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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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태일은 199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한 야구 선수이다. 데뷔 첫 해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후반기에 13승을 거두었다. 1992년까지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으나, 과도한 투구로 인해 구위가 하락하여 1995년 혈전증으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1996년 복귀를 시도했으나, 1997년 시즌 중 임의탈퇴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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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해는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국방부 기획관리실 실장, 국방부 차관, 국방부 장관,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을 역임하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와 여러 정당의 당무위원, 최고위원, 상임고문을 지냈다. - 경주고등학교 동문 - 우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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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 (야구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선수명 | 이태일(李太逸) |
원어명 | 해당 정보 없음 |
소속 구단 | 해당 정보 없음 |
등번호 | 해당 정보 없음 |
![]() |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사망일 | 해당 정보 없음 |
신장 | 해당 정보 없음 |
체중 | 해당 정보 없음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언더)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90년 |
드래프트 순위 | 1990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
첫 출장 | KBO / 1990년 5월 9일 사직 롯데전 선발 |
마지막 경기 | KBO / 1996년 8월 16일 대구 한화전 선발 |
획득 타이틀 | 1990년 8월 8일 노히트노런 |
계약금 | 3,500만 원 |
연봉 | 해당 정보 없음 |
선수 경력 | |
경력 | 삼성 라이온즈 (1990년 ~ 1997년) |
2. 프로 생활
이태일은 1990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초 3년 동안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1990년 방위 복무로 전반기에는 1승도 올리지 못했으나, 그해 8월 8일 롯데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3] 후반기에만 13승(10선발승)을 거두었다. 1991년 10승(모두 선발), 1992년 13승(10선발승)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 10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1년부터 2년 동안 김성근 감독이 김성길과 함께[4] 이태일을 마구잡이로 투입하면서, 1993년부터 2년 동안 10승 달성에 실패했다.
1995년 혈전증이 발병하여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1996년 1군에 복귀했지만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7년 시즌 중 임의탈퇴 공시되어[5] 은퇴했다.
2.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0년에 데뷔하여 방위 복무로 전반기에는 1승도 올리지 못했으나, 그 해 8월 8일 롯데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3] 후반기에만 13승(10선발승)을 거두었다. 1992년까지 3년 연속 10승 이상(1991년 10승(모두 선발), 1992년 13승(10선발승))을 기록했다.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1991년부터 2년 동안 김성길과 함께[4] 마구잡이로 투입시킨 탓인지, 1993년부터 2년 동안 10승에 실패했다.
1995년에는 혈전증이 발병했고, 이 때문에 1995년에는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1996년에 1군으로 복귀해 재기를 노렸으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7년 시즌 중 임의탈퇴 공시되어[5] 은퇴했다.
3. 학력
참조
[1]
뉴스
프로야구 6번째 대기록 이태일 투수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0-08-10
[2]
뉴스
"호랑이 이빨 두개는 傷(상)했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4-13
[3]
뉴스
프로야구 6번째 대기록 이태일 투수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0-08-10
[4]
뉴스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21. 삼성의 재일교포 선수 (하)'
https://news.naver.c[...]
매일신문
2011-11-14
[5]
뉴스
"<프로야구소식> 이태일.강영수,임의탈퇴 공시 신청"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199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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