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 4현
1. 개요
임나 4현 할양 사건은 512년 백제가 왜에 사신을 보내 임나국의 4개 현을 요구한 사건이다. 호즈미노 오시야마와 오오토모노 가나무라가 백제의 요구를 지지하고, 모노노베노 아라카비는 반대했으나, 왜는 결국 4현의 백제 영유를 인정했다. 이후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가 철회를 시도했지만 백제는 이를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이 과정에서 오오토모노 가나무라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가야 소국들의 신라 귀속을 초래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전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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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관계 -
여제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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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관계 -
목라근자
목라근자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 인물로, 근초고왕의 명을 받아 왜군과 함께 침미다례를 공격하고 가야 지역 평정 임무를 수행하며 가야 지역에 대한 백제의 간접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
일본의 역사 -
에도 시대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멸망한 1868년까지의 일본 역사 시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아래 평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으나 엄격한 신분제도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막번체제, 산킨코타이 제도 등 독특한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통해 일본 근세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역사 -
연호
연호는 군주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며, 군주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칭호로,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는 일본, 중화민국, 북한 등에서 사용된다. -
한국의 역사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지속된 시기로, 강제 병합, 경제적 착취, 정치적 억압, 문화적 동화 정책 등이 특징이며, 3·1 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위안부 문제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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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군사 정권 기구로, 헌법 일부 조항 효력 정지, 국회 해산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며 경제 개발을 추진했으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해산되었다.
2. 임나 4현 할양 사건
《일본서기》 게이타이 천황 6년(512년) 12월조에 기록된 사건이다.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을 요구하자, 호즈미노노 오시야마는 이 4현이 백제와 가깝고 왜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백제에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오오토모노노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했다.
모노노베노 아라카비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고 했으나, 아라카비의 처가 오진 천황에 대한 신탁과 진구 황후의 고사를 들어 남편을 말려, 아라카비는 병을 핑계로 사신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왜국은 다른 사신을 보내 백제에 임나 4현을 주기로 결정했다.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히타카노 키시를 백제로 보내 의사를 철회하려 했지만, 백제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이라며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오오토모노 가나무라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2.1. 백제의 임나 4현 요구
繼體天皇일본어 6년(512년) 겨울 12월,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요구했다. 다리노쿠니노미코토모치(哆唎國守)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는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왜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아침 저녁으로 다니기 쉽고 닭과 개의 주인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며 백제의 편을 들었다. 오오토모노오무라치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했다.
왜에서는 모노노베노오무라치 아라카비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고 했으나, 아라카비의 처가 오진 천황에 대한 신탁과 진구 황후의 고사를 들며 남편을 말렸고, 아라카비는 병을 핑계로 사신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왜국은 다른 사신을 보내 백제에 임나 4현의 백제 영유를 인정할 뜻을 밝혔다.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大兄皇子)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백제로 보내 의사를 철회하려 했지만, 백제의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인데 아들이 나서서 그걸 함부로 고칠 수는 없다"며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이 기록 말미에 당시 오토모노 가네마로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적고 있다.
2.2. 왜국의 반응과 호즈미노 오시야마의 주장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임나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요구했을 때, 왜국의 다리노쿠니노미코토모치(哆唎國守)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는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왜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기 쉽고 닭과 개의 주인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4현을)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4현이 백제와) 다른 곳이 된다면 몇 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백제 편을 들었다. 오오토모노오무라치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하였다. 《일본서기》는 이 기록 말미에 당시 오토모노 가네마로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2.3. 모노노베노 아라카비의 반대와 좌절
512년 겨울,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임나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요구하자, 왜국의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는 4현이 백제와 가깝고 왜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백제에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오오토모노오무라치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하여, 왜는 모노노베노오무라치 아라카비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아라카비의 처는 스미요시 대신이 오진 천황에게 내린 신탁과 진구 황후의 고사를 언급하며 남편을 만류했다. 아라카비는 아내의 권유대로 병을 핑계로 사신행을 거부했지만, 왜국은 다른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을 백제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大兄皇子)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히타카노 키시를 백제에 보내 의사를 철회하려 했으나, 백제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이라며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오오토모노 가나무라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4. 오에 황자의 항의와 백제의 무시
512년 겨울,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임나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요구했다. 호즈미노 오시야마는 4현이 백제와 가깝고 왜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백제에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오오토모노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했다. 왜국은 모노노베노 아라카비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 했으나, 아라카비는 아내의 만류로 병을 핑계로 사신 행차를 거부했다. 결국 왜국은 다른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의 백제 영유를 인정했다.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大兄皇子)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백제에 보내 의사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백제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인데 아들이 나서서 그걸 함부로 고칠 수는 없다"며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당시 오토모노 가네마로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뇌물 수수설
게이타이 천황 6년(512년) 겨울 12월조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임나국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4현을 요구했을 때, 왜국의 다리노쿠니노미코토모치(哆唎國守) 호즈미노 오시야마는 4현이 백제와 가깝고 왜국과 멀다는 이유로 백제에 주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오오토모노 가나무라도 이에 동조했다.
왜는 모노노베노 아라카비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 했으나, 아라카비의 처가 오진 천황에 대한 신탁과 진구 황후의 고사를 들며 반대했다. 아라카비는 병을 핑계로 사신으로 가지 않으려 했지만, 왜는 결국 다른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의 백제 영유를 인정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는 히타카노 키시를 백제에 보내 의사를 철회하려 했지만, 백제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이라며 무시했다.
《일본서기》는 이 기록 말미에 당시 오토모노 가네마로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