[104]
서적
歴史小説と私, 歴史と小説
集英社文庫
1969
[105]
잡지
小倉をめぐる清張と鷗外
[106]
서적
『文藝春秋』執筆者番付の研究
文藝春秋
1994-04
[107]
서적
追憶の作家たち
文春新書
2004
[108]
논문
松本清張と一九六〇年代の文学全集の時代-中央公論社刊『日本の文学』問題をめぐる考察
花書院
2009
[109]
간행물
文藝
1963-05
[110]
서적
小説ほど面白いものはない 山崎豊子 自作を語る3
新潮社
2009
[111]
논문
松本清張と三島由紀夫
砂書房
1998
[112]
서적
過ぎゆく日暦(カレンダー)
1981-11-15 # 추정 날짜. 昭和56년 11월 15일을 1981년 11월 15일로 변환.
[113]
서적
松本清張推理評論集 1957-1988
中央公論新社
2022
[114]
서적
随筆 黒い手帖
[115]
서적
グルノーブルの吹奏
[116]
서적
探偵小説四十年
[117]
서적
都市の迷宮 (ミステリーの愉しみ4)
立風書房
1992
[118]
간행물
座談会「松本清張を語る」
宝石
1963-06
[119]
서적
随筆 黒い手帖
[120]
서적
推理文壇戦後史・4
双葉社
1989
[121]
논문
ポーの原書と北九州CIE図書館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9
[122]
논문
「アッシャー家の崩壊」と松本清張
[123]
서적
横溝正史読本
角川文庫
2008
[124]
서적
真山仁が語る横溝正史 私のこだわり人物伝
角川文庫
2010
[125]
서적
作家の条件
講談社文庫
2010
[126]
서적
本格ミステリー宣言
講談社文庫
1993
[127]
웹사이트
Global Mystery Fusion Watch 山村教室特別講演 前半その7
http://gmfw.orientex[...]
[128]
서적
松本清張短編全集01 西郷札
光文社文庫
2008
[129]
서적
推理小説常習犯 - ミステリー作家への13階段+おまけ
KKベストセラーズ/講談社+α文庫
1996/2003
[130]
서적
状況曲線
新潮文庫
1992
[131]
논문
ジャーナリスト松本清張さんの一面
[132]
서적
国会爆弾男 オカッパル一代記―反戦平和に賭けた議員生活40年
行研出版局
1987-02
[133]
뉴스
防衛庁「三矢作戦」の追求ー松本清張氏から資料
朝日新聞
1987-01-28
[134]
서적
顔
双葉文庫
1995
[135]
서적
続々・推理文壇戦後史
双葉社
1980
[136]
논문
日本の探偵小説・推理小説と中国 その中国における受容と意味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06
[137]
논문
松本清張韓国語翻訳・翻案作品目録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1
[138]
논문
「歪んだ複写」:一九八〇年代台湾における松本清張の翻訳と受容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3
[139]
서적
松本清張(新潮日本文学アルバム)
新潮社
1994
[140]
웹사이트
松本清張原作のテレビドラマ一覧
[141]
영화
白と黒
[142]
영화
風の視線
[143]
서적
松本清張映像の世界 霧にかけた夢
1975-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75년으로 표기
[144]
웹사이트
松本清張 昭和の旅
https://www.nhk.jp/p[...]
NHK
2021-05-21
[145]
웹사이트
松本清張 出会いの旅路
https://www.nhk.jp/p[...]
NHK
2022-08-05
[146]
웹사이트
松本清張 ふるさと歴史シリーズ「北九州に強くなろう」
https://www.ncbank.c[...]
[147]
웹사이트
「“人生エロエロ”は清張さんの文体で書いているつもり」みうらじゅんが語る清張地獄
https://bunshun.jp/a[...]
文藝春秋
[148]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149]
서적
松本清張全集 第60巻
文藝春秋
1995-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95년으로 표기
[150]
서적
十万分の一の偶然
文春文庫
2009-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09년으로 표기
[151]
웹사이트
知られざるニコンの歴史 F3松本清張スペシャル
https://archive.fo/2[...]
[152]
간행물
松本清張全集 57巻
[153]
간행물
松本清張全集 58巻
[154]
간행물
松本清張全集 第62巻
文藝春秋
1995-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95년으로 표기
[155]
간행물
清張と小野家の人々
北九州市立松本清張記念館
2014-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14년으로 표기
[156]
뉴스
いまだ見ぬ花 - ぼくのマドンナ -
日本経済新聞
1979-05-21
[157]
서적
奇縁まんだら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08-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08년으로 표기
[158]
광고
私の選んだベストブランド
文藝春秋
1974-12-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74년 12월로 표기
[159]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2009-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09년으로 표기
[160]
간행물
小説と取材
文藝春秋
1971-07-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71년 7월로 표기
[161]
간행물
週刊 松本清張
2010-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10년으로 표기
[162]
간행물
天窓の灯
文藝春秋
1983-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83년으로 표기
[163]
뉴스
憂鬱な二週間
サンデー毎日
1964-09-15
[164]
간행물
清張さんの秘密
文藝春秋
1974-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74년으로 표기
[165]
서적
作家の食と酒と
左右社
2010-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10년으로 표기
[166]
간행물
松本清張の小説映画化の秘密
砂書房
1996-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1996년으로 표기
[167]
간행물
松本清張全集 62巻
[168]
간행물
undefined
姉妹社
[169]
간행물
undefined
朝日文庫
[170]
서적
水木しげる漫画大全集 コケカキイキイ他
講談社
[171]
웹사이트
小倉の老舗中国料理店「耕治」が68周年 記念割引セットメニュー販売
https://kokura.keiza[...]
2022-06-21
[172]
서적
松本清張と日南町 父の故郷への熱い思い
https://digital-coll[...]
2013-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13년으로 표기
[173]
서적
松本清張と山陰
https://digital-coll[...]
鳥取県交流人口拡大本部観光戦略課
2022-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어서 2022년으로 표기
[174]
웹사이트
正法寺
https://www.visitsad[...]
一般社団法人佐渡観光交流機構
[175]
문서
일본인들의 이름은 같은 한자를 쓰더라도 음독이나 훈독 또는 개인의 고유한 선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다.
[176]
문서
세이초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과 인터뷰 내용 비교
[177]
문서
심상소학교
[178]
문서
고등소학교
[179]
문서
에도시대 짐수레
[180]
문서
작품 수상 등급 조정 배경
[181]
문서
일본 게이오 대학 문예잡지
[182]
문서
추리소설 현실성 부여에 대한 세이초의 주장과 챈들러 비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