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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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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는 남북조 시대 남조의 마지막 왕조로, 557년 진패선이 건국하여 589년 수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건국 초기에는 북주의 압박으로 영토가 축소되었으나, 문제와 선제의 치세 동안 내정을 안정시키고 북제와의 대립 속에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주 시대에 이르러 사치와 향락으로 국력이 쇠퇴하며 수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진나라는 문화적으로는 육조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학, 예술, 불교 등에서 발전을 이루었으며, 신라와 교류하며 불교 경전을 전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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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남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진나라 지도
진나라와 년 주요 아시아 국가들
572년의 행정 구역
572년의 행정 구역
기본 정보
국명진(陳)
일반 명칭진 왕조
공용어중국어
수도건강
정부 형태군주제
건국일557년 11월 16일
멸망일589년 2월 10일
멸망 후 사건진숙보 사망
멸망 후 사건 날짜604년 12월 16일
선대 국가양나라
후대 국가수나라
통화중국 동전, 중국 전
현재 국가중국
베트남
역대 황제
황제무제
재위 기간557년–559년
황제문제
재위 기간559년–566년
황제폐제
재위 기간566년–568년
황제선제
재위 기간569년–582년
황제후주
재위 기간582년–589년

2. 역사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은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후경의 난 진압 과정에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양 원제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북제와 손잡은 동료 왕승변을 제거하고 경제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진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한수 유역과 익주 일대를 서위의 뒤를 이은 북주에게 빼앗기는 등, 양나라 시절에 비해 영토가 크게 줄어들어 남조 왕조 중 국력이 가장 약했다. 장강 중하류를 경계로 북조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진패선이 왕승변의 잔당과 강남 토호들의 반란을 평정하던 중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문제(진천)가 제위를 계승했다. 문제는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 북제, 후량 등 북방 세력과 대치하면서도 내정에 힘써 국가를 안정시켰다.

문제의 아들 폐제 시기에는 북주 및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곧 숙부인 선제(진욱)가 실권을 잡고 폐제를 폐위시킨 뒤 직접 황위에 올랐다. 선제는 국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575년 명장 오명철을 동원해 북제를 공격하여 숙적 왕림을 제거하고 회남 지역을 차지하며 잠시 장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제를 병합한 북주가 곧 반격에 나섰고, 이후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수 문제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남정을 계획했다. 당시 진나라는 후주(진숙보)가 즉위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결국 수나라양광이 총지휘하는 대규모 군대가 장강을 넘어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면서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로써 약 400년간 이어진 위진남북조시대의 분열이 끝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정치적으로 진나라는 후경의 난을 거치며 기존 남조의 귀족제가 상당 부분 해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문제중서통사사인(中書通事舍人) 채경력과 같이 신분이 낮은 가문(한문, 寒門) 출신 인물들이 군주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후주 역시 시문경, 심객경 등 한문 출신 측근들을 중용하는 반면, 노광달, 소마하, 임충과 같은 주요 무장들을 멀리하면서 문관과 무관 세력의 균형이 무너져 국가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후주 시대에 문학이 융성하여 강총, 서릉 등의 문인이 활동했으며, 불교 역시 문무 관료들 사이에서 신앙되었다. 멸망 당시 진나라의 호구는 50만, 인구는 200만 명 정도였다. 진나라의 문화는 육조 문화의 맥을 이었으며, 이후 수나라당나라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진나라는 신라와 교류하기도 했다. 565년에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에 보내 불교 경전 1,700여 권을 전달했으며,[14] 이후 566년부터 571년까지 신라는 여러 차례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15][16][17][18][19]

