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인
1. 개요
조영인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능통하고 글을 잘 지었다. 11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로 나갔으며, 명종 대에 좌사원외랑, 정조사, 우승선 등을 역임하고 동지추밀원사로 재추 반열에 올랐다. 신종 대에는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으며, 금나라 사신에게 거짓으로 대응하여 외교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1202년에 사망했으며,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신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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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조씨 -
조충 (1171년)
조충은 1190년 문과에 급제하여 희종 때 국자대사성과 한림학사를 지냈고, 고종 때 거란족 격퇴와 강동성 함락에 공을 세워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까지 오른 고려의 문신으로,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1133년 출생 -
헨리 2세
헨리 2세는 1154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앙주 제국을 건설하고 법률 및 사법 제도를 개혁했으나, 토마스 베켓과의 갈등과 아들들과의 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사망했다. -
1133년 출생 -
이슈트반 4세
이슈트반 4세는 벨러 2세의 아들이자 게저 2세의 동생으로, 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후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으나, 이슈트반 3세에게 패배하고 결국 독살당했다. -
고려의 태자태사 -
김부식
신라 왕족 후예인 김부식은 고려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
고려의 태자태사 -
최충헌
최충헌은 1149년에 태어나 1219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최씨 무신 정권을 수립하고 여러 왕을 옹립하며 도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다가 몽골의 침략 시기까지 최씨 정권을 이끌었다.
2. 생애
조영인은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 1160년(의종 14)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로 나가서는 선정으로 이름이 났다. 명종이 즉위하자 조영인을 시켜 태자를 돌보게 했다.
1174년(명종 4)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돌아왔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해 1185년(명종 15)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해 최문목(崔文牧), 정광우(丁光祐) 등을 선발했다.
1190년(명종 20)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가, 1194년(명종 24)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
1196년(명종 26)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겸직했다가, 이듬해 신종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했다.
1198년(신종 원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명종이 왕위를 물려준 일에 대해 따지면서 “이 조서는 반드시 전 왕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황제의 분부가 계셨소.”라고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난감해하자 조영인은 금나라 사신에게 이렇게 거짓말했다.
이에 금나라 사신이 “정말 그렇다면 전 왕에게 꼭 직접 전달할 필요는 없소.”라며 이튿날 신종에게 조서를 전해 주었다.
이 해 눈이 침침하므로 퇴직을 요청하니, 왕이 그를 문하시중(門下侍中)·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판이부사·태자태사(太子太師)로 올려 주고 사직을 허락했다.
1202년(신종 5년) 70세로 졸하니 왕이 크게 애도하며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뒷날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조영인은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하고 글을 잘 지었다. 1160년(의종 14)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이름을 알렸다. 명종이 즉위하자 조영인을 시켜 태자를 돌보게 했다.
1174년(명종 4)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가서 신년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해 1185년(명종 15)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최문목(崔文牧), 정광우(丁光祐) 등을 선발했다.
1190년(명종 20)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가, 1194년(명종 24)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
1196년(명종 26)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겸직했다.
2.2. 명종 대의 활동
조영인은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하고 글을 잘 지었다. 1160년(의종 14)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로 나가 선정으로 이름을 알렸다. 명종 즉위 후 태자를 돌보았다.
1174년(명종 4)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가서 신년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1185년(명종 15)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최문목(崔文牧), 정광우(丁光祐) 등을 선발했다.
1190년(명종 20)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듬해 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 1194년(명종 24)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 1196년(명종 26)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겸직했다.
1198년(신종 원년) 금나라 사신이 명종의 왕위 이양에 대해 따지자, 조영인은 전 왕이 남쪽 지방에서 병을 치료 중이라며 거짓으로 둘러대 금나라 사신이 신종에게 조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2.3. 신종 대의 활동 및 사망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 1160년(의종 14)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로 나가서는 선정으로 이름이 났다. 명종이 즉위하자 조영인을 시켜 태자를 돌보게 했다.
1174년(명종 4)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돌아왔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해 1185년(명종 15)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해 최문목(崔文牧), 정광우(丁光祐) 등을 선발했다.
1190년(명종 20)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가, 1194년(명종 24)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
1196년(명종 26)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겸직했다가, 이듬해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했다.
1198년(신종 원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명종이 왕위를 물려준 일에 대해 따지면서 “이 조서는 반드시 전 왕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황제의 분부가 계셨소.”라고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난감해하자 조영인은 금나라 사신에게, 전 왕이 남쪽 지방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어 30일쯤 걸리니 꼭 직접 전달하려면 몇 개월 머물러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금나라 사신은 전 왕에게 꼭 직접 전달할 필요는 없다고 하며 이튿날 신종에게 조서를 전해 주었다.
이 해 눈이 침침하여 퇴직을 요청하니, 왕이 그를 문하시중(門下侍中)·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판이부사·태자태사(太子太師)로 올려 주고 사직을 허락했다.
1202년(신종 5년) 70세로 졸하니 왕이 크게 애도하며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뒷날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4. 가족 관계
증조부는 중상승(中尙丞)을 지낸 조주조(趙周祚)이다. 조부 조정신(趙正臣)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다. 아버지 조시언(趙時彦)은 사공(司空)·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문공원(1084년 ~ 1156년)의 셋째 딸이다. 매형은 류영재(柳英材, ? ~ 1170년)로 합문지후를 지내고 좌복야 또는 우복야(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생질은 류광식(? ~ 1221년)이다. 전처는 참지정사(參知政事)·병부상서(兵部尙書) 홍지유(洪至柔)의 딸이며, 후처는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딸이다. 장남은 좌승선(左承宣)을 지낸 조준이고, 차남은 조충(1171년 ~ 1220년)으로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수국사·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