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헤인스
1. 개요
제시 헤인스는 미국의 야구 선수로, 1918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920년부터 1937년까지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1924년 노히터,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기록했으며,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2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다. 1937년 은퇴 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 코치를 거쳐 몽고메리 카운티의 감사관으로 30년간 재직했다. 197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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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제시 헤인스 |
|---|---|
| 포지션 | 투수 |
| 타석/투구 | 우투우타 |
| 출생일 | 1893년 7월 22일 |
|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주 클레이턴 |
| 사망일 | 1978년 8월 5일 |
| 사망지 |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 |
| 데뷔 리그 | MLB |
|---|---|
| 데뷔일 | 1918년 7월 20일 |
| 데뷔 팀 | 신시내티 레즈 |
| 마지막 리그 | MLB |
| 마지막 경기일 | 1937년 9월 10일 |
| 마지막 팀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소속 팀 | 신시내티 레즈 (1918)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0–1937) |
| 리그 | MLB |
|---|---|
| 승패 기록 | 210–158 |
| 평균 자책점 | 3.64 |
| 삼진 | 981 |
| 월드 시리즈 우승 | 1926 1931 1934 |
|---|---|
| 노히트 노런 | 1924년 7월 17일 |
| 명예의 전당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헌액 |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
| 헌액 연도 | 1970 |
| 헌액 방법 | 베테랑 위원회 |
-
너클볼 투수 -
팀 웨이크필드
팀 웨이크필드는 플로리다 공과대학교 출신으로 MLB에서 19시즌 동안 너클볼 투수로 활약하며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004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통산 200승을 기록했으며,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하다 2023년 뇌암으로 사망했다. -
너클볼 투수 -
호이트 윌헬름
호이트 윌헬름은 너클볼을 던지던 미국의 전 야구 선수로, 21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며 1070경기 출전, 143승 122패, 124세이브, 월드 시리즈 우승, 노히트 노런, 5회 올스타 선정, 2회 최우수 방어율 기록,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밥 펠러 용기상 수상 등의 업적을 남겼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
다코타 허드슨
다코타 허드슨은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 출신의 미국 프로 야구 투수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여 콜로라도 로키스를 거쳐 현재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소속이며, 97마일의 싱커를 던지는 땅볼 유도형 투수이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
호세 카페얀
호세 카페얀은 미국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메이저 리그와 KBO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톰 글래빈
톰 글래빈은 메이저리그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투구와 타격 능력으로 다승왕, 실버 슬러거 상 등을 수상하고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 300승을 달성한 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좌완 투수이다.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그레그 매덕스
그레그 매덕스는 뛰어난 제구력과 지략적인 투구로 '정밀 기계'라 불리며 4년 연속 사이 영 상을 수상하고 18시즌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355승을 거둔 전직 투수로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선수 경력 이전
제시 헤인스는 오하이오주 클레이턴에서 태어났지만, 인근 필립스버그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의 학교를 다녔다. 그의 아버지 엘리아스는 경매사로 일했다. 헤인스는 필립스버그의 지역 야구팀에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일요일에 야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헤인스는 몰래 빠져나가 옥수수 창고에 유니폼을 숨기고 옥수수 밭에서 옷을 갈아입곤 했다. 1912년 데이턴에서 세미프로 야구를 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턴의 마이너 리그 팀과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 리그에서 여러 시즌을 보낸 헤인스는 새기노, 포트웨인, 스프링필드(스프링필드 리퍼스), 토피카 및 털사의 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1918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잠깐 메이저 리그 경기를 뛰었지만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 그는 마이너 리그 경력 전체에서 187경기 107승 61패, 평균자책점 1.93을 기록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브랜치 리키는 그가 캔자스시티에서 투구하는 것을 보고 헤인스에게 주목했지만, 당시 팀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리키는 팀 주주 그룹을 설득하여 헤인스의 계약을 구매하기 위해 10000USD의 대출을 받도록 했다.
헤인스는 마이너 리그 시절 캐리 M. 와이너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자녀 한 명을 두었다.
2.1. 유년 시절 및 마이너 리그
제시 헤인스는 오하이오주 클레이턴에서 태어났지만, 인근 필립스버그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의 학교를 다녔다. 그의 아버지 엘리아스는 경매사로 일했다. 헤인스는 필립스버그의 지역 야구팀에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일요일에 야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헤인스는 몰래 빠져나가 옥수수 창고에 유니폼을 숨기고 옥수수 밭에서 옷을 갈아입곤 했다. 1912년 데이턴에서 세미프로 야구를 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데이턴의 마이너 리그 팀과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 리그 야구에서 여러 시즌을 보낸 헤인스는 새기노, 포트웨인, 스프링필드(스프링필드 리퍼스), 토피카 및 털사의 팀에서도 투수로 활동했다. 1918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잠깐 메이저 리그 경기를 뛰었지만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 마이너 리그 경력 전체에서 그는 187경기에서 107승 61패, 1.9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브랜치 리키는 그가 캔자스시티에서 투구하는 것을 보고 헤인스에 주목했지만, 팀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팀 주주 그룹을 설득하여 헤인스의 계약을 구매하기 위해 10000USD의 대출을 받도록 했다.
