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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E.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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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프 E. 존스턴(1807-1891)은 미국의 군인이자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의 장군이었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미군에서 복무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남북 전쟁 발발 후 남부 연합에 가담하여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지휘권을 잃기도 했다. 애틀랜타 전투에서 셔먼의 북군에 맞서 싸웠으며, 1865년 셔먼에게 항복했다. 전쟁 후에는 철도 회사 사장, 보험 대리점 운영, 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윌리엄 T. 셔먼과의 우정을 유지했다. 셔먼의 장례식에서 추운 날씨에도 모자를 벗어 존경을 표했으며, 이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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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E. 존스턴 - [인물]에 관한 문서

2. 초기 생애 및 경력

조지프 E. 존스턴은 1807년 2월 3일 버지니아주 팜빌 근처 "체리 그로브"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할아버지 피터 존스턴은 1726년 스코틀랜드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했다.[1] 아버지 피터 존스턴 주니어(1763~1831)는 판사였고,[1] 어머니 메리 발렌타인 우드(1769~1825)는 패트릭 헨리의 조카였다.[1]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헨리 리 3세의 지휘하에 복무했던 조셉 에글레스턴 소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그의 형제 찰스 클레멘트 존스턴은 미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그의 조카 존 워필드 존스턴은 미국 상원 의원이었다.[1] 두 사람 모두 버지니아주를 대표했다. 1811년 존스턴 가족은 테네시 국경 근처의 마을인 버지니아주 애빙던(Abingdon, Virginia)으로 이주했고, 그의 아버지 피터는 파네실로라는 이름의 집을 지었다.[2]

조지프 E. 존스턴은 1825년 존 C. 칼훈의 추천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 성적이 보통이었고 징계 벌점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1829년 46명의 생도 중 13위로 졸업했고, 제4 미국 포병대의 소위로 임명되었다.[3] 그는 미국 정규군에서 장교로 승진한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이 되었으며, 1829년 동기인 로버트 E. 리(46명 중 2위)보다 미국 육군에서 더 높은 계급에 올랐다.[4] 1836년에 군을 떠나 토목 공학을 공부했다.[54] 제2차 세미놀 전쟁 당시에는 윌리엄 포프 맥아서가 지휘하는 선박에 민간 지형학 기술자로 승선했다. 1837년 1월 12일,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상륙하던 선원들이 공격을 받았고, 존스턴 또한 "적어도 30발의 총탄 자국"이 옷에 남았으며, 한 발은 두피를 스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다고 말했다.[55]

1838년에 그는 군에 복귀했다. 미국-멕시코 전쟁 중, 존스턴은 두 차례 명예 진급을 받았으며, 세로 고르도 전투와 차풀테펙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전 세미놀 전쟁 당시의 공로로도 명예 진급을 받은 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근무했으며, 1860년 6월 28일에는 미국 육군 주계총감에 임명되었다.

존스턴은 델라웨어주 출신의 연방 의원이자 앤드류 잭슨 대통령 내각의 일원이었던 루이스 맥레인의 딸 리디아 맥레인과 결혼했다. 리디아는 1887년에 사망했다. 존스턴의 형제인 찰스 클레먼트 존스턴도 미국 하원 의원을 지냈고, 조카인 존 W. 존스턴(John Warfield Johnston)은 미국 상원 의원이 되었다. 둘 다 버지니아주 출신이었다.

2. 1. 출생 및 가계

조지프 E. 존스턴은 1807년 2월 3일 버지니아주 팜빌 근처 "체리 그로브"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할아버지 피터 존스턴은 1726년 스코틀랜드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했다.[1] 아버지 피터 존스턴 주니어(1763~1831)는 판사였고,[1] 어머니 메리 발렌타인 우드(1769~1825)는 패트릭 헨리의 조카였다.[1]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헨리 리 3세의 지휘하에 복무했던 조셉 에글레스턴 소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그의 형제 찰스 클레멘트 존스턴은 미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그의 조카 존 워필드 존스턴은 미국 상원 의원이었다.[1] 두 사람 모두 버지니아주를 대표했다. 1811년 존스턴 가족은 테네시 국경 근처의 마을인 버지니아주 애빙던(Abingdon, Virginia)으로 이주했고, 그의 아버지 피터는 파네실로라는 이름의 집을 지었다.[2]

2. 2. 군 경력 (초기)

조지프 E. 존스턴은 1825년 존 C. 칼훈의 추천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29년에 졸업하고 제4 미국 포병대의 소위로 임관했다.[54] 1836년에 군을 떠나 토목 공학을 공부했다.[54] 제2차 세미놀 전쟁 당시에는 윌리엄 포프 맥아서가 지휘하는 선박에 민간 지형학 기술자로 승선했다. 1837년 1월 12일,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상륙하던 선원들이 공격을 받았고, 존스턴 또한 "적어도 30발의 총탄 자국"이 옷에 남았으며, 한 발은 두피를 스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다고 말했다.[55]

1838년에 그는 군에 복귀하여, 1838년 4월 워싱턴 D.C.로 떠났고 7월 7일 지형 공병 소위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날 주피터 인렛에서의 행동과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 탐험으로 계급이 대위로 승진했다.[5] 1841년에는 텍사스-미국 국경 조사의 기술자였고, 1848년부터 1853년까지 텍사스 부서의 수석 지형 공병으로 복무했다.[8]

존스턴의 지도 ''Reconnoissances [sic.] of Routes from San Antonio de Bexar to El Paso del Norte'', 1849


