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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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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연은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김삿갓'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홍경래의 난 당시 조부 김익순이 반란군에 항복한 것을 비판하는 시를 쓴 후, 조부의 행적을 알게 되자 삿갓을 쓰고 전국을 유랑하며 풍자와 해학이 담긴 시를 지었다. 김병연은 1863년 전라도 동복에서 사망했으며,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위치해 있다. 그는 2002년 9월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고, 그의 묘가 있는 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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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기본 정보
이름김병연
한자 이름金炳淵
별칭김삿갓, 김입, 김난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
성심(性深)
직업시인
출생일1807년 3월 13일
출생지경기도 양주 (추정)
사망일1863년 3월 29일
사망지전라도 화순 동복
묘소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국적조선
본관안동
활동 기간1826년 3월 ~ 1862년 11월
종교유교(성리학)
웹사이트두피디아 김병연
가족
아버지김안근
어머니이씨
배우자본처: 장수 황씨
측실: 경주 최씨 가련
자녀장남: 김학균 (형 김병하의 양자)
차남: 김익균
삼남: 김영규
친조부김익순
외조부이유수
형제형: 김병하
아우: 김병호, 김병두
학력
학력 사항1826년 3월, 강원도 영월도호부 영월군 향시 백일장 소과 과거 장원 급제
기타 정보
특징방랑 시인
주요 작품김병연 작품 목록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세워진 방랑 시인 김삿갓(김병연) 선생 기념 관련 조형물

2. 생애와 배경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13][14] 그는 한자로써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김병연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이고,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1636년 당시의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 종형이 되는 이이자 형조참판 등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낸 김시태, 고조부는 충청도 전의현감 등을 지낸 김관행, 증조부는 함경도 경원부사 등을 지낸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 1764년생~1812년졸)이 1811년 홍경래의 난평안도선천부사로 있다가, 홍경래가 이끄는 반란군한테 전격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로써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결국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장(竹杖, 대나무 지팡이)이라는 단장(單杖) 한 토막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그렇게 그는 일평생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1807년(순조 7) 3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막내 아우 김병두(金炳浢, 1809년~1810년)는 두 살 때에 질병으로 일찍 죽었으며,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갓 전보 신임 발령받은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平安道 宣川府事 兼 防禦使)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당시까지 함경도 함흥(咸鏡道 咸興)의 관아(관청)의 중군(中軍: 정3품 관직)으로 있다가, 평안도 선천 부사방어사로 전관 조처되어 온지도 아직 불과 서너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다괏상과 술안주가 함께 놓여진 연회(잔치)를 열었는데, 다과연회(잔치)가 끝난 익일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당시 신임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防禦使)였던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15]

김익순은 그로 인해 1812년 조정으로부터 참수에 처해졌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이(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이 과정에서는 아우 김병호(金炳浩, 1808년~1819년)도 질병으로 죽었으나,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남은 두 형제를 키워내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1826년 3월,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2. 1. 가문과 출생

김병연(金炳淵)의 본관안동 김씨이다. 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1] 한자로는 "김립"(金笠)이라고 쓰며, 훈독식으로 "김삿갓", 또는 한자음으로 "김립(김립)", "김입(김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삿갓은 그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한 별칭이다.[3]

대한민국에서는 기지가 풍부하고, 풍류하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삶과 작품이 매우 인기가 많다.[4][5] 조선 전역을 방랑하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서민들에게 친숙했지만,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많이 유실되었다.[6] 일제강점기 1939년에 이응수에 의해 처음으로 「김삿갓 시집」이 편찬되었다.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 방랑하며 자유분방한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良寛이나 산두화에 비견된다.[9]

2. 2. 홍경래의 난과 조부 김익순

김병연은 20세가 될 때까지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당시 적장에게 항복하여 역적으로 몰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 김익순의 아들들은 김병연을 포함한 손자들이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 사실을 숨겼다. 김병연은 할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1]

시간이 흘러 강원도 영월 백일장에서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그가 자신의 가족과 관계없는 인물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이후 어머니로부터 진실을 듣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껴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올랐다.[1]

2. 3. 방랑의 시작과 삿갓

김병연이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다.[1]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 삿갓을 파는 집에 가서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대나무 지팡이(죽장, 竹杖)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충청도 홍성(지금의 대한민국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1] 삿갓은 그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한 별칭이다.[3]

