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저위붕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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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저위붕 작전은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배경은 독일의 철광석 수송을 방해하려는 연합군의 움직임과,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 시도였다. 독일은 1940년 4월 9일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덴마크는 단기간에 항복했고, 노르웨이는 저항했으나 결국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은 스웨덴산 철광석 확보와 영국 해군의 봉쇄를 무력화했으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은 이 작전을 연합군의 선제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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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저위붕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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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베저위붕 작전 |
다른 명칭 | 베저 강 연습 (독일어) 베저타크 (독일어) 베저차이트 (독일어) |
전투 위치 | 덴마크, 노르웨이 |
날짜 | 1940년 4월 9일 – 1940년 6월 10일 |
결과 | 독일의 승리 |
영토 변화 | 덴마크와 노르웨이 점령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의 영국 점령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나치 독일 |
교전국 2 |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에리히 레더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레온하르트 카우피슈 에두아르트 디틀 한스 페르디난트 가이슬러 알프레트 잘베히터 |
교전국 2 지휘관 | 윌리엄 웨인 프라이어 크리스티안 라케 오토 루게 칼 구스타프 플라이셔 라스무스 하틀레달 윌리엄 보일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9개 사단 1개 포병 대대 1개 기계화 소총 여단 총 120,000명 |
교전국 2 병력 | 덴마크: 2개 사단, 약 14,500명 노르웨이: 6개 사단, 약 52,000명 덴마크 및 노르웨이 총합: 약 66,500명 연합군: 약 35,000명 총합: 약 101,500명 |
피해 규모 | |
교전국 1 피해 | 크릭스마리네: 1척의 중순양함 2척의 경순양함 10척의 구축함 다수의 U보트, 수송선 및 소형 군함 총 5,296명 사상자 |
교전국 2 피해 | 덴마크: 26명 사망, 23명 부상 노르웨이: 116척의 선박 손실, 1,700명 사망 영국 해군: 1척의 항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1척의 경순양함 7척의 구축함 1척의 잠수함 다양한 수송선 및 소형 군함 프랑스 해군: 1척의 구축함 1척의 잠수함 폴란드 해군: 1척의 구축함 1척의 잠수함 연합군: 4,902명 사상자 총합: 6,602명 사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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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39년 봄, 영국 해군은 스칸디나비아를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잠재적인 전장으로 간주했다. 영국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반복을 우려하여 지상전에 참전하는 것을 꺼렸지만, 독일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해상 봉쇄를 고려했다. 독일 산업은 스웨덴 노르란드 지방 광산에서 수입되는 철광석에 크게 의존했는데, 겨울철에는 그 상당량이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운송되었다. 노르웨이 해안을 장악하면 독일 봉쇄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1939년 12월,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 최고사령부(OKW)에 노르웨이 침공 계획 초안 작성을 명령했다.[1] 초기 계획인 '슈투디에 노르트(Studie Nord)'는 1개 사단만을 투입하는 것이었으나,[1] 이후 크리그스마리네(해군)가 참여하면서 계획이 확대되었다.[1]
1939년 12월,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원수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노르웨이에 영국군 기지가 생길 경우의 위험성과 독일군이 먼저 점령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해군은 노르웨이 점령을 통해 주변 해역을 통제하고, 향후 영국에 대한 작전을 위한 잠수함 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과 공군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히틀러는 북유럽 국가들의 중립 유지를 고려하여 침공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3]
1939년 10월,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아돌프 히틀러와 노르웨이에 연합군 기지가 설치될 경우의 위험성과 독일의 선제 점령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 점령이 주변 해역 장악과 잠수함 작전에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육군과 공군은 관심이 없었고, 히틀러는 저지대 국가들을 통한 지상 공격이 주요 공세가 될 것이라고 지시했다.
