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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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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위안루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산시성 출신의 도교 승려로, 둔황 막고굴의 관리인을 자처하며 1900년 막고굴에서 장경동을 발견했다. 그는 장경동 발견 이후 유물 보존을 위해 노력했으나, 청나라 관리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에게 막대한 양의 고문서를 헐값에 판매했다. 이로 인해 그는 둔황 고문서 발견의 공로와 함께 유출에 대한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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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안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위안루
원어 이름王圓籙
로마자 표기Wang Yuanlu
왕위안루의 흑백 사진
왕위안루
국적중국
직업도교 사제
주요 업적둔황 문헌 발견

2. 생애

왕위안루는 산시성 출신의 떠돌이 도교 승려였다.[1]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2]

스스로 둔황 동굴 단지의 관리인을 자처했고 자칭 도교 사제였다.[3] 동굴 단지에는 중세 중국, 실크로드, 불교에 대한 5만 점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4]

1931년 모가오 굴에서 사망했다.[5]

3. 막고굴과의 인연

1900년 6월 22일 막고굴에 거주하던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는 막고굴을 보호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하여 대규모 청소를 하였다. 그날 그의 조수 양은 담뱃대로 제16동(임의로 붙인 굴의 번호) 벽을 두드리다가 공명음이 되돌아 오는 것을 듣고 도사들의 수장에게 보고했다. 그날 자정이 넘어 북쪽 복도의 벽을 깨고 내부를 조사하다가 엄청난 분량의 서적과 그림 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부는 각각 너비가 2.6m에 이르렀고, 높이 3m의 사각형 별실로 17동(장경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서는 4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11개 왕조의 유물이 있었고, 특히 16국 북송의 문화 유적들이 5만 점 이상 발견되었다. 전 왕조의 역사서와 서화, 그리고 비단 위에 그린 그림과 자수 등의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다.[8] 왕위안루는 현재 제16굴로 알려진 곳에서 조각상, 벽화, 그림을 아마추어적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동굴로 이어지는 숨겨진 문을 발견했는데, 이 동굴은 나중에 제17굴 또는 "장경동"으로 명명되었다.[6]

이 유적을 발견한 후 왕위안루는 청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 엄택(嚴澤)에게 두 점의 서화를 증거로 가지고 가서 즉각 보고했지만, 어수선한 청나라 말기의 상황에서 지방관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년 후 둔황에 새로운 지방관으로 발령을 받은 현령 왕종한(汪宗翰)은 서예에 막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왕위안루는 그가 장경동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랐으나 장경동을 방문한 후 몇 점의 서화만 가져가고 장경동을 잘 지키라는 말만 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안루는 포기하지 않고, 800리나 떨어져 있는 쑤저우(肅州, 현재 간쑤성의 주취안)까지 여행하여 준비한 두 점의 유물을 보였다. 그곳의 관리는 학자였지만, 그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경동의 보존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후 지방의 교육관이었던 예창치는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지방관 왕종한이 가져간 유물을 그의 저서 《유시》(語石)에 소개하였다. 1904년 지방 정부는 둔황에 장경동 유물을 보존하라고 명령을 하였지만, 근본적인 조치가 아니라 책임만 지우는 명령에 불과했다.[8] 그는 처음에는 고문서 보존을 위한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지역 관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7] 관리들은 운송, 보존 및 연구를 위해 동굴을 다시 봉인하도록 지시했다.[6]

따라서 오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가 1907년과 1908년에 각각 방문하였을 때는 왕위안루를 비교적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상태였다. 결국 유물들은 유럽의 학자들에게 모두 팔렸고, 유물들은 곧 어마어마하게 회자되었다.[8] 그는 또한 오렐 스타인에게 수많은 고문서를 판매했는데, 스타인은 상당히 무작위로 작품을 선택했다. 이후, 폴 펠리오는 그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구매했다. 둔황 고문서를 서양인들에게 가치의 극히 일부(1907년 £220)에 발견하고 판매하는 데 관여했기 때문에, 왕위안루는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6]

4. 장경동 발견

1900년 6월 22일 막고굴에 거주하던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는 막고굴 보호 기금을 조성하여 대규모 청소를 하였다. 그날 그의 조수 양은 제16동(임의로 붙인 굴 번호) 벽을 담뱃대로 두드리다가 공명음을 듣고 도사들의 수장에게 보고했다. 그날 자정 넘어 북쪽 복도 벽을 깨고 내부를 조사하여 엄청난 분량의 서적과 그림 등을 발견하였다.

