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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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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펠리오는 1878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중국학자이다. 소르본 대학교와 국립 동양 언어 문화 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했으며, 프랑스 극동 학교 연구 학자, 중국어 교수를 거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재직했다. 1908년 둔황 막고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한 다수의 고문서를 발견하여 동양학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1945년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파리 기메 미술관에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폴 펠리오는 1878년 5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외교관이 되려고 했다.[1] 소르본 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국립 동양 언어 문화 학교(INALCO)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1] 펠리오는 재능 있는 학생이어서 3년 과정의 중국어 과정을 2년 만에 마쳤다.[1] 그의 빠른 진전과 업적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중국학 교수 에두아르 샤반의 주목을 받았고, 샤반은 펠리오와 친구가 되어 그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샤반은 펠리오를 콜레주의 산스크리트어 교수 실뱅 레비에게 소개했다.[1] 펠리오는 두 사람에게서 배우며 외교관 대신 학자로서의 경력을 쌓도록 권유받았다.[1]

1900년 초, 펠리오는 하노이로 이주하여 프랑스 극동 학교(EFEO)에서 연구 학자 직책을 맡았다.[1] 그해 2월, 학교 도서관에 소장할 중국 책을 찾기 위해 베이징으로 파견되었다.[1] 1900년 7월과 8월 사이, 의화단 운동 동안 외국 공사관 포위에 휩쓸렸다.[1] 일시적인 휴전 기간에 반군 본부로 단독 돌입, 대담함과 유창한 중국어를 사용하여 포위자들에게 감명을 주어 공사관 내 사람들을 위한 신선한 과일을 얻어냈다.[1] 포위 기간 동안의 행동과 전투 중 적의 깃발을 획득한 공로로 하노이로 돌아온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1] 1901년, 23세의 나이로 EFEO의 중국어 교수가 되었다.

3. 중앙아시아 탐험

1906년 6월 17일, 펠리오는 군의관 루이 바일란(Louis Vaillant)과 사진사 샤를 누에트(Charles Nouette)와 함께 파리를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섰다. 이들은 철도를 이용하여 모스크바타슈켄트(Tashkent)를 거쳐 러시아를 경유하여, 청나라 영토였던 신장(Xinjiang, 중국령 투르키스탄)으로 들어갔다. 탐험대는 1906년 8월 말에 카슈가르(Kashgar)에 도착하여 러시아 총영사관에 머물렀다. 펠리오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청나라 관헌들을 놀라게 했으며, 탐험 준비에 여러 편의를 제공받았다.

카슈가르를 떠난 탐험대는 툼슈크(Tumxuk)를 거쳐 쿠차(Kucha)로 이동했다. 쿠차에서는 브라흐미 문자와 비슷한 문자로 쓰인, 잃어버린 언어(후에 토하라어 B 방언 쿠차어라고 불림)로 된 문서를 발견했다. 이 문서는 훗날 펠리오의 스승인 실뱅 레비에 의해 해독되었다.

탐험대는 우루무치(Ürümqi)에 체류하면서 의화단 운동의 지도자였던 란 공작을 만났다. 펠리오는 란 공작으로부터 둔황에서 발견된 필사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둔황으로 향했다.

둔황 막고굴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이 1907년에 방문하여 1만 점의 고문서를 가져갔지만, 아직 남아있는 문서도 많았다. 펠리오는 막고굴을 지키던 왕위안루(왕원록)와 협상하여 장경동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펠리오 탐험 경로



3. 1. 둔황 막고굴 탐험

1908년 2월 12일, 펠리오는 둔황 막고굴에 도착했다. 그는 왕위안루(왕원록)를 설득하여 장경동에 접근, 대량의 고문서를 조사할 수 있었다. 펠리오는 중국어, 몽골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하여, 둔황 문서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8] 3주간의 조사 끝에, 펠리오는 왕위안루로부터 상당량의 문서를 구매했다. 왕위안루는 사원 보전에 예산이 필요했으므로, 90GBP를 받고 막대한 분량을 팔았다.[8] 이 과정에서 펠리오는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4. 귀환 및 논란

1909년 10월 24일, 펠리오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동료인 에두아르 샤반 등으로부터 공금 횡령 및 문서 위조 혐의로 비난받았다.[9] 펠리오는 둔황에서 발견한 가장 가치 있는 문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작성하여 유럽으로 보냈는데, 이 보고서에는 많은 필사본의 전기적, 텍스트 데이터가 포함되어 있었고, 정확한 날짜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이 놀라운 지적 능력 때문에, 펠리오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모든 필사본을 위조하고 참고서가 가득한 도서관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믿었다.[9]

이러한 비난은 1912년 아우렐 스타인의 저서 《사막 카타이의 폐허》 출간으로 해소되었다. 스타인은 자신의 저서에서 펠리오가 둔황 방문 후에도 많은 문서를 남겨두었다고 증언하여 펠리오의 결백을 입증했다.[9]

1911년, 콜레주 드 프랑스는 펠리오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여 그를 교수로 임명하고, 그를 위해 중앙아시아 언어, 역사, 고고학 강좌를 개설했다.

5. 이후 활동 및 평가

1912년 아우렐 스타인의 저서 출간으로 펠리오의 둔황 문서 관련 혐의는 허위로 입증되었다. 스타인은 자신의 책에서 펠리오가 둔황 방문 후에도 필사본을 남겨두었다고 밝혀, 펠리오의 결백을 뒷받침했다.[9]

1911년, 펠리오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중앙아시아 언어, 역사, 고고학 강좌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강좌는 펠리오만을 위해 특별히 개설된 것으로, 펠리오 사후에는 채워지지 않았다. 1920년부터 1942년까지 펠리오는 앙리 코르디에와 함께 저명한 중국학 저널인 《퉁바오》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1924년 코르디에 사망 후, 1932년 J. J. L. 데위벤다크가 합류할 때까지 펠리오는 혼자서 《퉁바오》를 편집했다.

펠리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베이징에서 프랑스 무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그가 없으면 중국학은 고아와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리의 기메 미술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전시관이 있다.

6. 주요 저작

7. 한국과의 관계

폴 펠리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굴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여 한국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1]

참조

[1] 데이터베이스 recipient database http://www.culture.g[...] Legion d'honneur
[2] 인용
[3] 인용
[4] 서적 Trois Ans dans la haute Asie : vol.1 / Page 13 (Color Image) http://dsr.nii.ac.jp[...] 1909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웹사이트 100, 75, 50 Years Ago https://www.nytimes.[...] 20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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