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택
1. 개요
정준택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의 정치인으로, 광산 관리자로 일하다가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 1948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60년에는 정준택경제대학이 설립되었고, 1972년에는 시리아와 수단을 방문했다. 1973년 사망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아들 정경택 또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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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자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자 -
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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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사망 -
여운홍
여운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과도입법의원과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친일 행적 의혹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정치인이다. -
1973년 사망 -
린든 B. 존슨
린든 B. 존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시민권법과 투표권법을 통과시켰으나, 베트남 전쟁 개입으로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 유산에 영향을 받았다. -
조선로동당의 정치인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로동당의 정치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생애
정준택은 학업을 마친 후 광산 관리자로 일했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1947년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국장과 함경남도 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의 전신) 대표로 임명되었다.
1948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958년에는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1962년에는 다시 한번 최고인민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9월 20일 내각 제5부총리, 1958년 10월 제6부총리, 1962년 10월 23일 제7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1962년 10월 국가계획위원회에 재선되었다.
1960년 강원도 원산시에 그의 이름을 딴 정준택경제대학이 세워졌다. 1972년에는 시리아와 수단에 외교 사절로 방문하여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197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정경택 또한 고위 정치인이다.
2.1. 초기 생애 및 활동
정준택은 학업을 마친 후 광산 관리자로 일했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1947년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국장과 함경남도 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의 전신) 대표로 임명되었다.
1948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958년에는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1962년에는 다시 한번 최고인민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내각 부총리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960년 강원도 원산시에 그의 이름을 딴 정준택경제대학이 설립되었다. 1972년에는 시리아와 수단에 외교 사절로 방문하여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197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정경택 또한 고위 정치인이다.
2.2. 북한 정부 수립 이후
정준택은 학업을 마친 후 광산 관리자로 일했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1947년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국장과 함경남도 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의 전신) 대표로 임명되었다.
1948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958년에는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1962년에는 다시 한번 최고인민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9월 20일 내각 제5부총리, 1958년 10월 제6부총리, 1962년 10월 23일 제7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1962년 10월 국가계획위원회에 재선되었다.
1960년 강원도 원산시에 그의 이름을 딴 정준택경제대학이 세워졌다. 1972년 시리아와 수단에 외교 사절로 방문하여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197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정경택 또한 고위 정치인이다.
2.3. 경제 및 외교 활동
정준택은 학업을 마친 후 광산 관리자로 일했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1947년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국장과 함경남도 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의 전신) 대표로 임명되었다.
1948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58년에는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1962년에는 다시 한번 최고인민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9월 20일 내각 제5부총리, 1958년 10월 제6부총리, 1962년 10월 23일 제7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1962년 10월 국가계획위원회에 재선되었다.
1960년 강원도와 원산에 그의 이름을 딴 정준택경제대학이 세워졌다. 그는 1972년 시리아와 수단에 외교 사절로 방문하여 아사드 대통령을 만났다.
2.4. 사망
정준택은 197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은 고위 정치인인 정경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