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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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동도는 파평 윤씨 출신으로, 자는 경중, 호는 남애·유당이며,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이다. 1744년 진사가 되고, 174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서, 부수찬, 헌납, 교리 등을 거쳐 1761년 우의정, 1764년 좌의정, 1766년 영의정을 역임했다. 나경언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사도세자의 신임을 받았으며, 1768년 영중추부사로 죽은 후 정문(靖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윤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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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윤동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파평 윤씨 가문 출신으로, 윤순거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윤혜교이다. 1744년(영조 20) 진사가 된 후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1761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윤구연의 처벌 문제로 잠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762년 나경언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윤광유가 의심을 받자 사임하려 했으나, 사도세자의 신임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고 1768년 영중추부사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

2.1. 초기 생애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경중(敬仲), 호는 남애(南厓)·유당(柳塘)이다. 윤순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제학 윤진, 아버지는 판서 윤혜교(尹惠敎)이며, 어머니는 이익수(李益壽)의 딸이다.

2.2. 관료 생활

1744년(영조 20)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45년 사서·부수찬·헌납·교리를 거쳐 1748년 부교리·수찬, 1750년 장령, 1751년 부응교·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병으로 인하여 체개(遞改)되고 1754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승지를 거쳐 1758년 이후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청풍부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 용서를 청하였다가 파직되고 다시 3일 만에 복직되었다.

나경언의 벽서 사건 때(1762년), 벽서 사건의 주모자로 안성저 사람을 지목했고, 안성 사람들은 윤동도의 아들 윤광유(尹光裕)가 사주했다고 지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윤동도가 사임 표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누명임을 알고 윤동도에게 수서를 내려 위로했다. 세자는 안성저 사람의 자백이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764년에 좌의정,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768년 영중추부사로서 죽었다.

2.3. 정계 활동

1744년(영조 20)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45년 사서·부수찬·헌납·교리를 거쳐 1748년 부교리·수찬, 1750년 장령, 1751년 부응교·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병으로 인하여 체개(遞改)되고 1754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승지를 거쳐 1758년 이후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청풍부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 용서를 청하였다가 파직되고 다시 3일만에 복직되었다.

나경언의 벽서 사건 때(1762년), 벽서 사건의 주모자로 안성저 사람을 지목했고, 안성 사람들은 윤동도의 아들 윤광유(尹光裕)가 사주했다고 지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윤동도가 사임 표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누명임을 알고 윤동도에게 수서를 내려 위로했다. 세자는 안성저 사람의 자백이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764년에 좌의정,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768년 영중추부사로서 죽었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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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고조부윤수(尹燧)죽주부사
증조부윤순거(尹舜擧)장령
종조부윤절(尹晢)부수찬
친조부윤진(尹搢)부제학
친조모전주 이씨진사 이태장(李台長)의 딸
아버지윤혜교(尹惠敎)이조판서
어머니전주 이씨좌찬성 이익수(李益壽)의 딸
부인풍양 조씨좌참찬 조원명(趙遠命)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