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로힐라 전쟁
1. 개요
제1차 로힐라 전쟁은 1774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아와드 태수국을 지원하여 로힐라족을 공격한 사건이다. 아와드 태수는 마라타족에게 쫓겨난 로힐라족에게 도움을 요청받았으나, 금 막대 지불을 거부하자 로힐라족 영토 병합을 결정하고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영국은 아와드를 통해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개입했으며, 미란푸르 카트라 전투에서 로힐라족이 패배하며 람푸르 토후국이 수립되었다. 이 전쟁은 워런 헤이스팅스 탄핵 재판에서 제국주의 정책의 문제점으로 다루어졌다.
| 분쟁 명칭 | 제1차 로힐라 전쟁 |
|---|---|
| 일부 | 로힐라 전쟁 |
| 시기 | 1773년 ~ 1774년 |
| 장소 | 로힐칸드 |
| 결과 | 영국과 오우드 주의 승리, 랄 당 조약 |
| 영향 | 로힐칸드 왕국 합병 및 람푸르 번왕국 창설 |
| 교전 1 | |
|---|---|
| 교전 2 | |
| 지원 세력 |
| 로힐칸드 왕국 | |
|---|---|
| 오우드 주 및 영국 동인도 회사 |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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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인도 -
1770년 벵골 대기근
1770년 벵골 대기근은 1769년부터 1773년까지 동인도 회사 지배하의 벵골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으로, 가뭄과 회사의 경제적 착취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사회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
1774년 분쟁 -
푸가초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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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분쟁 -
러시아-튀르크 전쟁 (1768년~17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768년~1774년)은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 러시아의 남하 정책, 크림 칸국 보호 정책 등의 이유로 발발하여 러시아가 승리하고 퀴췩카이나르자 조약을 통해 흑해 연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며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역사 -
파테푸르 시크리
파테푸르 시크리는 16세기 무굴 제국의 아크바르 황제가 건설한 도시로, 인도에 위치하며, 불란드 다르와자, 자마 마스지드, 살림 치슈티의 묘 등 주요 건축물들을 갖추었으나 물 부족으로 인해 버려졌다. -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역사 -
락슈미 바이
락슈미 바이는 1828년 또는 1835년 인도에서 태어나 잔시 왕국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 사후 영국에 저항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에 참여하여 반영 항쟁을 이끌다 1858년 전사,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2. 배경
마라타족에게 수년 전에 산으로 쫓겨난 로힐라족은 당시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슈자우드다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슈자우드다울라는 그 대가로 금 40개를 요구했지만, 로힐라 추장들은 지불을 거부했다. 그러자 슈자우드다울라는 로힐라족의 영토를 병합하기로 결정하고 워렌 헤이스팅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는 4 루피의 대가로 이루어졌다.
헤이스팅스는 로힐라족이 아와드 측면을 노출하면서 영국에게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1. 로힐라족과 아와드 태수국의 갈등
로힐라족은 마라타족에 의해 수년 전에 산으로 쫓겨났고, 당시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슈자우드다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와드 태수인 슈자우드다울라는 그 대가로 금 40개를 요구했지만, 로힐라 추장들은 지불을 거부했다. 그러자 슈자우드다울라는 로힐칸드를 병합하기로 결정하고 워렌 헤이스팅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는 4 루피의 대가로 이루어졌다.
헤이스팅스는 로힐라족이 아와드 측면을 노출하면서 영국에게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2. 영국의 개입
마라타족에게 수년 전에 산으로 쫓겨난 로힐라족은 당시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슈자우드다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바브는 그 대가로 40개의 금 막대기를 요구했지만, 로힐라 추장들은 지불을 거부했다. 그러자 나바브는 로힐라족의 영토를 병합하기로 결정하고 워렌 헤이스팅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는 40의 대가로 이루어졌다.
헤이스팅스는 로힐라족이 아와드 측면을 노출하면서 영국에게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3. 미란푸르 카트라 전투 (1774년 4월)
하피즈 라흐마트 칸이 이끄는 로힐라군은 1774년 4월 23일 미란푸르 카트라 전투에서 알렉산더 챔피언 대령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하피즈 라흐마트 칸이 전사하면서 로힐라족은 큰 타격을 입고 롤 동 인근 산으로 도망쳤다.