3. 방랑 생활과 문학 세계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며, 본관안동 김씨이고, 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1] 한자로는 "'''김립'''"(金笠)이라고 쓰며, 훈독식으로 "김삿갓", 또는 한자음으로 "김립(김립)", "김입(김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일본에서는 "金笠"이라고 쓰고, 발음의 복잡함을 피해 "삿갓"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2] 삿갓은 그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한 별칭이다.[3]

대한민국에서는 기지가 풍부하고, 풍류하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삶과 작품이 매우 인기가 많아, 최근 소설이나 TV 드라마에서도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4][5]

조선 전역을 방랑하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서민들에게 친숙했지만,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많이 유실되었다.[6]

일제강점기 1939년에 이응수에 의해 처음으로 「김삿갓 시집」(경성학예사〈조선문고〉)이 편찬되었다. 일본에서는 당시 조선을 여행 중이던 미요시 다쓰지가 그 「김삿갓 시집」을 읽고, 1941년에 잡지 『문학계』 4월호부터 5회에 걸쳐 「방랑 시인 김삿갓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7]했고, 사토 하루오가 김소운의 한국시 역시집 『유색의 구름』에 쓴 서문 「조선의 시인들을 일본 시단에 맞이하고자 하는 말」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다.[8]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 방랑하며 자유분방한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良寛이나 산두화에 비견된다.[9]

3. 1. 전국 유랑과 민중과의 교감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며, 본관안동 김씨이고, 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1] 한자로는 "'''김립'''"(金笠)이라고 쓰며, 훈독식으로 "김삿갓", 또는 한자음으로 "김립(김립)", "김입(김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삿갓은 그가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한 별칭이다.[3]

김삿갓은 조선 전역을 방랑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많이 유실되었다.[6] 대한민국에서는 기지가 풍부하고, 풍류하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삶과 작품이 매우 인기가 많아, 최근 소설이나 TV 드라마에서도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4][5]

일제강점기 1939년에 이응수에 의해 처음으로 「김삿갓 시집」(경성학예사〈조선문고〉)이 편찬되었다.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 방랑하며 자유분방한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良寛이나 산두화에 비견된다.[9]

3. 2. 풍자와 해학, 사회 비판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며, 본관안동 김씨이다. 성심(性深), 호는 난고이다. 한자로는 "'''김립'''"(金笠)이라고 쓰며, 훈독식으로 "김삿갓", 또는 한자음으로 "김립(김립)", "김입(김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하여 삿갓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기지가 풍부하고, 풍류하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삶과 작품이 매우 인기가 많다. 조선 전역을 방랑하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서민들에게 친숙했지만,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많이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 1939년에 이응수에 의해 처음으로 「김삿갓 시집」(경성학예사〈조선문고〉)이 편찬되었다.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 방랑하며 자유분방한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良寛이나 산두화에 비견된다.

3. 3. 한시와 구전 문학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며, 본관안동 김씨이다. 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1] 한자로는 "'''김립'''"(金笠)이라고 쓰며, 훈독식으로 "김삿갓", 또는 한자음으로 "김립(김립)", "김입(김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 그는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한 데서 유래하여 삿갓은 "삿갓"을 의미하는 별칭으로 사용되었다.[3]

대한민국에서는 기지가 풍부하고, 풍류하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삶과 작품이 매우 인기가 많다.[4][5] 조선 전역을 방랑하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서민들에게 친숙했지만,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많이 유실되었다.[6]

일제강점기 1939년에 이응수에 의해 처음으로 「김삿갓 시집」(경성학예사〈조선문고〉)이 편찬되었다. 일본에서는 당시 조선을 여행 중이던 미요시 다쓰지가 그 「김삿갓 시집」을 읽고, 1941년에 잡지 『문학계』 4월호부터 5회에 걸쳐 「방랑 시인 김삿갓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했다.[7] 사토 하루오가 김소운의 한국시 역시집 『유색의 구름』에 쓴 서문 「조선의 시인들을 일본 시단에 맞이하고자 하는 말」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다.[8]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 방랑하며 자유분방한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良寛이나 산두화에 비견된다.[9]