1845년 7월 10일, 존스턴은 루이 맥레인과 그의 아내의 딸인 리디아 멀리건 심스 맥레인(1822~1887)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철도 사장이었고, 저명한 정치인(하원 의원상원 의원(델라웨어 출신), 런던 주재 대사, 그리고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내각 구성원이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6]

미국-멕시코 전쟁의 발발에 존스턴은 열광하여, 베라크루스 포위전에서 중장 윈필드 스콧의 참모로 복무했으며, 스콧에 의해 사전에 주지사에게 항복 요구를 전달하는 장교로 선택되었다. 그는 준장 데이비드 E. 트위그스 휘하의 내륙 이동대 선봉에 있었고, 세로 고르도 전투 이전 정찰 중 포도탄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세로 고르도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계급이 중령으로 승진했다.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동안 그는 경보병 또는 스커미셔로 구성된 부대인 "미국 용기병 연대"의 2인자였다. 그는 콘트라레스와 추루부스코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차풀테펙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으며, 후자 두 전투에 대한 두 번의 계급 승진을 받아 자원봉사자 대령 계급으로 전쟁을 끝냈다.(전투 종료 후 그는 지형 공병의 평시 계급인 대위로 돌아갔다.)[7]

벤자민 프랭클린 라인하트(1860년경)의 초상화


1850년대에 그는 이전 계급을 추구하며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전시 계급인 대령으로 전투 연대에 복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존경하여 새로 편성된 연대 중 하나인 미국 제1기병대의 중령으로 1855년 3월 1일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서 대령 에드윈 V. "불" 서머너 휘하에 임명했다.[9] 이 역할에서 존스턴은 수족에 대항하는 와이오밍 준주에서의 작전과 블리딩 캔자스로 알려진 미래 주에서의 노예제에 대한 폭력 사태에 참여했다.[9]

1856년 가을, 존스턴은 미주리주 제퍼슨 병영의 신병 훈련소로 전근되었다. 1857년 그는 캔자스 국경을 결정하기 위한 측량 탐험대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나중에 대법원 사건으로 이어질 모퉁이 기념비도 포함되었다.[10] 1859년,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은 존스턴의 매형인 로버트 밀리건 맥레인을 멕시코 주재 대사로 임명했고, 존스턴은 그와 함께 베라크루스에 있는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방문하는 여정에 동행했다. 그는 또한 추가적인 적대 행위에 대비하여 전국을 가로지르는 가능한 군사 루트를 검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

미국 육군의 군수감인 준장 토마스 제섭이 1860년 6월 10일에 사망했고, 전쟁장관 플로이드는 조셉 E. 존스턴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존스턴은 1860년 6월 28일 준장으로 승진했다.[11]

2. 3. 결혼

존스턴은 델라웨어주 출신의 연방 의원이자 앤드류 잭슨 대통령 내각의 일원이었던 루이스 맥레인의 딸 리디아 맥레인과 결혼했다.[54] 리디아는 1887년에 사망했다.[54] 존스턴의 형제인 찰스 클레먼트 존스턴도 미국 하원 의원을 지냈고, 조카인 존 W. 존스턴(John Warfield Johnston)은 미국 상원 의원이 되었다.[54] 둘 다 버지니아주 출신이었다.[54]

3. 미합중국 육군 복무

존스턴은 1837년 3월 육군에서 사임하고 토목 공학을 공부했다.[3] 제2차 세미놀 전쟁 당시 그는 윌리엄 포프 맥아서가 이끄는 선박에서 민간 지형 공학자로 일했다. 1838년 1월 12일,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상륙한 선원들이 공격을 받았다. 존스턴은 자신의 옷에 "30개 이상의 총알 구멍"이 있었고, 한 발은 두피를 스쳐 평생 남는 흉터를 남겼다고 말했다. 포병 장교 시절보다 민간인으로 플로리다에서 더 많은 전투 경험을 한 존스턴은 육군에 재입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838년 4월 워싱턴 D.C.로 떠났고 7월 7일 지형 공병 소위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날 주피터 인렛에서의 행동과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 탐험으로 계급이 대위로 승진했다.[5]

1845년 7월 10일 볼티모어에서 존스턴은 루이 맥레인과 그의 아내의 딸인 리디아 멀리건 심스 맥레인(1822~1887)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철도 사장이었고, 저명한 정치인(하원 의원상원 의원(델라웨어 출신), 런던 주재 대사, 그리고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내각 구성원이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6]

존스턴은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윈필드 스콧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7] 베라크루스 포위전에서 스콧 장군에 의해 항복 요구를 전달하는 장교로 선택되기도 했다.[7] 세로 고르도 전투 이전 정찰 중 포도탄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으나, 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중령으로 승진했다.[7] 야전 병원에서 회복한 후 푸에블라에서 군에 재합류했다.[7]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동안 미국 용기병 연대의 2인자로서, 콘트라레스, 추루부스코, 차풀테펙 등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명예 진급했다.[7] 윈필드 스콧은 "존스턴은 위대한 군인이지만, 거의 모든 전투에서 총에 맞는 불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했다.[7]