4. 1. 발견 이후의 행적

1900년 6월 22일 막고굴에 거주하던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는 막고굴 보호 기금을 조성하여 대규모 청소를 하였다. 그 날 그의 조수 양은 제16동(임의로 붙인 굴 번호) 벽을 두드리다가 공명음을 듣고 도사들의 수장에게 보고했다. 그날 자정 넘어 북쪽 복도 벽을 깨고 내부를 조사하여 엄청난 분량의 서적과 그림 등을 발견하였다. 내부는 너비 2.6m, 높이 3m의 사각형 별실로 17동(장경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곳에서는 4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11왕조의 유물이 있었고, 특히 16국 북송의 문화 유적들이 5만 점 이상 발견되었다. 전 왕조의 역사서와 서화, 비단 위에 그린 그림과 자수 등의 유물이었다.[8] 왕위안루는 제16굴에서 조각상, 벽화, 그림을 아마추어적으로 복원하던 중 또 다른 동굴로 이어지는 숨겨진 문을 발견했는데, 이 동굴은 제17굴 또는 "장경동"으로 명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천 점의 고대 고문서를 발견했는데, 이 중 많은 수가 초기 중국 불교와 관련된 것이었다.[6]

왕위안루는 이 유적을 발견한 후 청조에서 파견한 지방관 엄택(嚴澤)에게 두 점의 서화를 증거로 보고했지만, 어수선한 청조 말기 상황에서 지방관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년 후 둔황에 새로 발령받은 현령 왕종한(汪宗翰)은 서예에 막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왕위안루는 그가 장경동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랐으나 장경동을 방문한 후 몇 점의 서화만 가져가고 장경동을 잘 지키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위안루는 포기하지 않고, 800리나 떨어져 있는 쑤저우(肅州, 현재 간쑤성의 주취안)까지 여행하여 준비한 두 점의 유물을 보였다. 그곳의 관리는 학자였지만, 유물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경동 보존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후 지방 교육관이었던 예창치는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지방관 왕종한이 가져간 유물을 그의 저서 유시(語石)에 소개하였다. 1904년 지방 정부는 둔황에 장경동 유물을 보존하라고 명령했지만, 근본적인 조치가 아니라 책임만 지우는 명령에 불과했다.[8] 왕위안루는 고문서 보존을 위한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지역 관리들에게 알렸고,[7] 관리들은 운송, 보존 및 연구를 위해 동굴을 다시 봉인하도록 지시했다.[6]

오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1907년1908년에 각각 방문하였을 때 왕위안루를 비교적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결국 유물들은 유럽 학자들에게 모두 팔렸고, 곧 엄청나게 회자되었다.[8] 그는 또한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에게 수많은 고문서를 판매했는데, 스타인은 상당히 무작위로 작품을 선택했다. 이후, 폴 펠리오는 그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구매했다. 둔황 고문서를 서양인들에게 가치의 극히 일부(1907년 £220)에 발견하고 판매하는 데 관여했기 때문에, 왕위안루는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6]

5. 장경동 유물 판매와 논란

1900년 6월 22일 막고굴을 청소하던 왕위안루와 그의 조수는 제16동(임의로 붙인 굴의 번호) 벽에서 공명음을 듣고, 벽 내부에서 엄청난 양의 서적과 그림 등을 발견했다. 이 곳은 제17동(장경동)으로, 4세기에서 11세기까지 11개 왕조의 유물 5만 점 이상이 있었다.[8] 특히 16국 북송의 문화 유적이 많았다.

왕위안루는 이 발견을 청나라 지방관 엄택(嚴澤)에게 보고했으나, 당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관심을 받지 못했다. 3년 후 부임한 현령 왕종한(汪宗翰)은 서예에 관심이 많았지만, 장경동에서 몇 점의 서화만 가져가고 잘 지키라는 말만 남겼다. 왕위안루는 쑤저우(肅州, 현재 간쑤성의 주취안)의 관리에게까지 유물을 보였으나,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04년 지방 정부는 장경동 유물 보존 명령을 내렸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없었다.[8]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1908년에 오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가 각각 방문했을 때, 왕위안루는 비교적 쉽게 설득되어 유물을 판매하게 되었다. 스타인은 무작위로 작품을 선택하여 구매했고,[6] 펠리오는 그중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구매했다.[6] 이 유물들은 유럽 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8] 왕위안루는 둔황 고문서를 서양인들에게 매우 싼 값(1907년 £220)에 판매한 것에 대해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6]

참조

[1] 웹사이트 IDP Chinese Collections http://idp.bl.uk/pag[...] 2010-12-11
[2] 서적 Encyclopedia of ancient Asian civilizations Facts On File 2008
[3] 문서 Tun-huang Literature
[4] 웹사이트 Abbot Wang Yuanlu of Dunhuang: Villain or...? https://thechinaproj[...] 2021-06-23
[5] 간행물 Aurel Stein's Dealings with Wang Yuanlu and Chinese Officials in Dunhuang in 1907 https://research.bri[...] 2019-12-28
[6] 서적 The Man Who Loved China: The Fantastic Story of the Eccentric Scientist Who Unlocked the Mysteries of the Middle Kingdom HarperCollins 2009-04-28
[7] 웹사이트 Sacred Texts: Ashem Vohu http://www.bl.uk/onl[...] British Library 2010-11-24
[8] 웹인용 Idp Chinese Collections http://idp.bl.uk/pag[...] 200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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