2. 1. 건국

양나라 말기, 후경의 난으로 인해 국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 속에서 양나라의 장군이었던 진패선(陳霸先)은 후경의 난 진압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진패선은 555년 9월, 당시 실권자였던 왕승변을 제거하고 건강을 장악했으며, 양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로 내세워 양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557년 10월, 진패선은 양 경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에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인 '''진(陳)'''을 건국했다. 이로써 양나라는 멸망하였다. 진패선은 무제(武帝)로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영정(永定)으로 정했다. 국호 '진'은 진패선이 이전에 양나라로부터 진왕(陳王)에 봉해졌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건국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후경의 난과 양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익주는 이미 북주에 넘어간 상태였다. 또한 북주의 지원을 받은 후량(서량)이 강릉을 중심으로 독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영주 등지에서는 양나라 부흥을 꾀하는 잔존 세력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이전 양나라의 영토를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북쪽으로는 북제북주가 진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4]

2. 1. 1. 베트남 방면

541년, 량나라 말기 교주(현재 베트남 북부)에서 이본(Lý Bôn)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소영(蕭衍)은 장군 손종(孫冏)과 노자웅(盧子雄)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542년 봄, 이본은 양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양나라 장수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발생했다.[4]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진백선(陳霸先)이 파견되었다. 진백선은 손종과 노자웅 등을 제압하고 두천하(杜天和)를 죽였으며, 두승명(杜僧明)과 주(周)를 사로잡았다. 진백선은 두승명과 주를 유능한 장수로 판단하여 석방하고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이 공로로 양무제는 진백선을 신안백(新安伯)으로 봉하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4]

544년 1월, 이본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만춘(Vạn Xuân)이라 하였다. 같은 해 겨울, 양무제가 사망한 후 진백선은 교주의 새로운 자사 양표(楊瞟) 등과 함께 이본을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545년 봄, 진백선은 양표의 부장으로서 이본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이본은 산으로 도망쳐 유격전을 벌이다가 548년에 병으로 사망했다.[4]

이본의 뒤를 이은 동생 이천보(Lý Thiên Bảo)가 애주(愛州, 현재 베트남 탕화성 부근)를 공격했으나, 진백선은 이마저 격퇴했다. 이후 양무제는 진백선을 고요군(高要, 현재 중국 조칭 광둥성) 태수 및 인근 지역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베트남 방면에서의 그의 역할은 일단락되었다.[4]

진(陳)의 무제

2. 1. 2. 후경의 난 진압과 북제와의 대립

진패선후경의 난 진압 과정에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양 원제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난이 진압된 후, 554년 서위가 강릉(후베이성)을 공격하자 원제는 당시 수도 건강(도시)을 지키던 진패선 대신 왕승변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강릉은 함락되고 원제는 살해되었다.

이후 왕승변과 진패선은 원제의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인 양 경제 소방지를 받들어 555년 봄 건강으로 데려와 황제로 옹립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때 북제의 문선제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포로로 잡고 있던 양나라 황족 소연명을 군대를 동원해 양나라의 황제로 삼으려 했다. 왕승변은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으나 북제군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자, 소방지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조건 하에 소연명을 황제로 받아들였다. 555년 여름, 소연명은 건강에서 즉위하고 소방지를 황태자로 책봉했으며, 왕승변과 진패선은 계속 군사권을 장악했다.

진패선은 소연명이 황제가 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왕승변은 진패선의 불만을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했고 왕승변의 아들과 진패선의 딸이 혼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에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555년 가을, 진패선은 북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이용해 왕승변을 방심시킨 뒤, 수도 건강을 기습하여 왕승변을 살해했다. 진패선은 즉시 소연명을 폐위하고 양 경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진패선이 양나라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북제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북제의 지원을 받은 서사휘(徐嗣徽)와 임약(任約) 등이 건강을 기습 공격했으나 진패선의 부장 후안두에게 격퇴당했다. 이후 진패선은 왕승변의 잔당과 지방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북제와의 대결을 이어갔다. 진패선은 북제가 점령하고 있던 석두성을 포위 공격했고, 북제는 화친을 제의하며 인질을 요구했다. 진패선은 회의적이었지만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조카 진담랑(陳曇朗), 원제의 손자 소장(蕭莊), 핵심 관료 왕충의 아들 왕민(王珉) 등을 인질로 보내고 북제군의 철수를 허용했다. 서사휘와 임약도 북제군과 함께 철수했다.

