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무왕
1. 개요
초 무왕은 초 분모의 아우로,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강화했다. 그는 제후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했으며, 주나라에 왕호를 사용하도록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왕호를 칭했다. 이로 인해 주나라와 중원 제후국들의 반발을 샀다. 초 무왕은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수나라와 갈등을 겪었고, 심록에서 제후 회동을 주최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수나라 정벌 중 병사하여, 아들 웅지가 초 문왕으로 즉위했다.
| 이름 | 웅철 (熊徹) |
|---|---|
| 성 | 미 (羋) |
| 씨 | 웅 (熊) |
| 시호 | 무왕 (武王) |
| 국가 | 초나라 |
|---|---|
| 대수 | 초대 |
| 왕 (王) | 기원전 704년 – 기원전 690년 |
|---|---|
| 자작 (子爵) | 기원전 740년 – 기원전 704년 |
| 사망 | 기원전 690년 |
|---|
| 부친 | 소오 (霄敖) |
|---|---|
| 배우자 | 등만 (鄧曼) |
| 후계자 | 문왕 (文王) |
-
기원전 690년 사망 -
위 의공
위 의공은 사치와 기행으로 백성의 불만을 사고 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살해당했으며, 위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군주이다. -
기원전 8세기 출생 -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 시인으로, 『신통기』와 『일과 날』을 통해 신화, 우주론, 농업, 윤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당대 사회상과 가치관을 반영했고, 농부이자 방랑 음유시인으로서의 삶과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 정의와 노동의 가치를 성찰하여 서구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8세기 출생 -
제 희공
제 희공은 제나라의 제후로서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 위나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며 북융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으나, 말년에 후계 구도에 혼란을 야기하다가 재위 33년 만에 사망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분모의 아우 웅통은 형이 죽자 형의 아들을 죽이고 기원전 741년에 초나라 임금이 되었다.
무왕은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에 힘썼으며, 제후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수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무왕 35년(기원전 706년) 수나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무왕 37년(기원전 704년)에는 심록에서 제후들을 소집했으나, 황나라와 수나라가 참석하지 않자 이들을 공격했다.
주 환왕에게 왕호 사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왕호를 칭하며 초 무왕이라 하였다. 이는 주나라와 중원 제후국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무왕은 중원 제후국을 공격하여 위엄을 떨쳤으나, 기원전 690년 재위 5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무왕 38년(기원전 703년)에는 파와 함께 우를 포위하고, 등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며, 무왕 41년(기원전 700년) 교나라를 공격하여 화해를 맺었다. 무왕 42년(기원전 699년) 굴하에게 라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패배하여 굴하는 자결했다.
2.1. 즉위와 통치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한 후,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에 힘썼다. 모든 제후들을 자기 나라로 초청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수나라가 오지 않자 분노하여 수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주 환왕에게 왕호 사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왕호를 자칭했다. 이에 주 환왕과 중원의 제후국들은 분노했고, 중원과 관중 지역의 약소 제후국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초 무왕은 중원 제후국을 공격하여 위엄을 떨쳤다.
등나라 군주의 딸 등만(鄧曼)과 결혼했고, 약오의 아들 두백비(鬬伯比)를 재상으로, 그의 아들 굴하(屈瑕)를 막오(Mo'ao)로 임명했다.
재위 37년(기원전 704년), 주 환왕 시대에 다른 제후국의 수장들을 심록(沈鹿)에서 회동에 초대했다. 파, 보, 등, 교, 나, 진, 신, 이, 운 및 강나라가 대표를 파견했으며, 황과 수나라만이 불참했다. 신하 위장(蒍章)을 황에 파견하여 불참을 비판했고, 왕과 굴하는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를 공격했다. 수는 속기(速杞之战) 전투에서 멸망했다. 수나라 군주는 도망쳤고, 초나라 재상 두단(鬬丹)은 수나라 후작의 전차와 전차 부대 사령관을 포획했다. 그 후 수나라는 다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초나라가 주 왕조로부터 형식적으로 독립했음을 알렸다. 이후 초나라 통치자들은 모두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며 제후국의 주 왕조 전복과 주나라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기원전 700년(재위 41년), 초나라는 교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교나라는 이후 초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듬해 아들 굴하를 보내 나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굴하는 적을 과소평가하고 패배하여 자결했다. 초 무왕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투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을 사면했지만, 이미 그들의 오른발을 절단하라고 명령한 뒤였다.
기원전 690년,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에 대한 징벌 원정을 떠났다. 한수를 건너 동쪽 강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했다. 재상 두기(鬬祁)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초나라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켰다. 초나라 군대가 수나라의 수도에 도착하자, 수나라 통치자들은 항복하고 초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초나라 군대는 한수를 건너 후퇴하여 故왕을 위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그의 아들 웅지가 초 문왕으로 즉위했다.
2.2. 수나라와의 갈등
수나라가 초나라의 초청에 응하지 않자, 초 무왕은 분노하여 수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속기(速杞之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수나라 군주는 도망쳤다. 이후 수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기원전 700년, 초나라는 교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교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초 무왕은 아들 굴하를 보내 나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굴하는 적을 과소평가하여 패배하고 자결했다. 초 무왕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을 사면했지만, 이미 그들의 오른발을 절단하라고 명령한 뒤였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에 대한 징벌 원정을 떠났으나, 한수를 건너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했다. 초나라 재상 두기(鬬祁)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군대를 진격시켜 수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후, 웅지의 초 문왕 즉위 후 장례를 치렀다.
2.3. 왕호 자칭과 주나라와의 관계
신하들의 권유로 무왕은 수나라를 통해 주나라 천자인 주 환왕에게 왕호 사용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 환왕이 이를 무례한 것으로 보고 거절하자, 웅통은 주나라가 자기 조상 덕에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왕호를 자칭하여 초 무왕이라 일컬었다. 이는 주나라와 중원의 제후국들을 분노하게 했고, 중원과 관중 지역의 약소 제후국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2.4. 주변국과의 관계
초 무왕은 재위 37년(기원전 704년)에 심록(沈鹿중국어)에서 제후 회동을 개최하여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다. 이 회동에는 파, 보, 등, 교, 나, 진, 신, 이, 운, 강나라 등이 대표를 파견했으나, 황과 수나라는 불참했다. 이에 초 무왕은 신하 위장(蒍章)을 황나라에 파견하여 불참을 비판했고,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를 공격하여 속기(速杞之战) 전투에서 멸망시켰다. 수나라 군주는 도망쳤고, 초나라 재상 두단(鬬丹)은 수나라 후작의 전차와 전차 부대 사령관을 포획했다. 이후 수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기원전 700년, 초나라는 교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초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703년에는 파나라와 함께 우를 포위하고, 등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2.5. 굴하의 죽음과 말년
기원전 700년, 초 무왕은 교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교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아들 굴하를 보내 나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굴하는 적을 과소평가하여 노융(卢戎)과 나나라 군대 사이에 갇혀 대패했다. 굴하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곡(荒谷)으로 도망쳐 자결했다. 초 무왕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을 사면했지만, 이미 그들의 오른발을 절단하라고 명령한 뒤였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은 수나라에 대한 징벌 원정을 떠났으나, 한수를 건너 동쪽 강둑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재상 두기(鬬祁)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켜 수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후, 한수를 건너 후퇴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의 아들 웅지가 초 문왕으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