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직
1. 개요
우문직은 북주의 인물로, 우문호와는 가까운 관계였으나 진나라에 패배한 후 관계가 틀어졌다. 우문옹의 지시로 572년 우문호 주살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대사도에 임명되고 위왕으로 봉해졌다. 이후 우문헌을 모함하는 등 조정 내 분란을 일으키고, 우문옹에게 앙심을 품다가 574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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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의 사도 -
후막진숭
후막진숭은 북위 말 혼란기에 두각을 나타내어 서위 건국에 공헌하고 북주에서 요직을 역임했으나 우문호의 몰락을 예측했다가 자결한 군인이자 관료이며, 그의 활약은 주서와 북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
574년 사망 -
교황 요한 3세
교황 요한 3세는 561년부터 574년까지 재임한 61대 교황으로, 동로마 제국의 무관심과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교회를 이끌며 나폴리 방문과 카타콤 은신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574년 사망 -
코날 막 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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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의 사공 -
후막진숭
후막진숭은 북위 말 혼란기에 두각을 나타내어 서위 건국에 공헌하고 북주에서 요직을 역임했으나 우문호의 몰락을 예측했다가 자결한 군인이자 관료이며, 그의 활약은 주서와 북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
북주의 사공 -
양충 (북주)
양충은 남북조 시대 서위와 북주의 장군이자 수나라를 건국한 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로, 북위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서위와 북주를 거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북주 건국 후 원수로 임명되었고, 사후 아들 양견에 의해 무원황제로 추존되었다.
2. 생애
우문직은 북주의 권력자로, 사촌 형인 우문호와 처음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관직을 잃은 후 우문호를 증오하게 되었다. 572년, 우문옹의 지시로 우문신거, 왕궤, 우문효백 등과 함께 우문호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대사도에 임명되었으며 위공에서 위왕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우문헌을 모함하고, 우문옹에게 벌을 받는 등 문제를 일으켜 우문옹의 분노를 샀다. 574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서민으로 강등된 후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들 또한 모두 처형되어 가문이 몰락했다.
2.1. 초기 생애와 우문호와의 관계
우문호와는 초기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남조 진을 공격했을 때 패배하여 관직을 박탈당한 이후 우문호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무제에게 우문호 주살 계획을 제안했고, 무제는 우문직과 우문신거, 왕궤, 우문효백 등과 함께 은밀한 모의를 꾸몄다. 이는 572년 우문호 암살로 결실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문직은, 『주고(酒誥)』를 읽는 도중에 뒤에서 무제가 홀(笏)로 때려 기절한 우문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공로로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으며, 위공(衛公)에서 위왕(衛王)으로 승진하였다.
2.2. 우문호 주살
우문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진(陳)에게 패한 뒤 우문직의 관직이 박탈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에 우문직은 우문옹의 지시로 572년 우문신거, 왕궤, 우문효백 등과 함께 우문호를 주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문직은 『주고(酒誥)』를 읽는 도중에 뒤에서 우문옹이 홀(笏)로 때려 기절한 우문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공으로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으며, 위공(衛公)에서 위왕(衛王)으로 승진하였다.
2.3. 조정 내 분란과 우문옹과의 갈등
우문호(宇文護)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진(陳)에게 패한 뒤 우문직의 관직이 박탈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에 우문직은 우문옹(宇文邕)의 지시로 572년 우문신거(宇文神擧), 왕궤(王軌), 우문효백(宇文孝伯) 등과 함께 우문호를 주살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으며, 위공(衛公)에서 위왕(衛王)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우문헌(宇文憲)을 시기해 모함을 하는 등 조정 내 분란을 일으켰으며, 우문옹과 함께 사냥을 하던 도중 만행을 부려 우문옹에게 벌을 받은 것으로 인해 우문옹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574년 우문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되었으며, 서민으로 강등된 뒤 별궁에 감금되었다가 살해당했다.
2.4. 몰수된 저택
무제가 동궁(東宮)으로 우문직의 저택을 몰수한 대신, 대체할 저택을 우문직에게 고르게 했다. 조건에 맞는 물건이 없어서 척기사(陟屺寺)를 원하자 누군가가 "경에게는 자식이 많은데, 저 절은 너무 좁지 않겠소?"라고 묻자 "제 몸 하나도 수용할 수 없는데, 자손의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5. 반란과 죽음
우문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진(陳)에게 패한 뒤 우문직의 관직이 박탈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에 우문직은 우문옹의 지시로 572년 우문신거, 왕궤, 우문효백 등과 함께 우문호를 주살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으며, 위공(衛公)에서 위왕(衛王)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우문헌을 시기해 모함을 하는 등 조정 내 분란을 일으켰으며, 우문옹과 함께 사냥을 하던 도중 만행을 부려 우문옹에게 벌을 받은 것으로 인해 우문옹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574년 우문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되었으며, 서민으로 강등된 뒤 별궁에 감금되었다가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우문하, 우문빈(우문락생의 아들 우문보제의 양자), 우문새, 우문가, 우문향, 우문비, 우문진, 우문건리, 우문건조, 우문건종 또한 주살되었고, 우문직의 혈통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