존스턴은 1841년 텍사스-미국 국경 조사의 기술자였고, 1848년부터 1853년까지 텍사스 부서의 수석 지형 공병으로 복무했다.[8] 1850년대에 그는 이전 계급을 추구하며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전시 계급인 대령으로 전투 연대에 복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존스턴의 지인이었던 전쟁장관 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북전쟁 중 후에도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고, 이는 존스턴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러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존경하여 새로 편성된 연대 중 하나인 미국 제1기병대의 중령으로 1855년 3월 1일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서 대령 에드윈 V. "불" 서머너 휘하에 임명했다.[9] 같은 시기에 로버트 E. 리는 대령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혈연관계 없음) 휘하 미국 제2기병대의 중령으로 임명되었다.[9] 이 역할에서 존스턴은 수족에 대항하는 와이오밍 준주에서의 작전과 블리딩 캔자스로 알려진 미래 주에서의 노예제에 대한 폭력 사태에 참여했다.[9] 그는 나중에 존스턴에 맞서 미국 육군을 지휘할 그의 부하 장교인 대위 조지 B. 맥클렐런과 멘토 관계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9]

1856년 가을, 존스턴은 미주리주 제퍼슨 병영의 신병 훈련소로 전근되었다. 1857년 그는 캔자스 국경을 결정하기 위한 측량 탐험대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나중에 대법원 사건으로 이어질 모퉁이 기념비도 포함되었다.[10] 같은 해 말, 데이비스는 애빙던 출신으로 존스턴의 사촌과 결혼한 존 B. 플로이드에게 전쟁장관직을 넘겼다. 그는 프레스턴 존스턴의 전 보호자였다.[10] 플로이드는 세로 고르도에서의 행동으로 존스턴을 계급이 대령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군 내부에서 인사 편파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다.[10] 1859년,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은 존스턴의 매형인 로버트 밀리건 맥레인을 멕시코 주재 대사로 임명했고, 존스턴은 그와 함께 베라크루스에 있는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방문하는 여정에 동행했다. 그는 또한 추가적인 적대 행위에 대비하여 전국을 가로지르는 가능한 군사 루트를 검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

존스턴은 1860년 6월 28일 준장으로 승진하며 군수감으로 임명되었다.[11] 그는 워싱턴 D.C.에서의 행정 업무보다는 야전 지휘관 직책을 선호했기 때문에 군수감 직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11]

3. 1. 미국-멕시코 전쟁

존스턴은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윈필드 스콧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7] 베라크루스 포위전에서 스콧 장군에 의해 항복 요구를 전달하는 장교로 선택되기도 했다.[7] 세로 고르도 전투 이전 정찰 중 포도탄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으나, 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중령으로 승진했다.[7] 야전 병원에서 회복한 후 푸에블라에서 군에 재합류했다.[7]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동안 미국 용기병 연대의 2인자로서, 콘트라레스, 추루부스코, 차풀테펙 등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명예 진급했다.[7] 윈필드 스콧은 "존스턴은 위대한 군인이지만, 거의 모든 전투에서 총에 맞는 불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했다.[7]

3. 2. 1850년대

존스턴은 1841년 텍사스-미국 국경 조사의 기술자였고, 1848년부터 1853년까지 텍사스 부서의 수석 지형 공병으로 복무했다.[8] 1850년대에 그는 이전 계급을 추구하며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전시 계급인 대령으로 전투 연대에 복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존스턴의 지인이었던 전쟁장관 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북전쟁 중 후에도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고, 이는 존스턴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러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존경하여 새로 편성된 연대 중 하나인 미국 제1기병대의 중령으로 1855년 3월 1일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서 대령 에드윈 V. "불" 서머너 휘하에 임명했다.[9] 같은 시기에 로버트 E. 리는 대령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혈연관계 없음) 휘하 미국 제2기병대의 중령으로 임명되었다.[9] 이 역할에서 존스턴은 수족에 대항하는 와이오밍 준주에서의 작전과 블리딩 캔자스로 알려진 미래 주에서의 노예제에 대한 폭력 사태에 참여했다.[9] 그는 나중에 존스턴에 맞서 미국 육군을 지휘할 그의 부하 장교인 대위 조지 B. 맥클렐런과 멘토 관계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9]

1856년 가을, 존스턴은 미주리주 제퍼슨 병영의 신병 훈련소로 전근되었다. 1857년 그는 캔자스 국경을 결정하기 위한 측량 탐험대를 이끌었는데, 여기에는 나중에 대법원 사건으로 이어질 모퉁이 기념비도 포함되었다.[10] 같은 해 말, 데이비스는 애빙던 출신으로 존스턴의 사촌과 결혼한 존 B. 플로이드에게 전쟁장관직을 넘겼다. 그는 프레스턴 존스턴의 전 보호자였다.[10] 플로이드는 세로 고르도에서의 행동으로 존스턴을 계급이 대령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군 내부에서 인사 편파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다.[10] 1859년,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은 존스턴의 매형인 로버트 밀리건 맥레인을 멕시코 주재 대사로 임명했고, 존스턴은 그와 함께 베라크루스에 있는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방문하는 여정에 동행했다. 그는 또한 추가적인 적대 행위에 대비하여 전국을 가로지르는 가능한 군사 루트를 검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

3. 3. 군수감 임명

존스턴은 1860년 6월 28일 준장으로 승진하며 군수감으로 임명되었다.[11] 그는 워싱턴 D.C.에서의 행정 업무보다는 야전 지휘관 직책을 선호했기 때문에 군수감 직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11]

4. 남북 전쟁

1861년 미국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미합중국 연합국(CSA)에 가입했을 때, 그는 미국 육군에서 최고 계급이었던 准將(준장)직을 사임했다. 남군(CSA)에 합류한 초기에는 버지니아 민병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하퍼스 페리에서 스톤월 잭슨을 해임하고 셰넌도어 군을 조직했다.