556년 봄까지 왕승변의 잔당과 두릉(杜稜) 등 지방 세력의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다. 556년 여름, 북제군은 다시 건강을 공격했지만, 진패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결국 패퇴했다. 진패선은 이 전투에서 서사휘를 죽이고 여러 북제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진패선은 양나라 조정 내 최대 경쟁자였던 왕승변 세력을 제거하고 외부 위협이었던 북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남조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후 진패선은 장성후(長城侯)에서 시작하여 장성공(長城公), 의흥공(義興公), 진공(陳公), 진왕(陳王)으로 계속 승진하며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5][4]

2. 2. 안정기 (문제, 선제)

559년 문제(진천)가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문제 즉위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양나라 때에 비해 크게 줄어 있었고, 한수 유역과 익주 일대는 북주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문제는 북제의 침공을 격퇴하고, 왕승변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장강 중류 상주에서 영가왕 소장을 황제로 내세웠던 왕림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또한 임천군의 주적(周迪), 예장군의 웅담랑(熊曇朗), 동양군의 유이(留異), 건안군의 진보응(陳宝応) 등 각지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제국 내 분리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내부 안정을 다졌다.

당나라 시대 염립본이 그린 문제의 초상화.


문제는 내정에 힘쓰며 감세와 검약을 실천하여 민심을 얻고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성장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으며, 세심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매일 밤 긴급 보고서를 검토하고, 경비병 교대 소리로 스스로를 깨울 정도로 국정에 몰두하여 진나라의 영토를 공고히 하고 경제 회복과 번영에 기여하였다.[4]진서』에서 사관 요사련은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시조[문제]는 어려운 시기에 성장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다. 그는 세심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매일 밤 시종들에게 침실 문을 열어두고 긴급 보고서를 가져오게 하여 검토했으며, 경비병들에게는 교대 시 돌계단에 교대패를 던져 그 소리로 자신을 깨우도록 명했다.”[4]

문제는 장황후를 황태후로 높이고, 부인 신묘롱 황후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아들 진보종을 황태자로 삼았다.

566년 문제가 사망하자 아들 폐제(진보종)가 뒤를 이었으나, 568년 숙부인 선제(진욱)에게 폐위되고 선제가 제4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선제는 즉위 초 문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절검과 감세 등 민생 안정에 힘쓰는 한편, 군사력을 강화했다.

북제가 약화된 틈을 타 575년 명장 오명철을 보내 북제를 공격하여 숙적 왕림을 제거하고 회수 이남, 장강 이북의 땅(회남)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577년 북제를 병합한 북주가 반격에 나서자 578년 진나라는 패배하여 회수 이남 지역을 다시 상실하였다. 이로써 선제의 북벌은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고, 진나라는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2. 3. 쇠퇴와 멸망

문제의 아들 임해왕 때 북주·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실권을 장악한 숙부 진욱이 폐제를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에 올랐다(제4대 선제).[4] 선제는 569년 즉위하여, 류징옌(柳敬言)을 황후로, 아들 진숙보(陳叔寶)를 황태자로 책봉했다.[4]

선제


선제는 573년 명장 오명철을 시켜 북제를 공격하게 했다. 오명철은 빠르게 승리하여 장강과 회하 사이의 영토 대부분을 확보하고, 573년 가을에는 북제의 중요 도시인 수양(현재 안후이성 루안시)을 함락시키고 숙적 왕림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로써 진나라는 장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혔다.[4]

그러나 576년 북주 무제북제를 공격하여 577년 멸망시키고 북제의 영토 대부분을 병합했다.[4] 선제는 북주가 혼란한 틈을 타 북제 영토 일부를 차지하려 했으나, 577년 겨울 팽성(현재 장쑤성 쉬저우시)을 공격하던 오명철은 578년 봄 북주 장군 왕궤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혔다.[4] 이후 579년 북주 선제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양자강 북쪽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다.[4]

