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키 시게코
1. 개요
이마키 시게코는 1848년 고메이 천황의 후궁에서 시종으로 시작하여 쇼쇼나이시가 된 인물이다. 지구사 아리후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교류하며 정치적 견해를 공유했고, 이와쿠라 도모미의 책략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가즈노미야 강가를 추진했으나 존왕양이파에게 배척당해 은거하고 삭발을 강요받았지만, 1868년 사면받아 복권되었다. 1901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교토시 산포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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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름 | 今城重子 (일본어) |
|---|---|
| 출생 | 1921년 11월 22일 |
| 사망 | 2015년 9월 2일 (93세)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47년 ~ 2015년 |
| 배우자 | 다카미네 히데오 (1947년 결혼, 1954년 이혼) 우노 주키치 (1958년 결혼) |
| 자녀 | 우노 마사토 (장남) |
| 출신 학교 | 조시가쿠인 여자 전문학교 (현 조시 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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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극단 | 분가쿠자 기노자 |
| 주요 수상 | 기노쿠니야 연극상 개인상 (1982년) 모리츠미 세이엔상 (1990년) 자수포장 (1992년) 훈3등 서보장 (1997년) 요미우리 연극대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2001년) 문화공로자 (2004년) |
| 공식 웹사이트 | 우노 주키치 사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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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키가 -
이마키 다쓰코
이마키 다쓰코는 닌코 천황의 후궁으로 다섯째 황자를 낳았으나 요절하였고, 1854년 대리 연소 사건으로 두문불출하다가 1875년 사망했다. -
고메이 천황 -
공무합체
공무합체는 1850년대 일본에서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통해 외세에 대응하고 국론을 통일하려던 정치적 시도였으나, 존왕양이 운동과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실패했다. -
고메이 천황 -
고노에 다다히로 (1808년)
고노에 다다히로는 고노에 모토사키의 장남으로 좌대신, 관백을 역임했으나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하고 복귀 후 다시 관백을 지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사망하여 정1위가 추서되었다. -
20세기 일본 사람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20세기 일본 사람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2. 생애
1848년(가에이 원년) 고메이 천황의 후궁에서 시종으로 일했으며, 이후 쇼쇼나이시가 되었다. 지구사 아리후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뜻을 같이하여, 1858년 (안세이 5년) 이와쿠라 도모미의 "신슈만세견책"을 천황에게 전달했다.
가즈노미야 강가 때에는 호리카와 모토코와 함께 추진하여, 조정 내 존왕양이파로부터 "사간양빈(四奸両嬪)" 중 한사람으로 배격되어, 여관을 사퇴 및 은거, 삭발을 명령받았다. 1868년 (게이오 4년)에 용서받아 복귀했다.
1901년 (메이지 34년) 7월 18일 74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의 산포지이다.
2.1. 초기 생애
1848년(가에이 원년), 고메이 천황의 후궁에서 시종으로 일했고, 후에 쇼쇼나이시가 되었다. 의붓 형인 지구사 아리후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뜻을 같이하여, 1858년(안세이 5년) 이와쿠라 도모미의 "신주 만세 굳건한 책략"은 시게코를 통해 천황에게 전달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즈노미야가 시집갈 때 호리카와 노리코와 함께 이를 추진했기 때문에, 후에 조정 내 존왕양이파로부터 "사간 료빈" 중 한 명으로 배척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해야 했고 출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1868년(게이오 4년)에 용서받아 이전 지위로 복귀했다.
2.2. 정치 활동
1848년(가에이 원년), 고메이 천황의 후궁에서 시종으로 종사했고, 후에 소장나이시가 되었다. 의붓 형제인 지구사 아리후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교류하며 정치적 견해를 공유했다. 1858년(안세이 5년) 이와쿠라 도모미의 "신주 만세 굳건한 책략"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가즈노미야 강가를 호리카와 노리코와 함께 추진했기 때문에, 나중에 조정 내 존왕양이파로부터 "사간양빈(四奸両嬪)"의 한 사람으로 배격되어, 여관을 사퇴 및 은거, 그리고 삭발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1868년(게이오 4년)에 용서받아, 예전의 신분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