1939년 11월 말, 윈스턴 처칠은 체임벌린 전시 내각의 새 구성원으로서 윌프리드 작전을 제안, 노르웨이 해역에 기뢰를 부설하여 철광석 수송을 북해 공해로 유도하려 했다. 처칠은 이 작전이 독일의 반응을 유발하여 연합군이 R 4 계획을 실행, 노르웨이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네빌 체임벌린과 할리팩스 경은 중립국의 반발을 우려하여 이 작전을 거부했다. 1939년 11월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겨울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처칠은 다시 기뢰 부설 계획을 제안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
1939년 12월,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지원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노르웨이 북부 나르비크에 상륙하여 스웨덴 보트니아 만 연안의 루레오까지 이어지는 ''말름바난'' 철도를 장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연합군은 스웨덴 철광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계획은 체임벌린과 할리팩스의 지지를 받았지만, 독일의 경고로 인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반대에 부딪혔다. 원정 계획은 계속되었으나,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면서 명분을 잃었다.
1940년 2월, 영국 해군 구축함 코삭이 노르웨이 해역에서 독일 유조선 알트마르크호에 탑승, 영국군 포로들을 구출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영국이 노르웨이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로 간주하고 노르웨이 침공 결심을 굳혔다.
1940년 3월 12일, 영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원정군 파병을 결정했지만, 겨울 전쟁의 종식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대신 체임벌린 내각은 노르웨이 해역에 기뢰를 부설한 후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1940년 4월 5일, 윌프리드 작전이 개시되어 전함 레나운이 이끄는 영국 해군 함대가 스코틀랜드의 스카파 플로를 출발, 노르웨이 해역에 기뢰를 부설했다. 최초의 독일 함대는 1940년 4월 7일 오전 3시에 침공을 위해 출항했다. 4월 8일 베스트피오르드에 기뢰가 설치되었고, 윌프리드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날 늦게 구축함 글로웜이 독일 해군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와 구축함 2척에 의해 격침되었다. 4월 9일,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R 4 계획이 즉시 실행되었다.
3. 독일의 침공 계획
1940년 1월, '베저위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이라는 암호명이 붙여진 최종 계획이 수립되었다.[1] 이 계획은 오슬로, 베르겐, 나르비크, 트론헤임, 스타방에르, 크리스티안산 등 노르웨이 주요 도시를 기습 점령하고, 덴마크를 점령하여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했다.[1]
1940년 2월,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장군이 작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3월 1일, 히틀러는 노르웨이와 덴마크 모두를 침공하라는 새로운 지령을 발표했다.[1] 독일은 U보트 작전을 중단하고 잠수함들을 베저위붕 작전 지원에 투입했다.[1]
4. 덴마크 침공 (1940)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덴마크를 침공했다. 덴마크는 노르웨이 작전을 위한 발판이자,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이었다. 또한 발트 해 해상 접근 통제에도 중요한 위치였다.[5]
독일 대사 세실 폰 렌테-핑크는 덴마크 외무장관 피터 문치에게 독일군이 덴마크를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진입하고 있다고 통보하고, 저항 중단을 요구했다. 요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독일 공군(Luftwaffe)이 수도 코펜하겐을 폭격할 것이라고 밝혔다.[5]
독일의 요구가 전달되는 동안, 이미 최초의 독일군 진격이 이루어졌다. 3시 55분에 게드세르에서 상업 페리에 상륙한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독일 낙하산 부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올보르의 두 비행장과 스토르스트롬 다리, 마스네외 요새에 착륙했다.[5]
현지 시각 4시 20분, 독일 보병 강화 대대가 시타델의 덴마크 수비대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항구에서 독일군은 아말리엔보르 궁전으로 이동하여 덴마크 왕실을 점령했다. 침공군이 왕의 거주지에 도착했을 때, 덴마크 왕실 근위대에 경고가 발령되었고 다른 증원군이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말리엔보르 궁전에 대한 최초의 독일군 공격은 격퇴되었고, 크리스티안 10세와 그의 장관들은 덴마크 육군 사령관 프라이어 장군과 협의할 시간을 벌었다.[5]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하인켈 He 111과 도르니에 Do 17 폭격기 여러 편대가 도시 상공을 비행하며 덴마크어로 된 "OPROP!"(선언)이라는 제목의 전단을 뿌렸다. 프라이어 장군만이 계속 싸울 것을 찬성했으나, 독일 공군의 코펜하겐 폭격 위협에 직면한 크리스티안 왕과 덴마크 정부는 국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약 6시에 항복했다.[5]