581년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정변을 일으켜 수나라를 건국했다(수 문제). 수 문제는 즉시 남쪽의 진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4]

582년 선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진숙보가 후주로 즉위했다. 즉위 과정에서 동생 진숙릉의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4]

후주


후주는 즉위 초 수 문제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듯했으나, 곧 사치스러운 생활에 몰두했다. 특히 임춘각, 결기각, 왕선각 등 호화로운 전각을 짓고 매일 연회를 열었으며, 총애하는 후궁 장귀비와 공귀비, 그리고 시문경, 심객경과 같은 측근 및 간신들에게 국정을 맡겨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4] 장귀비는 후주의 무릎에 앉아 상소문을 처리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고, 세금이 인상되고 군 지휘권이 문관에게 넘어가면서 군인과 관리들의 불만이 커졌다.[4] 유능한 장군이었던 노광달, 소마하, 임충 등은 멀리하여 문무(文武)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러한 실정으로 진(陳)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588년 겨울, 수 문제는 아들 진왕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진나라를 침공했다. 양광은 고경의 보좌를 받았고, 하약필과 한금호 등이 선봉에 섰다.[4] 수나라 군대는 양자강 상류와 하류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으나, 시문경 등 측근들은 수나라의 침공 사실과 심각성을 후주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4]

589년 봄, 하약필과 한금호가 이끄는 수나라 군대는 양자강을 건너 수도 건강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후주는 당황하여 제대로 된 저항을 지휘하지 못했다.[4] 장군 소마하가 분전했으나 하약필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혔다.[4] 수도가 함락되자 후주는 장귀비, 공귀비와 함께 궁궐의 우물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수나라 군대에 체포되었다.[4] 수나라 장군 고경은 진나라 멸망의 책임을 물어 장려화를 처형했다.[4] 후주는 수나라 군대의 요청에 따라 아직 저항하던 진나라 장군들에게 항복을 명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로써 진나라는 589년에 완전히 멸망했다.[4] 진나라의 멸망으로 약 400년간 지속된 위진남북조 시대는 종결되고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멸망 당시 진나라의 호구는 50만, 인구는 200만 명이었다. 후주는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를 망친 군주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 때문에 수 문제의 경계를 덜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황족 및 관료들과 함께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어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 진나라 출신 인사 중 일부는 수나라와 이후 당나라 조정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4][7][8] 진나라의 문화, 특히 육조 문화는 수나라와 당나라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3. 정치



진 선제는 류징옌과 혼인하여 아들 진숙보를 낳았다. 정확한 이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선제는 한 달 이상 즉위를 미루다가 569년 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장황태후를 황태후로 추존하고, 문제의 황후였던 심씨는 문황후로 칭하게 했다. 자신의 부인 류씨를 황후로, 아들 진숙보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문제의 아들들은 왕자로서 존중받고 주요 관직을 유지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제한적이었다.

569년 가을, 선제는 광저우 총독 오양걸(歐陽紇)의 반란 가능성을 의심하여 수도 건강으로 소환했다. 오양걸 역시 선제의 의도를 의심하고 소환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제는 서검(徐儉)을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장군 장조달(章昭達)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570년 봄, 장조달은 오양걸을 사로잡아 건강으로 압송했고, 오양걸은 참수되었다. 이 승리에 힘입어 장조달은 서량의 수도 강릉을 공격했으나, 초기 우세에도 불구하고 북주 장군 육등(陸騰)에게 패배하여 철수했다. 이 전투에도 불구하고 진과 북주는 이후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신을 교환하고 북제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573년 봄, 선제는 서릉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장군들 중 유일하게 북제 공격을 지지했던 오명철(吳明徹)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배기(裴忌)와 황파곡(黃法渠)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오명철의 군대는 북제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며 573년 여름까지 양자강과 회하 사이의 영토 대부분을 확보했다. 같은 해 가을, 오명철은 북제의 중요 거점인 수양(현재의 안후이성 루안시)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을 지키던 북제 장군이자 과거 양나라의 장수였던 왕림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로써 양자강과 회하 사이의 전 지역이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선제는 크게 기뻐하며 성대한 의식을 열어 오명철에게 각종 영예를 수여했다. 또한 왕림의 목을 건강 성문에 효수했으나, 주양(朱瑒)이 왕림은 양나라에 충성했던 인물이니 예우해야 한다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여 시신을 정중히 매장하도록 했다. 이후 몇 년간 진은 북제를 상대로 소규모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규모 공세는 펼치지 않았다.

