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크트갈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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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크트갈렌주는 스위스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1803년 나폴레옹의 조정법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영토를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주도는 장크트갈렌이며, 장크트갈렌 시를 포함해 라퍼스빌-요나, 빌 등 주요 도시가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장크트갈렌 수도원이 상당한 영토를 소유했으며, 장크트갈렌시는 1405년 수도원으로부터 독립했다. 1798년 헬베티아 공화국 시기에는 젠티스와 린트 주로 분할되었으나, 1803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8개의 선거구로 나뉘며, 독일어를 주로 사용한다. 경제적으로는 낙농업, 농업, 관광, 그리고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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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북동부 장크트갈렌주 라인 계곡의 알터라인강 좌안에 위치한 라이네크는 중세 시대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영향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인 교통 요충지로, 라이네크 성과 함께 제조업, 서비스업이 발달했으며 스위스 연방 철도 라이네크역과 LCR사가 위치해있다.
| 장크트갈렌주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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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공식 이름 | 장크트갈렌 주 |
| 로마자 표기 | Kanton St. Gallen |
| 다른 이름 | 장크트갈 주 |
| 약어 | SG |
| ISO 코드 | CH-SG |
| 위치 | 스위스 |
| 유형 | 주 |
| 수도 | 장크트갈렌 |
| 가입 연도 | 1803년 |
| 언어 | 독일어 |
| 면적 | 2026 km² |
| 최고 지점 | 링엘슈피츠 (3248m) |
| 최저 지점 | 콘스탄스 호 (396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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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 구역 | |
| 하위 행정 구역 | 77개 자치체 |
| 행정 구역 | 8개 구 |
| 통계 | |
| 인구 | 520,982명 |
| 인구 조사 기준 시점 | 2023년 |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 정치 | |
| 집행 기관 | 정부 (7인) |
| 입법 기관 | 칸톤 의회 (180석) |
| 경제 | |
| GDP (총액) | CHF 380억 4100만 (2020년) |
| 1인당 GDP | CHF 74,210 (2020년) |
| 기타 정보 | |
| 웹사이트 | 장크트갈렌 주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조정법을 통해 여러 역사적 영토를 합쳐 장크트갈렌주를 만들었다. 이 주의 절반 정도는 장크트갈렌 수도원이 수 세기에 걸쳐 인수했던 지역이다.
장크트갈렌 시는 1405년에 수도원에서 독립했고, 수도원은 아펜첼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1468년에는 토겐부르크가 수도원에 인수되었다. 도시와 수도원은 모두 구스위스 연방의 준회원이었지만, 정회원은 아니었다. 취리히 호수, 발렌제, 라인탈 지역은 1798년까지 독립 상태였다.
헬베티아 공화국 시기에는 주의 북부가 아펜첼과 함께 젠티스주, 남부는 글라루스와 함께 린트주가 되었다. 1798년 프랑스 침공 이전에는 장크트갈렌 제국 자유 도시, 장크트갈렌 수도원 영토(퓌르스텐란트 및 토겐부르크 포함), 라퍼스빌, 패퍼스 수도원, 자르간스, 라인탈, 작스-포어슈테크, 호헨작스, 베어덴베르크, 빈덱, 우츠나흐 등으로 구성되었다.
1798년 이후 젠티스주와 린트주로 분할되었으나, 재정 문제와 인기 없는 법률로 인해 지역에 불안이 야기되었다. 수도원은 세속화되었고 대수도원장은 빈으로 도피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발발 후 오스트리아군이 대수도원장을 복귀시켰지만, 곧 프랑스군에 의해 다시 쫓겨났다. 1803년 조정법으로 장크트갈렌주는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2]
1803년 주 헌법은 1814년에 개정되어 종교, 결혼, 교육 문제를 주 단위가 아닌 주 의회에 종속된 개신교 및 가톨릭 의회의 이원적인 구분(고백적 이원론)을 도입했다. 1831년에는 직접 민주주의 요소가 도입되었고, 주는 15개 구역으로 나뉘었다가 1918년에 14개로 줄었다(타블라트구와 장크트갈렌구의 합병). 1861년에는 교육이 주의 권한이 되었고, 1890년 헌법은 직접 민주주의를 더욱 강조했다. 1890년 헌법은 2001년까지 유지되었으며, 2001년 헌법에서는 8개 선거구로 분할되었다.
2. 1. 형성 과정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조정법에서 정의한 다양한 역사적 영토를 인위적으로 합쳐 만든 것이 장크트갈렌주이다. 주 면적의 약 절반은 수 세기에 걸쳐 장크트갈렌 수도원이 획득한 영토에 해당한다.[2]장크트갈렌시는 1405년에 수도원으로부터 독립했다. 동시에 수도원은 아펜첼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반대로, 토겐부르크는 1468년에 수도원에 귀속되었다. 도시와 수도원 모두 구 스위스 연방의 동맹(''Zugewandte Orte'')이었지만, 아펜첼과는 달리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다.[2]
취리히 호, 발렌 호 및 라인탈의 영토는 1798년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현대 주의 북부는 아펜첼과 함께 젠티스 주가 되었고, 남부는 글라루스와 함께 린트 주가 되었다.[2]
1798년 프랑스 침공 이전에는 현대 주의 영토는 자유 도시 장크트갈렌,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영토(퓌르스텐란트 및 토겐부르크 포함), 자유 도시 라퍼스빌, 패퍼스 수도원, 자르간스 및 독립 영주령(지방) 라인탈, 작스-포르스테크, 호엔작스, 베어덴베르크, 빈덱 및 우츠나흐로 구성되었다.[2]
1798년 4월, 후일 장크트갈렌주가 될 영토는 아펜첼, 글라루스, 슈비츠의 일부와 함께 헬베티아 공화국의 젠티스와 린트로 분할되었다.[2]
그러나 두 신설 주는 즉각적인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몇 가지 인기 없는 세금과 법률을 시행해야 했다. 수도원은 1798년 9월 17일에 세속화되었고, 판크라츠 포르스터 추기경-아빠스는 빈으로 도망쳤다. 인기 없는 법률과 수도원의 폐쇄는 이 지역 전반에 걸쳐 불안을 야기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1799년에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동부 스위스로 진격하여 추기경-아빠스를 수도원의 왕좌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군대는 취리히 외곽에서 패배했고 프랑스 군대가 장크트갈렌으로 돌아와 추기경-아빠스를 몰아냈다. 1803년, 조정법의 일환으로 이 지역은 스위스 연방에 장크트갈렌주로 가입했다.[2]
1803년 주 헌법은 1814년에 개정되었다. 주의 인구의 종교적 이질성으로 인해 1814년 헌법은 종교, 결혼 및 교육 문제를 주 차원에서 조직하는 대신, 입법 주 의회(Grosser Rat)에 종속된 개별 개신교 및 가톨릭 의회와 함께 이중 분할(종교적 이원론)을 도입했다.