5시 25분, 독일 메서슈미트 Bf 110 두 편대가 셸란섬의 뵈를뢰세 비행장을 공격하여 기관총 사격으로 덴마크 육군 항공대를 무력화시켰다. 덴마크 대공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독일 전투기들은 덴마크 항공기 10대를 파괴하고 14대를 심각하게 손상시켜 육군 항공대의 절반을 전멸시켰다.[5]
덴마크 침공은 6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덴마크의 신속한 항복은 1943년 여름까지 독특하게 관대한 덴마크 점령을 초래했고, 거의 모든 덴마크 유대인들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5. 노르웨이 침공
1940년 2월 16일, 영국 구축함 코삭이 노르웨이 영해 내에서 독일 보급함 알트마르크를 검문하고 억류되어 있던 상선 승무원들을 구출했다(알트마르크 호 사건). 이는 노르웨이의 중립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히틀러는 영국이 노르웨이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며, 노르웨이의 중립 유지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침공을 결정했다.[3]
1939년 12월 14일,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에 노르웨이 침공 계획 초안 작성을 명령했다. '노르트(Nord)'라는 명칭의 연구 계획은 육군 1개 사단만 참가하는 것이었다. 1940년 1월, OKW는 육해공군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본격적인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1940년 1월 27일, 최종 계획에 '베저 훈련 작전(Weserübung)'이라는 암호명이 붙여졌다.[3]
1940년 2월 21일,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 대장이 작전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3월 1일, OKW는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총통 지령 10a(베저 훈련 작전)을 발령하여 육해공군에 계획을 공개했다. U보트도 작전 지원에 투입하기 위해 대서양에서의 U보트 작전은 거의 중단되었다.[3]
크랑케 그룹의 원안에는 노르웨이 침공과 함께 외교적 수단으로 덴마크의 비행장을 확보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팔켄호르스트는 공군의 의견을 반영하여 덴마크에도 군사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덴마크 침공을 위해 2개 보병 사단과 제11기갑척탄병여단으로 구성된 제XVI군단이 편성되었다. 약 1,0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제X항공군단이 모든 작전을 지원할 예정이었다.[3]
4월 3일, 노르웨이 침공에 참가하는 최초의 독일군 침공 부대 함선이 독일을 출항했다. 4월 8일 새벽, 영국 해군에 의한 베스트피오르드 남쪽으로의 기뢰 부설은 완료되었지만, 구축함 글로웜이 독일 해군에 포착되어 격침되었다.[3] 같은 날, 영국과 프랑스의 노르웨이 주재 해군 무관은 노르웨이 해군에 기뢰를 부설했음을 통보했다.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대장이 이끄는 제21군단 예하 부대가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나르비크, 트론헤임, 베르겐, 스타방에르, 크리스티안산, 오슬로에 상륙하여 노르웨이를 장악하려는 작전이었다. 독일군의 계획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진주하는 것이었다.[3]
4월 8일 새벽부터 위기를 나타내는 정보가 접수되었지만, 노르웨이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4월 8일이 끝날 무렵 노르웨이 남부에 한정된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지만, 우편으로 전달될 예정이었다. 동원령의 첫날은 4월 11일이었다.[3]
노르웨이 정부는 군으로부터 독일군이 각 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4월 9일 2시경 영국 대사에게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 공사 브라우어는 4월 9일 04시 30분에 노르웨이 외무장관 코르트에게 독일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날 아침 오슬로에서 하마르로 이동했다.[3]
5. 1. 전투 서열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21군단이 노르웨이 침공을 담당했으며, 다음 부대들로 구성되었다.[3]
부대 |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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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군단 | 제69보병사단, 제163보병사단, 제181보병사단, 제196보병사단, 제214보병사단, 제3산악사단 |
독일 해군은 다음 함선을 투입했다.