1861년 6월 제1차 불런 전투에서는 셰넌도어 계곡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P. G. T. 보리거드 준장의 부대에 합류했지만, 그 지역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자신보다 젊은 장군에게 전투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남군의 승리로 그 공적의 일부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불런 전투 후, 보리거드와 윌리엄 퍼처 마일스를 도와 연합군기의 디자인과 제작에 참여했다. 군기를 정사각형으로 만든 것은 존스턴의 아이디어였다.[56]

8월, 존스턴은 대장으로 승진했다. 오늘날의 4성 장군(Four-star General)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그러나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중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할 수 없었다. 미국 육군에서 남군으로 합류한 장교 중 존스턴이 최고 계급이었기 때문에[57], 그는 자신이 사무엘 쿠퍼, 앨버트 존스턴 및 로버트 E. 리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다섯 명의 장군 중 보리거드만이 하위에 등급이 매겨졌다. 이 일로 존스턴과 제퍼슨 데이비스 사이에 불화가 생겨 전쟁 기간 동안 해소되지 않았다.

1862년 초, 조지 B. 맥클렐런 소장이 이끄는 북군은 버지니아 반도 끝자락에 있는 포트 먼로에 상륙하여 요크타운으로 진격했다.[19] 존스턴은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반도에 배치했다.[19] 맥클렐런이 요크타운 공성전을 준비하자 존스턴은 후퇴하여 윌리엄즈버그와 엘탐스 랜딩에서 방어전을 치렀다.[19] 5월 말, 북군은 리치먼드에서 6마일(9.6km) 이내까지 접근했다.[19]

1862년 3월~5월 반도 작전 지도


존스턴은 치카호미니 강으로 나뉜 맥클렐런 군대의 상황을 이용하여 5월 31일 세븐 파인스 전투(페어 옥스 전투)에서 공격을 개시했다.[20] 이 공격은 전술적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맥클렐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20] 그러나 전투 첫날 존스턴이 포탄 파편에 맞아 어깨와 가슴에 부상을 입으면서[20] G.W. 스미스가 일시적으로 지휘를 맡았다가, 이후 로버트 E. 리가 북버지니아 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21] 리는 6월 말 칠일 전투에서 맥클렐런을 반도에서 몰아냈다.[21]

존스턴은 1862년 11월 24일 서부 전구의 주요 지휘권인 서부 전구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의 테네시 군과 존 C. 펨버턴 중장의 미시시피 및 동 루이지애나 주 사령부를 지휘했다.[22]

존스턴이 서부에서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브래그의 거취였다. 남부 연합 정부와 브래그의 부하들은 스톤즈리버 전투에서 브래그의 성과에 불만을 가졌고, 제퍼슨 데이비스는 존스턴에게 브래그를 해임할지 판단하도록 했다. 존스턴은 브래그의 후임자가 될 것을 고려하여 브래그를 해임하는 것을 거부했다. 데이비스는 브래그를 리치먼드로 소환했으나, 브래그의 아내가 병들어 여행을 할 수 없었고, 존스턴 또한 부상 후유증으로 자리를 유지했다.[23]

비크스버그 전투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1863년 4월 비크스버그 남서쪽 미시시피 강을 건너면서 펨버턴을 기습하고, 잭슨으로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존스턴이 직면한 주요 위기가 시작되었다. 5월 9일, 남부 연합 전쟁장관은 존스턴에게 "즉시 미시시피로 가서 현장 병력의 최고 사령관을 맡으라"고 지시했다.[24] 5월 13일 잭슨에 도착한 존스턴은 미합중국 군대 2개 군단이 도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존스턴은 6,000명의 남부 연합군과 함께 북쪽으로 후퇴했다(잭슨 전투, 5월 14일).[24]

존스턴은 펨버턴에게 도시를 버리고 존스턴의 부대와 합류하여 그랜트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게 하여 포위되는 것을 피하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펨버턴에게 도시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명령했다. 펨버턴의 군대는 1863년 7월 4일에 항복했다. 비크스버그의 함락은 미국에 미시시피 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주었고 남부 연합을 두 동강 냈다.[25]

전쟁 초부터 어려웠던 존스턴과 데이비스의 관계는 비크스버그의 책임에 대한 비난이 공개적으로 오가면서 악화되었다.[26]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해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는 인기 있는 장교였고 리치먼드에 루이 위그폴 상원의원을 비롯한 많은 정치적 동맹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브래그의 군대는 존스턴의 지휘에서 제외되었고, 그는 알라바마와 미시시피만 통제하게 되었다.[27]

비크스버그가 함락되는 동안 미합중국 윌리엄 S. 로제크랜스 장군은 테네시에서 브래그를 공격하여 그에게 채터누가를 비우도록 강요했다. 브래그는 칙카모가 전투(9월 19~20일)에서 승리했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1월 채터누가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브래그는 테네시 군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의 군사 고문으로 리치먼드로 돌아왔다. 데이비스는 고위 군단 사령관인 윌리엄 J. 하디에게 그 직책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P.G.T. 보리거드와 로버트 E. 리를 고려했다. 많은 고민 끝에 데이비스는 1863년 12월 27일 조지아주 돌턴에서 존스턴을 테네시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29]

1864년 봄,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은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로 진격하는 윌리엄 T. 셔먼 소장의 북군에 맞서, 자신의 페닌슐라 전역 전략과 유사한 일련의 후퇴 작전을 수행했다.[30] 그는 반복적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셔먼은 전문적인 우회 기동으로 이를 우회하여 애틀랜타 방향으로 계속 후퇴하게 만들었다.[30] 존스턴은 자신의 군대의 보존을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보고 매우 신중한 전투를 벌였다.[30] 그는 자신의 군대를 잘 지휘하여 미군의 진격을 늦추고 자신이 입은 손실보다 더 큰 손실을 미군에게 입혔다.

