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T.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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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프 T. 화이트는 1982년 대한민국 주둔 미군 제31보병연대 소속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월북한 미군이다. 그는 북한으로 망명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는 비디오를 공개했으며, 1985년 청천강에서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이트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선거 운동에 참여하고, YMCA 모의 입법부에 참석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조지프 T. 화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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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의 화이트
출생일1961년 11월 5일
사망일1985년 8월 17일 (향년 23세)
출생지세인트루이스, 미주리주, 미국
사망 장소청천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명해당사항 없음
병역
소속
(1982년–1985년)
복무 기간1981년–1982년 (탈영)
군종미국 육군
계급이병
부대제1대대, 제31보병연대
참전해당사항 없음
훈장해당사항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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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및 경력

조지프 T. 화이트는 미국 육군 복무 중 1982년 북한으로 월북한 인물이다.

1965년 찰스 로버트 젠킨스 이후 마지막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간 미군인 화이트는, 젠킨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탈영 직후 기자 회견에서 국영 텔레비전에 한 번 등장했다. 젠킨스는 화이트가 다른 미국 탈영병과 함께 살 계획이었으나 무산되었고, 이후 화이트가 간질 발작을 겪고 마비되었다는 소식을 정부 관계자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1983년 2월, 화이트의 부모는 아들이 북한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1985년 11월, 화이트가 1985년 8월 청천강에서 익사했으며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는 1986년미주리주 하원의원 딕 게파트에 의해 공개되었다.

2.1. 미국에서의 초기 생애

조지프 T. 화이트는 노벌과 캐슬린 화이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는 투표권이 생기기 전에 1980년 레이건 대통령 선거 운동에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1979년에는 YMCA 모의 입법부에 참석하여 18세 남성 모두에게 11개월의 예비 군 복무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며, 보이스카우트 회원이자 근육 위축증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1980년에는 모의 입법부에서 미주리가 연방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또 다른 법안과 연방 정부의 "현존하는 남용과 불의" 목록을 발표했다. 웨스트포인트 입학이 거부되자 그는 직접 육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부모의 권유로 분빌에 있는 캠퍼 군사학교에 다녔다. 학교 사령관은 화이트를 내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 후 화이트는 학교를 중퇴하고 보병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2.2. 대한민국 복무와 월북

기본 및 고급 개별 훈련을 마친 후, 화이트는 대한민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인 제1대대, 제31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1982년 8월 28일 오전 2시경, 그는 DMZ로 들어가는 문 중 하나의 자물쇠를 총으로 쏴서 열었고, 개성 근처의 오엘레트 경계초소에서 DMZ를 걸어가는 모습을 동료 병사들이 목격했다. 그는 DMZ 남한 쪽에 매설된 지뢰의 배치도를 포함한 현장에서 훔친 서류가 가득 든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에게 항복했다. 그는 1965년 1월 이후 북한에 망명을 요청한 최초의 미국 군인이었고 한국 전쟁 이후 다섯 번째였다.

유엔군 사령부 대표는 화이트와 면담하여 탈영 이유를 질문하려 했으나, 북한 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북한 당국은 화이트의 비디오를 공개했는데, 그는 그 비디오에서 미국의 "부패, 범죄, 부도덕, 약함, 쾌락주의"를 비난하며, "미국이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탈영했다고 주장했고, 이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3. 북한에서의 생활과 사망

1982년 8월 28일 오전 2시경, 화이트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문의 자물쇠를 총으로 쏴 잠금을 해제하고 개성 근처의 오엘레트 경계초소에서 비무장지대를 걸어가는 모습이 동료 병사들에게 목격되었다. 그는 비무장지대 남한 쪽에 매설된 지뢰 배치도를 포함하여 현장에서 훔친 서류가 가득 든 여행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에 항복했는데, 이는 1965년 1월 이후 북한에 망명을 요청한 최초의 미국 군인이자 한국 전쟁 이후 다섯 번째 사례였다.

북한 당국은 유엔군 사령부 대표가 화이트와 면담하여 탈영 이유를 질문하려는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북한은 화이트의 비디오를 공개했는데, 그는 이 비디오에서 미국의 "부패, 범죄, 부도덕, 약함, 쾌락주의"를 비난하며, "미국이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탈영했다고 주장했고, 이어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3.1. 북한에서의 생활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화이트는 탈영 직후 기자 회견에서 국영 텔레비전에 한 번 등장했다. 젠킨스는 화이트가 다른 미국 탈영병과 함께 살 계획이었지만 무산되었다고 언급했다. 1983년 2월, 화이트의 부모는 아들이 북한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3.2. 사망

1985년 11월, 화이트의 부모는 아들이 1985년 8월 청천강에서 익사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의 사본은 당시 미주리주를 대표하는 의원이었던 딕 게파트가 1986년 초에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