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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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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사도는 북송 시대의 시인으로, 강서시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벼슬길에 늦게 나섰으며, 소식에게 가르침을 받아 소문육군자로 불렸다. 그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하여 서주 학관 교수를 시작으로 영주 교수를 역임했으나, 신당의 득세로 어려움을 겪었다. 49세에 교사례에 참석했다가 한질로 사망했다. 그의 시는 두보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정감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서로는 『후산집』, 『후산시화』 등이 있다.

2. 생애

증공에게 발탁되었고, 소식에게 가르침을 받아 소문육군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했기 때문에 제대로 벼슬을 얻지 못하고 빈궁하게 지내며, 처자를 향리에 맡기고 떨어져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주교수, 태상박사를 역임했다. 벼슬을 구하는 마음과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구법당이 추방당했을 때 은거하며 한가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늦게나마 비서성 정자가 된 것을 감사히 여기고 달게 봉직했으나, 휘종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년) 겨울 교사례(郊祀禮)에 나갔다가 한질에 걸려 49세로 죽었다.[2] 교사례는 고대 제왕들이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던 의례인데,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얻어 온 털옷을 입지 않고 나가 한질에 걸렸다고 한다. 저서로는 『후산집』, 『후산시화』[4], 『후산담총』 등이 있다.

2. 1. 초기 생애

진사도는 1053년 북송 인종 때 팽성(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의 임지를 따라 옮겨 다녔으며, 16세 무렵 수도 개봉에서 증공을 만나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25세 때 부친상을 당했고, 29세에 결혼하였다. 그는 왕안석의 신법과 신학을 싫어해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아 재야인사로서 궁핍한 생활을 했다. 33세 때 장인이 관직을 받아 촉 지방으로 떠날 때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어 딸려 보냈으며, 이때 생이별을 읊은 진솔한 시를 많이 지었다.[2]

2. 2. 관직 생활과 어려움

왕안석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아, 재야인사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33세 때 처자식을 장인의 임지인 촉(蜀) 지방으로 보내야 했으며, 이때의 생이별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원우(元祐) 2년(1087년), 35세에 소식 등의 추천으로 서주(徐州) 학관의 교수가 되면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원우 5년(1090년), 38세에 영주(潁州) 교수로 이임되었다. 소성(紹聖) 원년(1094년), 철종(哲宗)이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신당(新黨)이 득세하면서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44세 때 조주(曹州)의 처가에 의지하다가 48세 때 체주(棣州) 교수직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부임 도중 비서성(秘書省)정자(正字)에 제수되어 수도 개봉으로 갔다.[2]

2. 3. 사망

휘종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년) 겨울, 교사례(郊祀禮)에 참석했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교사례는 고대 제왕들이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던 의례이다. 동지 제례에 참석할 때, 신법파 친척에게 방한용 의복을 빌리는 것을 거절한 탓에 몸 상태가 나빠지고 병세가 악화된 것이 원인이라고도 한다.

3. 시풍(詩風) 및 특징

진사도는 강서시파 시인으로 여겨지며, 황정견과 함께 언급된다. 두보의 시풍을 따랐으며, 특히 진사도는 그러한 경향이 강했다.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는 유형으로, 집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를 지어 가족들이 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시는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정감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5][6]

4. 평가

소식에게 가르침을 받아 소문육군자(蘇門六君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황정견과 함께 강서시파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풍은 강서시파의 것으로 여겨지며, 두보의 작풍을 본보기로 하는 강서시파 중에서도 진사도는 특히 그 경향이 강했다. 고심하며 시를 짓는 타입으로, 집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를 짓는 바람에 가족들이 피할 정도였지만, 그의 시는 기교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적절하게 정감을 표현하고 있다.[5][6]

5. 저서

증공에게 발탁되었고, 소식에게 가르침을 받아 소문육군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저서로는 『후산집』, 『후산시화』[4], 『후산담총』이 있다.

참조

[1] 기타 范月嬌『陳師道及其詩研究』によれば皇祐4年([[1052年]])[[8月10日 (旧暦)|8月10日]]
[2] 기타 「我は昔 謝公門下の士、早年妄りに作す功名の意、如今老いて寄す潁河の東、九泉深しと雖も此の公に愧づ」(送黄生兼寄二謝二首其二・巻三)とある
[3] 기타 「猶ほ須く心を科挙の外に用うべし」(送黄生兼寄二謝二首其一・巻三)「生きては当に意を落鴎の辺に得べし、何ぞ用いん候に堕鳶の外に封ぜらるるを」(次韻蘇公西湖徙魚三首其二・巻三)とある
[4] 간행물 翻訳 陳師道著 『後山詩話』訳注稿(1) http://id.nii.ac.jp/[...] 愛知大学語学教育研究室 2006-01
[5] 서적 宋詩概説 岩波書店 2006
[6] 서적 漢詩を読む③ 白居易から蘇東坡へ 平凡社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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