셔먼은 5월 4일에 애틀랜타 전역을 시작했다.[31] 존스턴의 테네시 군은 5월 13일에 철수한 달턴 전투에서 연방군과 방어 전투를 벌였고, 그 후 12마일 남쪽 레사카 전투에서 짧은 교전후, 존스턴은 다시 셔먼에게 양보하고 5월 15일에 레사카에서 후퇴했다.[30] 존스턴은 캐스빌에서 공격을 위해 남군을 집결시켰지만, 알 수 없는 규모의 적군이 예상치 못하게 그의 우익에 나타나면서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후퇴했다.[30] 5월 20일, 그들은 다시 8마일 더 남쪽 카터스빌(Cartersville)로 후퇴했다.[31] 1864년 5월은 셔먼의 부대가 또 다른 우회 기동으로 철도 보급선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5월 25일 뉴 홉 교회 전투, 5월 27일 피켓 밀 전투, 5월 28일 달라스 전투에서 남군의 치열한 방어에 막히면서 끝났다. [31]

6월에 셔먼의 부대는 애틀랜타 북부 접근로 주변에서 기동을 계속했다. 6월 22일 콜브 농장 전투가 벌어졌고, 이어 6월 27일 존스턴이 격렬하게 격퇴한 케네소 산 전투에서 셔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규모 정면 공격이 있었다.[32] 그러나 이때 미군은 애틀랜타에서 17마일 이내에 있었고, 서쪽과 북쪽에서 도시를 위협했다.[32] 존스턴은 단 두 달 만에 110마일이 넘는 산악 지형을 내주었고, 남부 연합 정부는 점점 더 좌절하고 불안해졌다.[32]

존스턴이 애틀랜타 이전의 마지막 중요한 장벽인 채터후치 강을 건너 후퇴하자, 데이비스 대통령은 인내심을 잃었다. [32] 7월 초, 데이비스는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을 애틀랜타로 파견했다.[33] 브래그는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존스턴을 교체할 것을 촉구했고,[33] 데이비스는 1864년 7월 17일 애틀랜타 외곽에서 존스턴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33] "남부 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애틀랜타의 운명은 존스턴에 의해 거의 결정되었다."[33] 그의 후임인 존 벨 후드 중장은 애틀랜타를 방어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고,[34] 9월에 애틀랜타를 포기해야 했다.[34] 데이비스가 존스턴을 해임한 결정은 전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결정 중 하나였다.[35]

조지프 E. 존스턴은 경질된 후 조지아주에서 회복에 전념하다가 가족과 함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로 이주하여 사실상 은퇴 생활을 하였다.[36] 그러나 셔먼의 남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대중과 정치권의 압력으로 존스턴의 복귀 요구가 거세졌다.[36][37] 1865년 1월, 의회는 로버트 E. 리에게 총사령관 권한을 부여하고 존스턴을 복직시킬 것을 권고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지휘 능력 부족을 이유로 복직을 거부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1865년 2월 25일 존스턴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39]

존스턴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주와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남부 주의 남부연합군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테네시 군을 포함한 세 개의 야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보급품과 탄약이 부족한 상태였다.[39] 존스턴은 셔먼의 진격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인해 셔먼의 진격을 늦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캐롤라이나 작전


존스턴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버지니아에서 리 군과 합류하여 셔먼을 물리치고 그랜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40] 1865년 3월 19일, 존스턴은 벤턴빌 전투에서 셔먼 군의 좌익을 기습 공격하여 일시적인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와 그린즈버러로 후퇴해야 했다.[40]

조 존스턴 장군의 항복 - 커리어 앤드 아이브스 석판화


4월 9일 애포매톡스 법정에서 리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존스턴은 셔먼과 만나 항복 협상을 진행했다.[41] 1865년 4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근처 베넷 플레이스에서 존스턴은 테네시 군과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에 남아있는 남부연합군을 셔먼에게 항복시켰다.[41] 이는 남북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항복이었다.[41]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항복을 반역 행위로 간주했다.[41] 항복 후 셔먼은 남부연합 병사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고, 민간인들에게도 식량을 배급하는 관대함을 보였다.[42] 존스턴은 셔먼의 관대함에 감사를 표했다.[42]

4. 1. 남부 연합 합류

1861년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주가 미합중국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존스턴은 정규군 준장직에서 사임했는데, 이는 그렇게 한 최고위급 미 육군 장교였다.[12] 그는 버지니아 민병대 소장으로 임관되었으나, 버지니아 의회는 주 군대에 소장 한 명만 필요하다고 결정했고, 로버트 E. 리가 그들의 선택이었다.[13] 그 후 존스턴은 준장 직책의 주 임관 제안을 거절하고, 5월 14일 남부 연합군에 준장으로 임관했다.[13] 존스턴은 5월에 하퍼스페리에서 토마스 J. "스톤월" 잭슨의 지휘권을 해임하고 7월에 셔넌도어 군을 조직했다.[13]

1861년 8월, 존스턴은 정장(현대 미 육군에서 말하는 4성 장군)으로 승진했지만,[16] 미합중국 연합국(CSA)에 가입했을 때, 그는 미국 육군에서 최고 계급이었던 准將(준장)직을 사임했다.[56] 자신이 미 육군을 떠나 남부 연합에 합류한 최고위 장교였기 때문에 새뮤얼 쿠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로버트 E. 리보다 계급이 낮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6][57] 보리거드만이 5명의 새로운 장군 목록에서 존스턴 뒤에 배치되었다. 이로 인해 존스턴과 제퍼슨 데이비스 사이에 전쟁 내내 지속되는 많은 불화가 발생했다.[16]

