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령
1. 개요
왕유령은 1810년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어난 청나라 말기의 관료이다. 거인에 합격했으나 진사가 되지 못했고, 호설암의 후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자계, 정해, 은, 인화의 현령을 역임했다. 1855년 항주지부에 발탁되었으며, 재능을 인정받아 강소안찰사, 포정사를 거쳤다. 항주지부 시절에는 호설암을 지원하여 부강전장 설립을 도왔다. 1860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함락시키자 절강순무가 되었고, 항주를 탈환했으나, 1861년 이수성의 공격으로 항주가 포위되자 자결했다. 사후 장민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 이름 | 왕유령 |
|---|---|
| 로마자 표기 | Wang Youling |
| 출생 | 1804년 |
| 사망 | 1861년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주요 직책 | 절강 순무 |
|---|
| 임기 시작 | 1860년 |
|---|---|
| 임기 종료 | 1861년 |
| 이전 | 뤄줴뎬 |
| 다음 | 쭤쭝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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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저우시 출신 -
오청원
중국 출신 바둑 기사 오청원은 20세기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신포석 창안, 십번기 압승, 본인방 슈사이와의 명승부 등 바둑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이론과 철학은 현대 바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푸저우시 출신 -
임칙서
임칙서는 청나라 후기의 관리이자 학자로, 아편전쟁 당시 아편 밀수 근절을 위해 노력했으며, 흠차대신으로 아편을 폐기하는 강경책을 펼쳤고, 서구 문물 연구에도 기여하여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1861년 사망 -
함풍제
함풍제는 도광제의 아들이자 청나라의 제9대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태평천국의 난과 제2차 아편 전쟁 등의 혼란을 겪으며 러시아와 영국에 영토를 할양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붕어 후에는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
1861년 사망 -
헨리 그레이
헨리 그레이는 영국의 해부학자이자 의사로, 『그레이 해부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섬세한 해부학적 묘사와 정교한 삽화로 의학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34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
청나라 사람 -
주문모
청나라 출신 가톨릭 신부 주문모는 1794년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초기 조선 천주교회 성장에 기여하여 2014년 시복되었다. -
청나라 사람 -
원매 (청나라)
원매는 청나라 중기의 시인이자 미식가, 수필가로 자연의 성정을 중시하는 성령설을 주창하여 새로운 시풍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은거 생활을 하며 수원식단, 자불어, 수원시화 등 다양한 저술을 남기고 여성 문학을 옹호하며 여제자들을 길러내는 등 진보적이면서도 데카당스적인 면모를 보였다.
2. 생애
왕유령은 호설암의 출자로 절강염대사 관직을 샀다. 항주지부 시절 호설암을 돕기 위해 부강전장 설립에 막대한 지원을 했으며, 연수국(捐輸局)을 설치하여 자금 관리와 식량 운반을 맡겼다. 호설암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1860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함락시키자 절강순무 나준전은 자결했다. 하계청은 왕유령을 절강순무 후임으로 추천했고, 함풍제는 왕유령에게 신속하게 항주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왕유령은 복건 관군을 이끌고 태평천국군을 물리치고 항주를 회복했다.
같은 해 태평천국군 10만이 휘주에서 절강으로 침입해 엄주를 함락시키고 항주에 육박했지만, 장군 서창과 함께 이를 격퇴하고 엄주를 탈환했다.
2.1. 초기 생애
왕유령은 1810년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어났다. 거인이 되었지만 진사는 되지 못했다. 호설암의 출자로 절강염대사 관직을 샀다. 이후 자계, 정해, 은, 인화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백성들에게 평판이 좋아 1855년 항주지부로 발탁되어 절강순무 하계청(何桂清)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계청이 양강총독에 취임하면서 강소안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포정사로 발탁되었다. 왕유령은 재화에 밝았고 하계청의 신뢰를 받았다.
2.2. 관직 생활
자계, 정해, 은, 인화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백성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1855년 항주지부에 발탁되어 절강순무 하계청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계청이 양강총독에 취임하면서 강소안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포정사로 승진했다. 왕유령은 재정에 밝아 하계청의 신임을 받았다.
항주지부 시절 호설암을 도와 부강전장 설립을 지원했다. 호설암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왕유령은 연수국(捐輸局)을 설치하여 자금 관리와 식량 운반을 호설암에게 맡겼다.
2.3. 태평천국의 난과 항주 전투
1860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함락시키자, 절강순무 나준전은 자결했다. 하계청은 왕유령을 절강순무 후임으로 추천했고, 함풍제는 왕유령에게 신속하게 항주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왕유령은 복건 관군을 이끌고 태평천국군을 물리치고 항주를 회복했다.
같은 해, 태평천국군 10만이 휘주에서 절강으로 침입해 엄주를 함락시키고 항주에 육박했지만, 왕유령은 장군 서창과 함께 이를 격퇴하고 엄주를 탈환했다.
1861년 10월, 소산, 제기, 소흥이 함락되면서 식량 보급이 끊겼다. 왕유령은 이원도를 안찰사로 임명하고 상군 8천 명의 원군을 요청했지만, 원군은 용유현에서 막혀 도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