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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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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 의공은 기원전 669년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두루미를 키우는 기행으로 백성과 대신들의 불만을 샀다. 기원전 660년 북방 민족인 적의 침입에 백성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대신들의 비웃음 속에서 형택 전투에서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위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으나, 제 환공의 도움으로 부활했다. 의공은 사치와 기행으로 민심을 잃어 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군주로 평가받으며, 지도자의 자질과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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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의공
기본 정보
구카이지의 현명하고 자비로운 여성들 (부분) - 위 의공
구카이지가 그린 4세기 그림의 송나라 시대 복사본인 "구카이지의 현명하고 자비로운 여성들"에 묘사된 위 의공
희 (姬, Jī)
적 (赤, Chì)
시호의공 (懿公, Yì Gōng)
존칭
국적위나라
통치 정보
작위군주
통치 시작기원전 668년
통치 종료기원전 660년
이전 통치자견모
다음 통치자대공
가문
아버지위나라 혜공
사망 정보
사망일기원전 660년

2. 사적

기원전 669년, 아버지 위 혜공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4] 재위 중 아버지 혜공이 동주 혜왕을 폐위시킨 일로 제 환공의 침공을 받았으나, 뇌물을 바치고 화의했다.[5] 두루미를 지나치게 아껴 국고를 낭비하고 대부처럼 대우하는 등 사치와 기행으로 민심을 잃었다.[4] 기원전 660년, 북방 민족인 적의 침입을 받았으나, 민심 이반으로 제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4][8] 결국 형택(滎澤) 전투에서 적에게 참패하고 살해당했으며,[4][8] 이로 인해 위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가 제 환공의 도움으로 재건되었다.

2. 1. 즉위 전

혜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희적(姬赤)이다.

혜공 31년( 기원전 669년) 5월, 아버지 혜공이 훙거하자 그 뒤를 이어 위나라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2. 2. 치세

기원전 669년, 아버지 위 혜공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4]

의공은 즉위 후 두루미를 각별히 아꼈는데, 사기좌전에는 의공이 두루미를 매우 좋아하여 국고를 낭비하고, 두루미에게 대부의 수레를 태우거나 녹봉을 주는 등 마치 대신처럼 대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러한 사치와 기행으로 인해 백성과 대신들의 신망을 잃었다.

기원전 666년(의공 3년), 아버지 혜공이 동주 혜왕을 쫓아내고 왕자 퇴를 옹립한 일에 대해 제 환공이 죄를 물어 위나라를 침공했다.[5] 위나라는 제나라 군대에게 크게 패했으나, 의공이 뇌물을 바쳐 화의를 맺을 수 있었다.[5]

기원전 660년(의공 9년) 겨울 12월, 북방 민족인 적(翟)이 위나라를 침입했다.[6] 의공이 군대를 모아 맞서려 했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터라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고, 심지어 대신들조차 "두루미에게 적을 막으라고 하십시오"라며 비꼬았다.[4][8]

결국 의공은 석기자(石祁子)와 영장자(寗莊子)[7]에게 수도 조가의 수비를 맡기고,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출정해야 했다. 다음과 같이 군대를 편성하여 형택(滎澤)으로 나아가 적과 맞섰다.[4][8]

직책인물
융차(전차) 지휘거공(渠孔)
차우(전차 오른쪽)자백(子伯)
선봉황이(黃夷)
후군공영제(孔嬰齊)



그러나 형택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는 참패했고, 의공 자신도 적에게 살해당했다.[4][8][2] 일부 기록(사기, 좌전)에는 의공이 두루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전쟁터에 두루미를 내보내 싸우게 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

적군은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조가마저 함락시켰다.[1][2] 이로써 주나라강숙이 봉해진 이래 이어져 온 조가 시대의 위나라는 사실상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패자였던 제 환공이 제후들을 모아 위나라 재건을 도왔고, 살아남은 유민들은 대공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하여 초구에 새 도읍을 정함으로써 나라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2. 3. 최후

아버지 혜공이 형들을 참소하여 죽이고 왕위에 오른 과정 자체가 정당하지 못했고,[4] 의공 자신도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스러웠다. 특히 두루미를 키우는 취미에 빠져 국고를 낭비하고, 두루미에게 대부와 같은 대우를 해주면서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다.[4][1]

의공 9년(기원전 660년) 겨울 12월, 북방 민족인 (翟)[6]이 위나라를 침공했다. 의공이 군대를 동원하려 했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뒤라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고, 신하들조차 "두루미를 좋아하시니, 두루미에게 적을 막으라 하십시오"라고 비꼬며 따르지 않았다.[4]

