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스네스 전투
1. 개요
온달스네스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4월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영국군은 작전 준비 부족과 지휘 체계 혼란으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에 밀려 패배했고, 병력 손실과 함께 주요 지휘관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영국군은 온달스네스에서 철수했고, 이 작전 실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 전역 |
|---|---|
| 날짜 | 1940년 4월 19일 – 5월 초 |
| 장소 | 노르웨이 롬스달 온달스네스 |
| 결과 | 독일군의 승리 |
| 교전국 1 |
|---|
| 지휘관 1 | 버나드 패짓 해럴드 모건 |
|---|
| 병력 1 | 영국 148 보병 여단 약 1,500명 |
|---|---|
| 병력 2 | 알 수 없음 (중포 및 경포 지원), 3호 전차 I 또는 II, 1호 전차 IV |
| 사상자 1 | 약 1,190명 |
|---|---|
| 사상자 2 | 경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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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전역 -
오슬로피오르 교전
오슬로피오르 교전은 1940년 4월 독일 해군과 노르웨이 해군 경비정 폴 3세 간에 벌어진 전투이며, 폴 3세는 독일 함대를 발견하고 경고했으나 알바트로스에 의해 격침되고, 이 경고로 인해 드뢰바크 해협 전투에서 독일 함대가 피해를 입었다. -
노르웨이 전역 -
미츠코겐 전투
미츠코겐 전투는 1940년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미트스코겐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로, 노르웨이 왕실과 정부의 탈출 시간을 벌고 국민 사기를 높여 노르웨이 독립을 지켜낸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
1940년 노르웨이 -
베저위붕 작전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철광석 수송로 확보와 영국 해군 기지 건설 저지를 목표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베저위붕 작전은, 주요 도시 기습 점령, 해상 및 육상 전투, 노르웨이 왕실 망명, 연합군 개입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전개에 영향을 미쳤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
1940년 노르웨이 -
노르웨이 전역
노르웨이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군이 베저 작전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점령한 사건으로, 스웨덴 철광석 수송로 확보와 대서양 진출 거점 마련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 중요했다. -
1940년 4월 -
베저위붕 작전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철광석 수송로 확보와 영국 해군 기지 건설 저지를 목표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베저위붕 작전은, 주요 도시 기습 점령, 해상 및 육상 전투, 노르웨이 왕실 망명, 연합군 개입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전개에 영향을 미쳤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
1940년 4월 -
카틴 학살
카틴 학살은 1940년 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만 2천 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으로,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총살되어 카틴 숲 등에 매장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 소련의 책임이 공식 인정되어 역사적 책임과 화해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는 사건이다.
2. 배경
2.1. 영국군의 준비 부족
영국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남소스와 온달스네스 상륙 작전의 지휘관이 여러 차례 교체되었고, 결국 투입된 부대는 독일군에 비해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졌다. 제49(웨스트 라이딩) 보병 사단의 일부였던 제148 보병 여단은 준장 해롤드 모건이 지휘했다. 영토군(TA) 부대인 이 사단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에서 모집되었으며, 주로 시간제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거의 경험이 없고 미숙할 뿐만 아니라 작전에 적합한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다. 현대식 무기는 거의 없었고, 여단은 정족수 미달로, 통상적인 3개 보병 대대가 아닌 2개만 있어 장교와 병력을 합쳐 1,000명 남짓이었다.
독일군은 영국군의 내륙 진격을 막기 위해 4월 14일 돔보스 마을과 철도 분기점에 강하엽병을 투하했다.
3. 전투 경과
3.1. 영국군의 초기 작전
19일에 시작된 남부 공격에서, 모건 준장은 지휘 체계의 혼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노르웨이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부대를 분할하여 전선에 배치했다. 그의 부대는 릴레함메르에서 오슬로에서 진격하는 독일군에 맞섰다.
그러나 영국군은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강력한 박격포 공격을 받은 영국군은 후퇴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생존자들은 파베르그에서 재집결하여 다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16km 더 북쪽 트레튼으로 후퇴했다. 4월 22일 저녁, 독일군은 전차 4대의 지원을 받으며 헤이다로 진격했다.
148 여단은 300명의 병력과 9명의 장교로 줄어들었고, 모건 준장과 그의 사령부는 릴레함메르에서 포로로 잡혔다. 버나드 파겟 소장은 패배 이후 오퍼레이션 시클의 잔여 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3.2. 독일군의 공세와 영국군의 후퇴
19일에 시작된 남부 공격에서, 모건 준장은 거의 즉시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복종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할 수 있는 한 노르웨이인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두 개 대대를 분할하여 부대를 전선에 배치하여 노르웨이인을 지원했고, 그의 부대는 오슬로에서 독일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릴레함메르로 이동했다.
오슬로에서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은 준비가 부족했던 영국군에게 재앙이었다.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던 영국군은 강력한 박격포 공격에 직면했고, 노르웨이 사령관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수송 수단 부족으로 인해 148 여단 병력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에게서 탈출에 성공한 생존자들은 4월 22일 릴레함메르 북쪽 파베르그에서 재집결했다. 그들은 다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독일군은 포병 지원을 이용하여 영국군 진지를 포위하고 측면 공격하여 148 여단은 16 km 더 북쪽 트레튼으로 후퇴했다. 마지막 독일군 공격은 4월 22일 저녁에 있었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파괴할 수 없는 전차 4대의 지원을 받으며 헤이다로 밀고 들어왔고, 마침내 독일군은 그곳에서 멈췄다.
148 여단은 300명의 병력과 9명의 장교로 줄어들었고, 모건 준장과 그의 사령부는 릴레함메르에서 포로로 잡혔다.
버나드 파겟 소장은 패배 이후 오퍼레이션 시클의 잔여 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고, 5월 초, 심각한 사상자와 제공권 장악 실패 속에서 온달스네스에 있던 영국군은 철수할 때까지 헛되이 공중 지원을 받으려 노력했다.
3.3. 전투 결과
148 여단은 300명의 병력과 9명의 장교로 줄어들었고, 모건 준장과 그의 사령부는 릴레함메르에서 포로로 잡혔다. 버나드 파겟 소장은 패배 이후 오퍼레이션 시클의 잔여 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지만, 5월 초, 심각한 사상자와 제공권 장악 실패 속에서 온달스네스에 있던 영국군은 철수할 때까지 공중 지원을 받으려 노력했다.
4. 평가 및 비판
4.1. 작전 실패에 대한 비판
고든 코리건은 그의 저서 《피, 땀, 그리고 오만: 처칠 전쟁의 신화》에서 왕립 해군이 함대의 탈출 시도를 대서양으로 향하는 시도로 간주하는 "망상"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처칠이 제146 및 제148 여단을 차출한 결정을 "최고 수준의 어리석음"이라고 비판하며, 영국군이 이미 나르비크 공격에 대해 부대에 브리핑을 마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전력의 3분의 2"를 차출하려는 발상을 "헛소리"라고 칭했다. 그는 또한 장군들과 제독들이 처칠에게 훨씬 더 강력하게 반대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