마이너 리그 시절 헤인스는 캐리 M. 와이너와 결혼했다. 그들은 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3.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
제시 헤인스는 메이저 리그에서 19시즌 동안 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활약한 투수이다. 1920년대 카디널스의 핵심 투수였으며, 세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1926년 월드 시리즈|1926년]], 1931년, 1934년)을 경험했다. 특히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2승을 거두며 팀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24년 7월 17일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헤인스는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로 유명했는데, 다른 너클볼 투수들과는 달리 손가락 관절로 공을 잡아 던졌다.
3.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0-1937)
헤인스는 192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발 로테이션의 핵심 선수가 되었다. 13승 20패를 기록했지만, 이닝은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301⅔ 이닝을 소화했고, 2.98 평균자책점(ERA)을 기록했다.
작가 폴 도트리치는 헤인스가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경기를 지는 것에 참을성이 없어 "마운드에 있을 때는 맹렬한 황소로 변했다"고 썼다. 헤인스는 1924년 7월 17일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50년 이상이 지나서야 세인트루이스 투수가 홈에서 노히터를 기록한 것이었다.
헤인스는 1926년, 1931년, 1934년 세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팀에서 투수로서 활약했으며,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2승을 거두었다. 1926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헤인스는 피를 흘리는 물집이 생겨 7회말 만루 상황에서 교체되었고,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가 투입되어 토니 라제리를 삼진으로 잡았다.
커리어가 진행되면서 헤인스는 어린 팀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팝"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너클볼 사용은 다른 투구들이 효과를 잃은 후에도 그의 커리어를 연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너클볼 투수들과 달리, 헤인스는 실제로 손가락 관절로 공을 잡고 최대한 강하게 던졌다.
1932년부터 출전 경기 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1936년, 프랭키 프리쉬 감독은 헤인스가 너무 늙었다고 판단하여 5월까지 그를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투수진이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해에 더 많은 기회를 얻었고, 6월까지 3일 연속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1937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카디널스에서 3번 20승 이상을 거두었고,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2승, 1.0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통산 성적은 210승 158패, 981 탈삼진, 3.64의 평균자책점, 3208⅔ 이닝이다.
3.1.1. 주요 기록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평균자책점 | 탈삼진 | 비고 | |||
|---|---|---|---|---|---|---|---|---|---|---|
| 1918년 | 신시내티 레즈 | 1 | 0 | 0 | 1.80 | 1 | ||||
| 1920년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47 | 13 | 20 | 2.98 | 120 | ||||
| 1921년 | 37 | 18 | 12 | 3.50 | 84 | |||||
| 1922년 | 29 | 11 | 9 | 3.84 | 62 | |||||
| 1923년 | 37 | 20 | 13 | 3.11 | 73 | |||||
| 1924년 | 35 | 8 | 19 | 4.41 | 69 | 노히트 노런 1회 | ||||
| 1925년 | 29 | 13 | 14 | 4.57 | 63 | |||||
| 1926년 | 33 | 13 | 4 | 3.25 | 46 | 월드 시리즈 우승 | ||||
| 1927년 | 38 | 24 | 10 | 2.72 | 89 | |||||
| 1928년 | 33 | 20 | 8 | 3.18 | 77 | |||||
| 1929년 | 28 | 13 | 10 | 5.71 | 59 | |||||
| 1930년 | 29 | 13 | 8 | 4.30 | 68 | |||||
| 1931년 | 19 | 12 | 3 | 3.02 | 27 | 월드 시리즈 우승 (등판 없음) | ||||
| 1932년 | 20 | 3 | 5 | 4.75 | 27 | |||||
| 1933년 | 32 | 9 | 6 | 2.50 | 37 | |||||
| 1934년 | 37 | 4 | 4 | 3.50 | 17 | 월드 시리즈 우승 | ||||
| 1935년 | 30 | 6 | 5 | 3.59 | 24 | |||||
| 1936년 | 25 | 7 | 5 | 3.90 | 19 | |||||
| 1937년 | 16 | 3 | 3 | 4.52 | 18 | |||||
| 통산 (19년) || 555 || 210 || 158 || 3.64 || 981 || | ||||||||||
4. 선수 경력 이후
헤인스는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다. 그 후 약 30년 동안 오하이오주 몽고메리 카운티의 감사관으로 일했다.
1970년 원로위원회의 투표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8년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몽고메리 카운티(오하이오) 평가관으로 28년간 재직한 후 사망했다. 그의 묘는 오하이오주 클레이턴에 있으며, 카디널스가 헤인스의 은퇴 선물로 준 해시계가 있어 지역 명소가 되었다.
4.1. 명예의 전당 헌액 논란
12년 동안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서 8.3% 이상의 득표를 얻지 못한 헤인스는 1970년 원로위원회의 투표를 통해 헌액되었다. 프랭키 프리쉬는 헤인스에 대해 "가치 있고, 가치 있는 사람... 훌륭한 경쟁자이자, 경기장 안팎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세이버메트리션 빌 제임스는 헤인스를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이 없는 10명의 예시 중 하나로 꼽았다.
헤인스의 명예의 전당 선정은 프랭키 프리쉬의 영향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5. 유산
2014년 1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제시 헤인스를 22명의 전 선수 및 관계자 중 한 명으로 발표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박물관의 초대 헌액자로 선정했다. 헌액은 2014년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