4. 2. 제1차 불런 전투

1861년 버지니아주가 미합중국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존스턴은 정규군 준장직에서 사임했는데, 이는 그렇게 한 최고위급 미 육군 장교였다.[12] 그는 5월 14일 준장으로 남부 연합군에 임관했다.[13] 존스턴은 5월에 하퍼스페리에서 토마스 J. "스톤월" 잭슨의 지휘권을 해임하고 7월에 셔넌도어 군을 조직했다.[13]

1861년 7월 21일 불런 전투 제1차 전투(매너서스 제1차 전투)에서 존스턴은 소규모 군대를 셔넌도어 밸리에서 신속하게 이동시켜 P. G. T. 보리거드의 군대를 증원했다.[14] 그는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전투의 전술 계획을 보리거드에게 양보했지만, 존스턴의 역할은 남부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다.[14] 정오 무렵, 존스턴은 본부 북쪽의 헨리 하우스 힐이 중요 지점이라고 결정하고 "전투는 저기다. 내가 간다."라고 선언하며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14] 그는 흩어진 부대인 제4 알라바마 부대를 직접 격려하여 남부 연합군 전열을 강화했고, 바나드 비를 위로하고 그에게 병사들을 다시 전투로 이끌 것을 촉구했다. 이후 보리거드는 존스턴을 설득하여 전투의 나머지 기간 동안 증원군 도착을 조직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설득했다.[14] 불런 전투 후 존스턴은 보리거드와 윌리엄 포처 마일스를 도와 남부 연합군 전투기의 설계와 제작을 지원했다. 깃발을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은 존스턴의 아이디어였다.[14]

8월에 존스턴은 정장(4성 장군)으로 승진했지만,[16] 자신이 미 육군을 떠나 남부 연합에 합류한 최고위 장교였기 때문에 새뮤얼 쿠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로버트 E. 리보다 계급이 낮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6] 보리거드만이 5명의 새로운 장군 목록에서 존스턴 뒤에 배치되었다.[16] 이로 인해 존스턴과 제퍼슨 데이비스 사이에 많은 불화가 발생했다.[16]

4. 3. 남부연합군 내 갈등

1861년 8월, 존스턴은 대장(오늘날의 4성 장군)으로 승진했다.[16] 그러나 그는 "구 육군"에서 상위 계급에 있었던 세 명의 다른 장군들, 새뮤얼 쿠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로버트 E. 리가 자신보다 서열이 높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16] 존스턴은 자신이 미 육군을 떠나 남부 연합에 합류한 최고위 장교였으므로 그들보다 서열이 낮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6][57] P. G. T. 보리거드만이 5명의 새로운 장군들 중 존스턴보다 서열이 낮았다.[16]

이러한 서열 문제는 존스턴과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고, 이 갈등은 전쟁 내내 지속되었다.[16]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미군 준장 임관이 참모 장교로서였고 그의 최고위 직책은 중령이었으며, 시드니 존스턴과 리는 모두 대령이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18] 존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과격한 어조의 편지를 보냈고, 데이비스는 그 내용에 불쾌감을 느껴 그의 내각과 그 내용을 논의할 정도였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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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그것은(고위 장군의 계급) 30년 이상의 힘들고 위험한 봉사로 얻은 군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공정한 명성을 훼손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뿐이었습니다. 여러 상처의 흉터, 모두 전투 최전방에서 정직하게 받은 상처와 아버지의 혁명 검. 그것은 그의 존경받는 손에서 나에게 건네졌습니다. 불명예의 얼룩 없이. 그 칼날은 그의 손에서 제 손으로 넘어왔을 때처럼 여전히 흠집이 없습니다. 저는 계급이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땅, 가정과 화롯불,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어머니 버지니아, 제 고향 남부의 남성들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에서 그것을 뽑았습니다.

|source= —존스턴의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보낸 편지, 1861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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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반도 전역

1862년 초, 조지 B. 맥클렐런 소장이 이끄는 북군은 버지니아 반도 끝자락에 있는 포트 먼로에 상륙하여 요크타운으로 진격했다.[19] 존스턴은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반도에 배치했다.[19] 맥클렐런이 요크타운 공성전을 준비하자 존스턴은 후퇴하여 윌리엄즈버그와 엘탐스 랜딩에서 방어전을 치렀다.[19] 5월 말, 북군은 리치먼드에서 6마일(9.6km) 이내까지 접근했다.[19]

존스턴은 치카호미니 강으로 나뉜 맥클렐런 군대의 상황을 이용하여 5월 31일 세븐 파인스 전투(페어 옥스 전투)에서 공격을 개시했다.[20] 이 공격은 전술적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맥클렐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20] 그러나 전투 첫날 존스턴이 포탄 파편에 맞아 어깨와 가슴에 부상을 입으면서[20] G.W. 스미스가 일시적으로 지휘를 맡았다가, 이후 로버트 E. 리가 북버지니아 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21] 리는 6월 말 칠일 전투에서 맥클렐런을 반도에서 몰아냈다.[21]

4. 5. 서부 전선

존스턴은 1862년 11월 24일 서부 전구(미국 남북 전쟁)의 주요 지휘권인 서부 전구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의 테네시 군과 존 C. 펨버턴 중장의 미시시피 및 동 루이지애나 주 사령부를 지휘했다.[22]