4. 사망과 논란, 그리고 재평가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金翼均)이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차라리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도 동복현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전라도 동복 사는 어느 선비 (安) 참봉[16] 사갓댁의 사랑방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뒤늦게도 둘째 아들 김익균이 수몇달 늦은 선친의 부고(訃告)를 전해 듣고 전라도 동복으로 달려가 이듬해 1864년(고종 1) 3월 29일, 1주기가 나흘 넘어 지난 당시의 아버지의 유골(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이장 및 운구하여, 재차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곳은 훗날 지금의 강원 영월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4. 1. 전라도 동복에서의 죽음

김병연은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 가족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16]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이 귀가를 권유했지만, 김병연은 이를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16]

철종 14년(1863년) 3월 25일 김병연은 전라도 동복 참봉[16] 사갓댁 사랑방에서 병으로 사망했다.[16] 둘째 아들 김익균은 뒤늦게 부고를 듣고 전라도 동복으로 가서 이듬해 고종 1년(1864년) 3월 29일에 아버지의 유골을 강원도 영월로 이장하였다.[16]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 곳은 훗날 강원 영월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4. 2. 김삿갓의 기거 여부 논란

2009년 9월, 전라남도 화순군 군청 관계자는 조선 말기의 방랑 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이 동복현에서 6년 동안 머물렀다는 것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17]

김삿갓은 전국을 방랑하다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1863년 3월 25일(철종 14년) 향년 57세로 전라도 동복현(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한 선비 집에서 객사하였다.

이후 1864년 3월 29일(고종 1년), 부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아들 익균이 부친의 유골을 강원도 영월군으로 이장하였다.

4. 3. 현대적 재조명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2009년 10월 20일에는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5. 가족 관계

김익순의 손자이자 김안근과 함평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18] 큰형은 김병하이며, 형수는 청주 이씨이다. 본처는 장수 황씨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김학균은 큰형 김병하에게 양자로 보냈다. 차남은 김익균이다. 측실 경주 최씨와의 사이에서는 서삼남 김영규를 두었다. 김영규는 1878년 음서로 천거되어 전라우후 등을 지냈고, 1891년부터 1895년까지 시종원 시어를 역임했다. 첫째 동생 김병호와 막내 동생 김병두는 어린 시절 질병으로 요절했다.

6. 김삿갓에 대한 평가와 현대적 의의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7. 문화적 영향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남)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7. 1. 김삿갓 문학상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남)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7. 2. 대중문화 속 김삿갓


  • 1957년 영화 《김삿갓》에서 배우 박경주가 김삿갓 역을 연기했다.
  • 2002년 MBC 드라마 《상도》에서는 배우 정기성이 김삿갓을 연기했다.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은 200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7. 3. 김삿갓면

그는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2009년 10월 20일,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7. 4. 이 달의 문화 인물

김병연은 2002년 9월 한국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200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개칭되었다.

참조

[1] 서적 楚辞 離騷 崔碩義
[2] 서적 金笠詩選
[3] 서적 放浪の天才詩人 金笠
[4] 서적 放浪の天才詩人 金笠
[5] 웹사이트 金炳淵(キム・ピョンヨン) https://web.archive.[...] null
[6] 서적 金笠詩選
[7] 서적 三好達治全集 第七巻
[8] 서적 朝鮮詩集 岩波書店 1954
[9] 서적 放浪の天才詩人 金笠
[10] 문서 형 김병하(金炳河)에게 양자(養子)로 출계
[11] 문서 순조 7년
[12] 문서 철종 14년
[13] 웹사이트 브리태니커 - 김병연 http://enc.daum.net/[...]
[14] 웹사이트 두산백과사전 - 김병연 http://100.naver.com[...]
[15] 문서 안동 김씨 문헌록
[16] 문서 1812년(순조 12년) 전라도 화순 생으로, 1841년(헌종 7년)부터 1847년(헌종 13년)까지 잠시 6년 동안 참봉 등을 지낸, 탐진 안씨 집안의 후손.
[17] 뉴스 '방랑시인' 김삿갓 화순에 6년간 기거?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09-09
[18] 문서 이유수(외조부)는 경상 좌병사 이각의 형(兄)인 이관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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