헌법은 1831년에 다시 개정되어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했다. 1831년 헌법은 주를 15개 구역(''Bezirke'')으로 나누었고, 1918년에는 14개로 축소되었다(타블라트 구역이 장크트갈렌 구역과 합병).
학교 조직을 둘러싼 지속적인 종교적 분쟁으로 인해, 주는 결국 1861년에 교육을 관할하게 되었다. 헌법은 1890년에 다시 개정되었으며, 직접 민주주의를 더욱 강조했다.
1890년 헌법은 수많은 후속 변경 사항과 함께 2001년까지 효력을 유지했으며, 주 헌법의 최신 개정 날짜인 2001년에는 구역 분할이 8개의 선거구(''Wahlkreise'')로 대체되어 2003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2. 2. 헬베티아 공화국 시기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현대 장크트갈렌주의 북부 지역은 아펜첼과 함께 젠티스주가 되었고, 남부 지역은 글라루스와 함께 린트주가 되었다.[2]1798년 4월, 이후 장크트갈렌주가 될 영토는 젠티스와 린트 주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두 신설 주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인기 없는 세금과 법률을 시행해야 했다. 수도원은 1798년 9월 17일에 세속화되었고, 대수도원장 판크라즈 포르스터는 빈으로 도피했다. 인기 없는 법과 수도원의 폐쇄는 지역 전체에 불안을 야기했다.[2]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1799년에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군대가 스위스 동부로 진군하여 대수도원장을 수도원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취리히 외곽에서 패배했고, 프랑스군은 대수도원장을 몰아내고 장크트갈렌으로 돌아왔다. 1803년, 조정법의 일환으로 이 지역은 스위스 연방에 장크트갈렌주로 가입했다.[2]
2. 3. 연방 가입과 이후
1803년 나폴레옹의 조정법에 따라 이 지역은 스위스 연방에 장크트갈렌주로 합류했다.[2]1803년의 주 헌법은 1814년에 수정되었다. 1814년 헌법은 주의 다양한 종교 때문에 종교, 결혼, 교육 문제를 주 단위가 아닌, 주 의회에 종속된 개신교 및 가톨릭 의회의 이원적인 구분(고백적 이원론)을 도입했다.
1831년 헌법은 다시 개정되어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했다. 1831년 헌법에 따라 주를 15개 구역(Bezirke)으로 나누었다가 1918년에 14개로 줄였다(타블라트구와 장크트갈렌구의 합병).
학교 조직에 대한 계속되는 종교적 분쟁으로 인해, 캔톤은 결국 1861년에 교육을 그 권위하에 두었다.
1890년 헌법은 직접 민주주의를 더욱 강조하면서 다시 개정되었다.
1890년 헌법은 가장 최근에 수정된 주 헌법이 개정된 2001년까지 수많은 변경 사항과 함께 유효했다.
2001년 헌법에서 지역구 분할은 2003년 1월 1일 발효된 8개 선거구(Wahlkreise)로의 분할로 대체되었다.
3. 지리

장크트갈렌주는 스위스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보덴호(보덴제)와 접하고 있다. 동쪽에는 라인 계곡이 있으며, 라인강 너머에는 오스트리아(포어아를베르크주)와 리히텐슈타인이 있다. 남쪽으로는 그라우뷘덴주, 글라루스주 및 슈비츠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에는 취리히주와 투르가우주가 있다.
아펜첼이너로덴과 아펜첼아우서로덴 두 주는 완전히 장크트갈렌주에 둘러싸여 있다.
장크트갈렌주의 주요 강은 라인강, 투어, 린트강, 제츠강이다. 지형은 라인강과 콘스탄스 호수 근처의 평야에서 남쪽의 알프스 산악 지역(아펜첼 알프스와 글라루스 알프스)으로 변화한다. 주의 약 1/3(619.7km2)은 산림이며, 거의 절반인 9790.6km2는 농업에 사용된다. 농지의 278.6km2는 고산 목초지이다. 나머지 중 259.1km2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176km2는 주택이나 도로로 채워져 있다.[3]
해발 고도는 398m(보덴제)에서 3251m(링겔슈피츠)까지 다양하다. 장크트갈렌주에는 보덴제(54km2), 발렌제(18k㎡ 이상), 취리히 호수(10km2)가 포함되며, 경계 내에 여러 개의 작은 호수가 존재한다.[4]
장크트갈렌주의 산에는 2008년 스위스 사르도나 지각 아레나라는 이름으로 지질학적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단층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4. 행정 구역
(1km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