존스턴이 서부에서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브래그의 거취였다. 남부 연합 정부와 브래그의 부하들은 스톤즈리버 전투에서 브래그의 성과에 불만을 가졌고, 제퍼슨 데이비스는 존스턴에게 브래그를 해임할지 판단하도록 했다. 존스턴은 브래그의 후임자가 될 것을 고려하여 브래그를 해임하는 것을 거부했다. 데이비스는 브래그를 리치먼드로 소환했으나, 브래그의 아내가 병들어 여행을 할 수 없었고, 존스턴 또한 부상 후유증으로 자리를 유지했다.[23]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1863년 4월 비크스버그 남서쪽 미시시피 강을 건너면서 펨버턴을 기습하고, 잭슨으로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존스턴이 직면한 주요 위기가 시작되었다. 5월 9일, 남부 연합 전쟁장관은 존스턴에게 "즉시 미시시피로 가서 현장 병력의 최고 사령관을 맡으라"고 지시했다.[24] 5월 13일 잭슨에 도착한 존스턴은 미합중국 군대 2개 군단이 도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존스턴은 6,000명의 남부 연합군과 함께 북쪽으로 후퇴했다(잭슨 전투, 5월 14일).[24]

존스턴은 펨버턴에게 도시를 버리고 존스턴의 부대와 합류하여 그랜트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게 하여 포위되는 것을 피하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펨버턴에게 도시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명령했다. 펨버턴의 군대는 1863년 7월 4일에 항복했다. 비크스버그의 함락은 미국에 미시시피 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주었고 남부 연합을 두 동강 냈다.[25]

전쟁 초부터 어려웠던 존스턴과 데이비스의 관계는 비크스버그의 책임에 대한 비난이 공개적으로 오가면서 악화되었다.[26]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해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는 인기 있는 장교였고 리치먼드에 루이 위그폴 상원의원을 비롯한 많은 정치적 동맹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브래그의 군대는 존스턴의 지휘에서 제외되었고, 그는 알라바마와 미시시피만 통제하게 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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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대통령은 조 존스턴이 그에게 준 모든 문제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조 장군도 복리로 그 마음을 되돌려줍니다. 그의 제프 데이비스에 대한 증오는 종교에 달합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모든 것을 물들입니다.

|source= —일기 작가 메리 체스넛[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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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크스버그가 함락되는 동안 미합중국 윌리엄 S. 로제크랜스 장군은 테네시에서 브래그를 공격하여 그에게 채터누가를 비우도록 강요했다. 브래그는 칙카모가 전투(9월 19~20일)에서 승리했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1월 채터누가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브래그는 테네시 군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의 군사 고문으로 리치먼드로 돌아왔다. 데이비스는 고위 군단 사령관인 윌리엄 J. 하디에게 그 직책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P.G.T. 보리거드와 로버트 E. 리를 고려했다. 많은 고민 끝에 데이비스는 1863년 12월 27일 조지아주 돌턴에서 존스턴을 테네시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29]

4. 6. 애틀랜타 전역

1864년 봄,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은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로 진격하는 윌리엄 T. 셔먼 소장의 북군에 맞서, 자신의 페닌슐라 전역 전략과 유사한 일련의 후퇴 작전을 수행했다.[30] 그는 반복적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셔먼은 전문적인 우회 기동으로 이를 우회하여 애틀랜타 방향으로 계속 후퇴하게 만들었다.[30] 존스턴은 자신의 군대의 보존을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보고 매우 신중한 전투를 벌였다.[30] 그는 자신의 군대를 잘 지휘하여 미군의 진격을 늦추고 자신이 입은 손실보다 더 큰 손실을 미군에게 입혔다.

셔먼은 5월 4일에 애틀랜타 전역을 시작했다.[31] 존스턴의 테네시 군은 5월 13일에 철수한 달턴 전투에서 연방군과 방어 전투를 벌였고, 그 후 12마일 남쪽 레사카 전투에서 짧은 교전후, 존스턴은 다시 셔먼에게 양보하고 5월 15일에 레사카에서 후퇴했다.[30] 존스턴은 캐스빌에서 공격을 위해 남군을 집결시켰지만, 알 수 없는 규모의 적군이 예상치 못하게 그의 우익에 나타나면서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후퇴했다.[30] 5월 20일, 그들은 다시 8마일 더 남쪽 카터스빌(Cartersville)로 후퇴했다.[31] 1864년 5월은 셔먼의 부대가 또 다른 우회 기동으로 철도 보급선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5월 25일 뉴 홉 교회 전투, 5월 27일 피켓 밀 전투, 5월 28일 달라스 전투에서 남군의 치열한 방어에 막히면서 끝났다. [31]

6월에 셔먼의 부대는 애틀랜타 북부 접근로 주변에서 기동을 계속했다. 6월 22일 콜브 농장 전투가 벌어졌고, 이어 6월 27일 존스턴이 격렬하게 격퇴한 케네소 산 전투에서 셔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규모 정면 공격이 있었다.[32] 그러나 이때 미군은 애틀랜타에서 17마일 이내에 있었고, 서쪽과 북쪽에서 도시를 위협했다.[32] 존스턴은 단 두 달 만에 110마일이 넘는 산악 지형을 내주었고, 남부 연합 정부는 점점 더 좌절하고 불안해졌다.[32]