그룹 | 함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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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1 | 전함 Scharnhorst|샤른호르스트영어, Gneisenau|그나이제나우영어, 구축함 10척 |
그룹 2 | 중순양함 Admiral Hipper|아드미랄 히퍼영어, 구축함 4척 |
그룹 3 | 경순양함 Köln|쾰른de, Königsberg|쾨니히스베르크de, 어뢰정, 슈넬보트 모함, S보트 |
그룹 4 | 경순양함 Karlsruhe|카를스루에de, 어뢰정, 슈넬보트 모함, S보트 |
그룹 5 | 중순양함 Blücher|블뤼허de, 장갑함 Lützow|뤼초우de, 경순양함 Emden|엠덴de, 어뢰정, 소해정(R보트) |
그룹 6 | 소해정(M보트) |
5. 2. 경과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독일군의 노르웨이 상륙 예정 시각은 독일 시간으로 5시 15분(노르웨이 시간 4시 15분)이었다.4월 8일 정오 직후,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1938)함(영국 해군 제2잠수함 전대 소속)이 릴레산드(Lillesand) 앞바다에서 독일 수송선 SS 리오데자네이루(1914)함을 격침시켰다. 하지만 이 소식은 오슬로 당국에 너무 늦게 전달되어 제한적인 경계 태세를 발령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3] 같은 날 늦은 저녁, 캄프그루페(Kampfgruppe) 5가 노르웨이 경비함 HNoMS 폴 III(Pol III)함에 발각되었다. 폴 III함은 공격을 받았고, 함장인 레이프 웰딩-올센(Leif Welding-Olsen)은 전사했다. 그 후 독일 함선들은 오슬로피오르드를 항해하여 드뢰박 해협(Drøbaksundet)에 도착했다.
4월 9일 이른 아침, 오스카르스보르그 요새의 포병들은 독일 순양함 블뤼허함에 사격을 개시했다. 요새의 포 중 두 개는 48년 된 독일제 크루프(Krupp) 사제 280mm 구경의 대포였다. 두 시간 안에, 드뢰박 해협 전투에서 블뤼허함은 침몰했고, 600~1,000명에 달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왕실과 정부는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오후 7시 6분, 5대의 노르웨이 전투기가 70~80대의 적기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출격했다. 독일 공수부대는 포르네부 오슬로 공항, 크리스티안산드 공항 케비크(Kristiansand Airport, Kjevik), 솔라 공군 기지에 상륙했다. 같은 날 오후 7시 30분 비드쿤 크비슬링의 라디오를 이용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오후 8시 30분, 노르웨이 구축함 HNoMS 에이거(Æger)(1936)함이 스타방에르(Stavanger) 외곽에서 10대의 융커스 Ju 88 폭격기에 공격받아 침몰했다.[4] 이전에 에이거함은 독일 화물선 MS 로다(Roda)(1928)함을 격침시켰다.