결국 의공은 석기자(石祁子)와 영장자(寗莊子)[7]에게 도성 수비를 맡기고, 거공(渠孔)에게 융차 지휘를, 자백(子伯)에게 차우(車右)를, 황이(黃夷)에게 선봉을, 공영제(孔嬰齊)에게 후군을 맡겨 소수의 병력으로 출진했다.[4] 의공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형택(滎澤)에서 적과 맞섰으나, 의공의 깃발이 눈에 띄어 집중 공격을 받았고 결국 전투에서 참패하여 살해당했다.[4][8][2] 이때가 기원전 660년이었다.[1][2]

여씨춘추 권11 충렴편에 따르면, 의공은 살해당한 뒤 시신이 적나라 사람들에게 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간만 남겨졌다고 한다. 이를 본 충신 홍연(弘演)이 비통해하며 자신의 배를 갈라 의공의 간을 넣고 순사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진다.[4] 이 기록에 따르면 위 의공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람에게 먹힌 군주가 된다.

의공의 죽음과 형택 전투 패배로 위나라 군대는 궤멸되었고, 수도 조가마저 적에게 함락되면서 위나라는 거의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4][1][2] 이후 제 환공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유민들이 대공을 옹립하고 초구(楚丘)로 도읍을 옮겨 겨우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4]

3. 평가

위 의공은 사치기행으로 민심을 잃어 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군주로 평가받는다.[4] 아버지 혜공이 형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배경에 더해, 의공 자신은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스러웠으며, 특히 두루미를 애지중지하여 국고를 탕진하고 두루미에게 벼슬을 내리는 등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의공 4년(기원전 666년), 아버지 혜공이 동주 혜왕을 축출하고 왕자 퇴를 옹립하려 했던 일로 인해 제 환공의 공격을 받았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했으나, 제나라에 뇌물을 바쳐 간신히 화의를 맺었다.[5]

기원전 660년 겨울, 북방 민족인 적(翟)[6]이 침입하자 의공은 군대를 동원하려 했으나, 이미 민심은 완전히 떠난 상태였다.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고, 심지어 대신들조차 "두루미에게 막으라고 하시오"라며 비꼬았다. 결국 의공은 석기자(石祁子)와 영장자(寗莊子)[7]에게 수도 방어를 맡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형택(滎澤)에서 적과 맞섰으나 참패하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4][8]

이 전투의 패배로 위나라는 수도가 함락되고 일시적으로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비록 이후 패자였던 제 환공이 제후들을 모아 위나라 유민들을 돕고 초구(楚丘)를 새 수도로 삼아 나라를 재건해주기는 했으나, 의공의 실정은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의공의 행적은 지도자의 자질 부족백성을 외면한 정치가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여겨진다.

4. 관련 기록

사마천의 『사기』 「위강숙세가」와 『춘추좌씨전』(장공 28년, 민공 2년) 등에 위 의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4]

기원전 669년, 아버지 혜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4] 사기좌전에는 의공이 유난히 두루미를 아꼈다는 기록이 있다.[1] 그는 두루미에게 대부의 지위를 주고 녹봉을 주었으며, 외출 시에는 화려하게 꾸민 수레에 태우는 등 사치를 즐겼다. 이러한 행동은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의공 4년(기원전 666년), 아버지 혜공이 주나라의 혜왕을 몰아내고 왕자 퇴를 왕으로 세우려 했던 일 때문에 환공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위나라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제나라에 많은 뇌물을 바치고 겨우 화의를 맺었다.[5]

의공 9년(기원전 660년) 겨울 12월, 북방의 적(翟)[6]이 위나라를 침략했다. 의공은 군대를 모아 맞서 싸우려 했으나, 평소 그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했다. 심지어 어떤 신하는 "두루미에게 싸우라고 시키시오"라며 비꼬기도 했다. 결국 의공은 석기자(石祁子)와 영장자(寗莊子)[7]에게 수도 방어를 맡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형택(滎澤)으로 나아가 적과 맞섰다. 거공(渠孔)이 병거를 지휘하고, 자백(子伯)이 의공의 오른쪽에, 황이(黃夷)가 선봉에, 공영제(孔嬰齊)가 후군을 맡았으나, 위나라 군대는 적에게 참패했고 의공 자신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4][8][1][2]

적군은 형택에서의 승리 기세를 몰아 수도인 조가(현재의 허베이시 치현)까지 함락시켰고, 이로써 위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1][2] 위 의공의 죽음은 주나라 주공의 동생인 강숙이 봉지로 받은 조가에서의 위나라 통치가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중원의 패자였던 제 환공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위나라 재건을 도왔다. 살아남은 위나라 유민들을 모아 초구(楚丘)에 새로운 도성을 세우고 의공의 뒤를 이은 대공을 군주로 세워 위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Zhonghua Book Company
[2] 문서 Zuo Zhuan, Duke Min, 2nd year of
[3] 문서 俸給と官位。
[4] 서적 사기
[5] 서적 춘추좌씨전
[6] 문서 북적의 별종
[7] 문서 영속(寗速)이다.
[8] 서적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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