2.4. 게릴라전과 랄 당 포위전
1774년 10월까지 전쟁은 소모전으로 발전했다. 파이줄라 칸은 남은 로힐라족 충성파와 함께 랄 당 언덕에 위치한 숲으로 후퇴했다. 영국군과 아와드군의 연합군은 1774년 8월 말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그 지역을 포위했다. 양측 모두 지쳐 평화를 원했다.
샤 슈자는 다리에 암을 앓고 있어 조기 평화를 원했고, 파이줄라 칸 아래 로힐라족의 단결을 깨뜨리려는 여러 시도 끝에, 파이줄라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시도로 고 하피즈 레흐마트 칸의 아들 모하바트 칸을 석방하는 동시에 파이줄라와 계속 소통했다. 그의 전략은 성공했고, 1774년 10월 7일 파이줄라는 랄 당에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자신이 선택한 지역에 군주국을 부여받아 람푸르국의 창설로 이어졌다.
2.5. 랄 당 조약과 람푸르 번왕국 수립
1774년 10월, 전쟁은 소모전 양상을 띠었다. 파이줄라 칸은 남은 로힐라족 병사들과 함께 랄 당 언덕의 숲으로 후퇴했다. 영국과 아와드 연합군은 1774년 8월 말부터 10월까지 이 지역을 포위했다. 양측 모두 지쳐 평화를 원했다.
슈자우드다울라는 다리에 암을 앓고 있어 빠른 평화를 원했다. 그는 파이줄라 칸을 중심으로 한 로힐라족의 단결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그 일환으로 파이줄라 칸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하피즈 레흐마트 칸의 아들 모하바트 칸을 석방하는 한편, 파이줄라 칸과의 소통도 계속 이어갔다. 그의 전략은 성공했고, 1774년 10월 7일 파이줄라 칸은 랄 당에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자신이 선택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아 람푸르 번왕국을 세웠다.
3. 전쟁의 결과
제1차 로힐라 전쟁으로 로힐칸드는 아와드에 함락되어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많은 로힐라족은 갠지스 강을 건너 도망쳤으며, 이후 영국의 보호 아래 람푸르에 로힐라족 국가가 세워졌다.
3.1. 로힐칸드의 운명
로힐칸드는 아와드에 함락되어 약탈 및 점령당했다. 대부분의 로힐라족은 게릴라전을 시작하거나 이주하기 위해 갠지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 영국의 보호 아래 로힐라족 국가는 람푸르에 세워졌다. 파이줄라 칸은 새로 창설된 람푸르 토후국의 나바브가 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무함마드 알리 칸이 뒤를 이었지만, 파이줄라 칸의 차남이자 동생인 굴람 무함마드 칸 바하두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아프간 로힐라족의 열망은 그가 1794년 제2차 로힐라 전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의 주된 목적은 로힐라족의 이전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굴람 무함마드가 형을 상대로 음모를 꾸며 왕위에 오른 것은 영국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들은 그를 람푸르 토후국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그와 합류하여 영국에 대항했지만, 결국 그는 패배했고, 이제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국가는 무함마드 알리 칸의 어린 아들에게 넘겨졌다.
3.2. 람푸르 번왕국의 성립과 제2차 로힐라 전쟁
파이줄라 칸은 영국의 보호 아래 람푸르 번왕국의 나바브가 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무함마드 알리 칸이 뒤를 이었지만, 파이줄라 칸의 차남이자 동생인 굴람 무함마드 칸 바하두르에게 폐위되었다. 굴람 무함마드 칸은 1794년 제2차 로힐라 전쟁을 일으켜 로힐라족의 이전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굴람 무함마드 칸이 형을 상대로 음모를 꾸며 왕위에 오른 것은 영국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영국은 그를 람푸르 번왕국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많은 아프간인들이 굴람 무함마드 칸과 합류하여 영국에 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람푸르 번왕국은 무함마드 알리 칸의 어린 아들에게 넘어갔다.
4. 워런 헤이스팅스 탄핵 재판
워런 헤이스팅스 탄핵 재판에서 제1차 로힐라 전쟁은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매콜리는 헤이스팅스가 로힐라족을 탄압하고 한 국가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