베르겐, 스타방에르, 에게르순드(Egersund), 크리스티안산, 아렌달, 호르텐, 트론헤임, 나르비크는 24시간 이내에 공격받고 점령당했다. 노르웨이 해안 방어함 HNoMS 노르게(Norge)함과 HNoMS 에이드스볼드(Eidsvold)함은 나르비크에서 저항하다 침몰했다. 4월 10일, 나르비크 제1차 전투가 영국 해군 구축함 5척과 독일 해군 구축함 10척의 상륙 부대 사이에서 벌어졌다. 양측 모두 구축함 2척을 잃었지만, 4월 13일 영국군 전함 HMS 워스파이트(Warspite)(03)함과 구축함 함대의 공격으로 나르비크에 갇혀 있던 나머지 독일 구축함 8척이 침몰했다.[5]
니베르그순드, 엘베룸, 온달스네스, 몰데, 크리스티안순, 스테인셰르, 남소스, 보되, 나르비크는 독일군의 폭격을 받았다. 주요 독일군 육상 작전은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진격했고, 노르웨이 군인들과 영국, 프랑스군은 난소스 전역에서 잠시 침략자들을 저지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나르비크의 육상 전투에서 칼 구스타프 플라이셔(Carl Gustav Fleischer) 장군 지휘하의 노르웨이와 연합군은 승리했다. 그 후 독일군은 그라탕겐 전투에서 노르웨이군을 제압했다. 국왕과 내각은 4월 29일 몰데에서 트롬쇠로, 연합군은 5월 1일 온달스네스에서 철수했다. 그 후 남부 노르웨이의 저항은 끝났다.
헤그라 요새는 5월 5일까지 독일군의 공격을 계속 저항했다. 하콘 7세 국왕, 올라브 5세 왕세자, 니가르드스볼드 내각은 6월 7일 영국 순양함 HMS 데번셔(Devonshire)(39)함을 타고 트롬쇠를 떠나 망명 정부를 대표했다. 노르웨이 본토의 노르웨이군은 1940년 6월 10일에 항복했다.
극 북쪽에서는 노르웨이, 프랑스, 폴란드군이 영국 해군과 왕립 공군(RAF)의 지원을 받아 나르비크의 통제권을 놓고 독일군과 싸웠다. 독일군은 5월 28일에 나르비크에서 쫓겨났지만, 유럽 대륙의 악화되는 상황으로 인해 연합군은 알파벳 작전으로 철수했고, 6월 9일 독일군은 나르비크를 재탈환했다.
5. 3. 결과
독일은 노르웨이 점령으로 스웨덴산 철광석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고, 영국 해군의 봉쇄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1] 노르웨이는 독일 점령 하에서 5년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며,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여 독일군에 저항했다.[1] 베저위붕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첫 번째 주요 승리였지만, 동시에 많은 해군 함정을 잃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1]5월 하순까지 노르웨이 북부에서는 영국, 프랑스, 캐나다, 폴란드 연합 원정군과 노르웨이군이 독일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지만, 프랑스에서 독일군이 영불군 좌익을 격파하여 영불 해협에 도달하는 상황이었다.[1] 5월 25일 연합군 파병군의 노르웨이 철수가 결정되었다.[1] 철수 작전은 6월 8일에 완료되었고, 노르웨이 정부와 왕가, 일부 노르웨이군은 영국으로 망명했다.[1] 국내에 남은 노르웨이군은 6월 10일에 항복했다.[1]
6.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 측 변호인단은 베저위붕 작전이 연합군의 침공을 막기 위한 선제공격이었다고 주장했다.[4] 독일 측은 R 4 계획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4]
그러나 재판부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이 임박한 연합군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고 판결했다.[4] 1939년 10월 3일, 뢰더 제독이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보낸 각서에서 "노르웨이에 기지를 확보하는 것"을 주제로 침공 계획을 논의했고,[4] "싸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면 군사력으로 노르웨이의 의지에 반해 기지를 확보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 점[4] 등이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참조
[1]
백과사전
marinen
http://urn.nb.no/URN[...]
Cappelen
[2]
백과사전
marinens fartøyer
http://urn.nb.no/URN[...]
Cappelen
[3]
서적
Kongens nei – 10. april 1940
Vega Forlag
2016
[4]
서적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 제목 정보 부족
[5]
웹사이트
The German occupation of Denmark
http://www.milhis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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