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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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희순은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시아버지 유홍석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며 항일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여성 의병대를 조직하고, 의병가를 지어 독립 정신을 고취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35년 사망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윤희순 의병가사집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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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윤희순 |
한글 | 윤희순 |
한자 | 尹熙順 |
로마자 표기 | Yun Hui-sun |
출생일 | 1860년 6월 25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양주군 구지면 (현 경기도 구리시) |
사망일 | 1935년 8월 1일 |
사망지 | 중화민국 랴오닝성 하이청현 묘관둔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안산시 하이청시)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본관 | 해주 |
배우자 | 유제원(柳濟遠) |
자녀 | 유돈상(柳敦相) 유민상(柳敏相) 유교상 |
![]() | |
직업 | 민병대 지도자, 전투 노래 작곡가 |
활동 기간 | 1895년–1935년 |
알려진 업적 | 최초의 여성 한국 민병대 조직 및 지휘 |
주요 작품 | 《여군 민병대의 노래》 |
훈장 | 대통령 표창 |
군사 정보 | |
소속 | 조선독립단 |
참전 전투/전쟁 | 을미의병 정미의병 |
기타 정보 | |
부모 | 부: 윤익상(尹翼商), 모: 덕수 장씨 |
종교 | 알려진 정보 없음 |
정당 | 알려진 정보 없음 |
서명 | 알려진 정보 없음 |
웹사이트 | 알려진 정보 없음 |
사인 | 알려진 정보 없음 |
2. 생애 초기
윤희순은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명랑한 성격과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 알려졌다. 16세에 유홍석의 아들 유재원과 결혼하여 충청도 남면에서 살았고, 슬하에 아들 유돈상을 두었다.[1][2]
2. 1. 출생과 가계

윤희순은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윤익상,[1] 선조들은 해주 출신이었다.[2] 윤희순은 명랑한 성격과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 알려져 있었다.[1]
2. 2. 결혼과 가족
16세에 유홍석의 아들 유재원과 결혼하여,[1] 충청도 남면에서 살았다.[2] 유재원과의 사이에서 아들 유돈상을 두었다.[2]3. 의병 활동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윤희순은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일본군 사령관에게 선전포고문을 보내고 친일 한국군 병사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1] 또한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수십 곡의 의병가를 작사했다.[2]
1907년에는 30여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대를 조직하여 자금 모금, 무기 공장 설립 등을 통해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3][2] 1911년 일제의 한국 점령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2]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후에도 여성 의병 훈련, 일본 진영 공격, 한국 포로 구출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1]
3. 1. 의병 투신 계기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한국 전역에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윤희순 또한 의병 투쟁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시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윤희순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선전포고문을 보내고, 일본군에 협력하는 한국군 병사들에게는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1] 또한, 다른 여성들에게도 일본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3]
3. 2. 의병가 작사
명성황후 시해 이후, 윤희순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선전포고문을 보내고 일본군에 협력하는 한국군 병사들에게는 협박 편지를 보냈다.[1] 다른 여성들에게도 일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3] 또한 한국 의병들을 위해 수십 곡의 노래를 지었는데,[2] 그중 9곡이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1]
윤희순의 전투가요 중 하나인 「안사람 의병가」(「여성 의병의 노래」)는 여성이 작곡한 최초의 한국 의병가이자 한국어로 기록된 최초의 의병가였다. 다음은 그 가사의 일부이다.
아무리 힘세고 부유한/ 일본이라 할지라도/ 단결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저 여자라고 하여도/ 어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몰라서야/ 나라 없이 사내나 계집이나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의병대에 나가서 돕자/ 우리 의병들을 돕자/ 만약 짐승에게 잡히면/ 일본이 그들을 구해줄까?/ 우리 의병들을 돕자/ 우리의 승리, 우리 민족 만세!/ 여성 만세 만만세![1]
3. 3. 여성 의병대 조직
1907년, 윤희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대인 여성 의병대를 조직했다. 이 의병대는 약 30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었다.[3] 윤희순은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고, 여의나루 주산에 무기 공장 설립을 조직했다.[2]윤희순은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두 잃은 후에도(1913년~1915년) 계속해서 여성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일본 진영을 공격했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의병 집단이 함께 협력하여 더 효율적으로 활동할 것을 격려했다. 일본 진영에서 한국 포로들을 구출하여 비밀 동굴에 숨겨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1]
3. 4. 만주 망명과 항일 투쟁
1911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자,[2]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한국을 떠나 남쪽 만주로 이동하여 병사들과 재결합하고 새로운 군사 전략을 개발하려 했다. 윤희순과 그의 아들이 뒤따르기 전, 일본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여 유홍석의 행방을 물으며 위협했다. 윤희순은 어떤 정보도 밝히지 않았고, 일본 경찰은 그녀의 불굴의 정신에 감탄하여 결국 석방했다.[1]1913년부터 1915년 사이에 윤희순은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남편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윤희순은 계속해서 여성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일본 진영을 공격했다. 남성과 여성 의병 집단이 함께 협력하여 더 효율적으로 활동할 것을 격려했다. 일본 진영에서 한국 포로들을 구출하여 비밀 동굴에 숨겨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1] 이후 학교를 설립하고 새로운 독립 투사들을 훈련시켰다.
4. 사망과 유산
윤희순은 1935년 여름, 아들이 일본 당국에 구금되었다가 사망한 지 11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손들에게 '일생록'이라는 문서를 남겼다.[1] 대한민국 정부는 윤희순의 행적을 기려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1994년 10월 20일에는 윤희순과 남편의 유해를 윤씨 가문의 묘역으로 이장했다.[2]
4. 1. 죽음
윤희순은 1935년 여름, 아들이 일본 당국의 구금 중 사망한 지 11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후손들에게 A Record of my Life|일생록영어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남겼다.[1]4. 2. 사후 평가와 기념
윤희순의 행적은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널리 기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희순에게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1] 1994년 10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희순과 그의 남편의 유해를 윤씨 가문의 묘역으로 이장하였다.[2]5. 관련 문화재
윤희순 의병가사집은 등록문화재 제750호이다.
참조
[1]
서적
Women in Korean History 한국 역사 속의 여성들
https://books.google[...]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2008
[2]
웹사이트
Yun Hui-sun (1860~1935) Gangwon-do > History and Culture > Spirit of Gangwon-do
http://eng.gwd.go.kr[...]
2019-01-18
[3]
서적
A New Modern History of East Asia
https://books.google[...]
V&R unipress GmbH
2017
[4]
간행물
이달의 독립운동가 -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尹熙順) 의사
http://www.independe[...]
2008-09-22
[5]
뉴스
이달의 독립운동가 >>> 윤희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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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2
[6]
웹인용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희순
http://narasarang.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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