576년 겨울, 북주 무제가 대대적으로 북제를 공격하여 제2의 수도였던 진양(타이위안시)과 수도 업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곧이어 북제 황제 고위를 사로잡고 577년 봄까지 북제 영토 대부분을 병합했다.

선제는 북주가 승리한 혼란을 틈타 북제 영토 일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오명철에게 다시 북진을 명령했다. 577년 겨울, 오명철은 팽성(현재의 장쑤성 쉬저우시)을 포위했고, 선제는 오명철이 곧 황하 이남 지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신하 재경력(蔡景歷)이 상황이 불리하다고 경고했으나, 선제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578년 봄, 북주 장군 왕궤(王軌)가 오명철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오명철을 사로잡았다. 선제는 뒤늦게 후회하며 재경력을 다시 수도로 불러들였다. 이 패배로 민심이 동요하자, 578년 가을 선제는 신하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579년 겨울, 북주 선제는 위지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 선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저항했지만, 이전에 북제로부터 빼앗았던 도시들이 북주군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580년 새해가 되자 양자강 북쪽의 거의 모든 영토가 북주에게 넘어갔고, 많은 백성이 양자강을 건너 진나라 영토로 피난했다.

580년 여름, 북주 선제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장인인 양견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반발한 장군 울지형이 양견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사마소난(司馬消難)과 왕겸(王謙) 등이 합류했다. 당시 순주(勛州, 현재의 후베이성 샤오간시) 등 9개 주의 총독이었던 사마소난은 진나라에 투항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선제는 번의(樊毅), 임충(任忠), 진혜기(陳慧紀) 등의 장군을 파견하여 사마소난을 지원하고 북주의 남쪽 주들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양견 측의 위지형이 빠르게 울지형의 반란을 진압하여 자결하게 만들었고, 사마소난의 군대도 붕괴되었다. 사마소난은 진나라 영토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통치하던 영토는 모두 북주가 다시 차지했다. 양견은 581년 봄, 황제에 올라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했다.

582년 봄, 선제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진숙릉(陳叔陵)이 문제의 아들 진백고(陳伯固)와 손잡고 황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황태자였던 진숙보가 후주로 즉위했다.[4]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으로 수도 건강을 비롯한 강남의 주요 도시 대부분이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북에서 망명하여 강남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던 귀족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사실상 붕괴되었다. 또한 혼란기에 강남 각지에서는 군사력을 가진 세력가들이 할거했는데, 진패선은 건국 과정에서 이들과 혼인 관계나 친척 관계를 맺는 등 회유책을 통해 세력을 규합해야 했다. 심지어 성씨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응(陳宝応) 같은 인물을 황족으로 인정하고 그 자녀들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등, 진나라 황제의 권력 기반은 초기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4. 사회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는 숙보의 실정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국력이 약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진은 건국 당시 이미 사천과 향양, 강릉 등 전략적 요충지를 잃은 상태였다. 장강이라는 천연 방어선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상류 지역인 사천과 향양을 상실하여 수나라 군대가 상류에서 공격해 올 경우 방어에 매우 취약했다. 문제는 북쪽보다 수확이 빠른 남쪽의 약점을 이용하여, 일부러 수확기에 맞춰 전쟁을 일으켜 진나라의 경제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진나라가 멸망할 당시에는 안촉성을 지키던 고각이나 공안을 지키던 진기 등이 수나라 수군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등, 파릉 동쪽 지역에서는 거의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했다.