존스턴이 애틀랜타 이전의 마지막 중요한 장벽인 채터후치 강을 건너 후퇴하자, 데이비스 대통령은 인내심을 잃었다. [32] 7월 초, 데이비스는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을 애틀랜타로 파견했다.[33] 브래그는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존스턴을 교체할 것을 촉구했고,[33] 데이비스는 1864년 7월 17일 애틀랜타 외곽에서 존스턴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33] "남부 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애틀랜타의 운명은 존스턴에 의해 거의 결정되었다."[33] 그의 후임인 존 벨 후드 중장은 애틀랜타를 방어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고,[34] 9월에 애틀랜타를 포기해야 했다.[34] 데이비스가 존스턴을 해임한 결정은 전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결정 중 하나였다.[35]

4. 7. 캐롤라이나 전역 및 항복

조지프 E. 존스턴은 경질된 후 조지아주에서 회복에 전념하다가 가족과 함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로 이주하여 사실상 은퇴 생활을 하였다.[36] 그러나 셔먼의 남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대중과 정치권의 압력으로 존스턴의 복귀 요구가 거세졌다.[36][37] 1865년 1월, 의회는 로버트 E. 리에게 총사령관 권한을 부여하고 존스턴을 복직시킬 것을 권고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지휘 능력 부족을 이유로 복직을 거부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1865년 2월 25일 존스턴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39]

존스턴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주와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남부 주의 남부연합군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테네시 군을 포함한 세 개의 야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보급품과 탄약이 부족한 상태였다.[39] 존스턴은 셔먼의 진격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인해 셔먼의 진격을 늦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존스턴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버지니아에서 리 군과 합류하여 셔먼을 물리치고 그랜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40] 1865년 3월 19일, 존스턴은 벤턴빌 전투에서 셔먼 군의 좌익을 기습 공격하여 일시적인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와 그린즈버러로 후퇴해야 했다.[40]

4월 9일 애포매톡스 법정에서 리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존스턴은 셔먼과 만나 항복 협상을 진행했다.[41] 1865년 4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근처 베넷 플레이스에서 존스턴은 테네시 군과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에 남아있는 남부연합군을 셔먼에게 항복시켰다.[41] 이는 남북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항복이었다.[41]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항복을 반역 행위로 간주했다.[41] 항복 후 셔먼은 남부연합 병사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고, 민간인들에게도 식량을 배급하는 관대함을 보였다.[42] 존스턴은 셔먼의 관대함에 감사를 표했다.[42]

5. 남북 전쟁 이후

존스턴은 1866년 5월부터 1867년 11월까지 앨라배마 앤 테네시 리버 철도 회사의 사장을 역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셀마, 로마 앤 달튼 철도로 이름이 바뀌었다.[43] 그러나 이 직책에 싫증을 느꼈고, 회사는 자본 부족으로 실패했다. 1868년부터 1877년까지는 뉴욕 생명 보험 회사와 영국 보험 회사의 보험 대리점을 운영하는 조셉 E. 존스턴 & 컴퍼니를 설립하여 사바나(조지아주)에서 운영했다.[43] 영국 회사는 리버풀 앤 런던 앤 글로브 보험 회사였으며, 4년 만에 남부 깊숙한 곳에 120개가 넘는 대리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44] 1876년에서 1877년 겨울 사이에는 사바나에서 리치먼드로 이주했다.[47][48]

1874년, 존스턴은 회고록 "군사 작전의 서술"을 출판하여 제퍼슨 데이비스와 다른 남부연합 장군들을 비판했다.[44] 그는 남군에서 장군으로서의 자신의 계급에 대한 불만을 되풀이하며 신중한 전투가였던 자신의 경력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 책은 판매가 부진했고 출판사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44]

1879년부터 1881년까지 제46차 의회에서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49] 그린백당 후보 윌리엄 W. 뉴먼을 누르고 58.1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880년 재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이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행정부에서 철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49]

존스턴은 윌리엄 T. 셔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면전에서 셔먼을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셔먼과 존스턴은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고, 존스턴이 워싱턴 D.C.를 방문할 때마다 친목을 다지는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셔먼이 사망하자 존스턴은 그의 장례식에서 명예 운구자로 일했다. 1891년 2월 19일 뉴욕시에서 열린 장례 행렬에서 그는 날씨가 춥고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존경의 표시로 모자를 벗었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누군가가 그에게 모자를 쓰라고 요청하자, 존스턴은 "제가 그의 자리에 있고 그가 여기 제 자리에 있다면, 그는 모자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50] 그는 그날 감기에 걸렸고, 그것은 폐렴으로 발전했고, 존스턴은 1891년 3월 21일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그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그린 마운트 묘지에 아내 옆에 묻혔다.[50]

6. 유산

존스턴의 자료들은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의 특별 소장 연구 센터(얼 그레그 스윔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51] 1869년에서 1870년 사이의 로버트 E. 리와 조지프 E. 존스턴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조지아주 돌턴에 있는 존스턴 동상(그가 테네시 군의 지휘를 맡았던 곳), 노스캐롤라이나주 벤턴빌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존스턴 동상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912년 조지아주 돌턴에 존스턴을 기리는 공공 기념물이 세워졌다. 2010년 3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벤턴빌 전투터에는 존스턴의 청동상이 헌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해군은 존스턴을 기리는 자유선(113번)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52]

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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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79년 선거하원의원 (버지니아 제3선거구)46대민주당58.11%5,787표1위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당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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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Joseph E. Johnston: A Civil War Biography https://books.google[...] W. W. Norton & Company 1994
[56] 문서 Coski
[57] 문서 사무엘 쿠퍼, 로버트 E 리, 알버트 존스턴, 존스턴 계급
[58] 문서 북군과 남군의 전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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