양나라 말기에 일어난 호경의 난으로 수도 건강을 비롯한 강남의 주요 도시 대부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화북에서 망명하여 강남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던 귀족 세력은 완전히 기반을 잃었다. 또한 난세 속에 강남 각지에서는 지방 세력가들이 군웅처럼 할거했는데, 진패선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혼인 관계나 친척 관계를 맺는 등 회유책을 사용해야만 했다. 심지어 단순히 성씨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응 같은 인물을 황족으로 인정하고 그 자녀들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등, 황제의 권위는 매우 약한 상태였다.

5. 문화

수도 건강은 중요한 문화, 정치, 종교 중심지로, 동남아시아인도 등지에서 온 상인과 불교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남조의 문화는 진(陳)나라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서릉(徐陵)이 영향력 있는 작가였으며, 그의 문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9]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졌다. 이 책에 실린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는 특히 유명하다. 예술 분야에서는 요최(姚最)의 《속화품》(續畫品)[10]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진(陳)의 초대 황제인 진백선(陳霸先)은 즉위 직후 불교를 공인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로 여겨지는 유물을 공개하고 대규모 불교 행사를 열었다. 또한 양 무제의 선례를 따라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5] 진나라 황제들은 전설적인 순임금의 후손임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진나라는 국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으로는 크게 융성하여 남북조 시대 문화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이후 수나라당나라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할 때 수도 건강의 주요 건축물과 문화유산들은 수나라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5. 1. 신라와의 관계

565년 진나라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로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보내주었다.[14] 이후 566년부터 568년까지, 그리고 570년571년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15][16][17][18][19]

6. 역대 황제

천강(天康) 566년-폐제
(임해왕)진백종(陳伯宗)566년 ~ 568년광대(光大) 566년 ~ 568년고종(高宗)선제진욱(陳頊)569년 ~ 582년태건(太建) 569년 ~ 582년류경언(柳敬言)-후주진숙보(陳叔寶)583년 ~ 589년지덕(至德) 583년 ~ 586년
정명(禎明) 587년 ~ 589년


7. 가계도

'''진나라 황제 가계도 (주요 인물)'''
진문찬
(경제(景帝) 또는 태조(太祖)로 추존)
↓ 아들↓ 아들
진도담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
무제 진패선
(503년 ~ 559년)
초대 황제 (재위 557년 ~ 559년)
↓ 아들↓ 아들↓ 아들colspan="1" |
문제 진건
(522년 ~ 566년)
2대 황제 (재위 559년 ~ 566년)
선제 진욱
(530년 ~ 582년)
4대 황제 (재위 569년 ~ 582년)
진창
(537년 ~ 560년, 형양왕)
↓ 아들↓ 아들colspan="2" |
폐제 진백종
(554년? ~ 570년)
3대 황제 (재위 566년 ~ 568년)
(임해왕)
후주 진숙보
(553년 ~ 604년)
5대 황제 (재위 582년 ~ 589년)
colspan="2" |



'''주요 인물 관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167
[2]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177
[3]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180
[4] 서적 Book of Chen
[5] 서적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vol.3 & 4): A Reference Guide, Part Three & Four BRILL 2014
[6] 서적 A History of South-East Asia, Fourth Edition Macmillan Education Ltd. 1981
[7] 서적 Book of Tang
[8] 서적 Book of Sui
[9] 서적 玉台新咏
[10] 웹사이트 藝術與建築索引典—陳 http://db1x.sinica.e[...] 2021-07-00 #날짜 정보가 불완전 하여 00으로 표시
[11] 논문 Divorce and the Divorced Woman in Early Medieval China (First through Sixth Century) https://dash.harvard[...] Harvard University 2016-05-00 #날짜 정보가 불완전 하여 00으로 표시
[12] 서적 China: Dawn of a Golden Age, 200–750 AD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4
[13] 서적 A History of the Vietnames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05-09
[14]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15]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16]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17]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18]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19] 서적인용 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4/진흥왕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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