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디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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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우디움 전투는 기원전 321년에 벌어진 제2차 삼니움 전쟁의 중요한 전투로,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가 로마군을 카우디네 협곡으로 유인하여 포위, 항복시킨 사건이다. 폰티우스는 로마군을 전멸시키거나 무사히 돌려보내라는 아버지의 조언 대신, 로마군에게 멍에를 통과하게 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다. 로마는 이 굴욕에 대한 보복으로 삼니움을 공격했지만, 라우톨라에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며 캄파니아에서의 지위가 흔들렸다.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기록에 묘사된 지형과 전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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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우디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분쟁 | 제2차 삼니움 전쟁 |
| 날짜 | 기원전 321년 |
| 장소 | 카우디움 협곡 (카우디움 근처) |
| 결과 | 삼니움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로마 공화국 |
| 교전 2 | 삼니움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로마 공화국 | 티투스 웨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 삼니움 | 가이우스 폰티우스 |
| 병력 | |
| 로마 공화국 | 알 수 없음 |
| 삼니움 | 알 수 없음 |
| 사상자 및 손실 | |
| 로마 공화국 | 없음 |
| 삼니움 | 없음 |
| 지리 정보 | |
2. 배경

기원전 4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남부는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지역에 사는 삼니움인의 세력, 연안부의 그리스인 식민 도시, 평야부의 캄파니아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삼니움의 세력권이 확대되면서 캄파니아인의 영역과 충돌했고, 캄파니아인의 요청에 따라 로마가 개입하여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년~기원전 341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종결되었고, 로마는 카푸아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니아 지방을 얻어 주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 후에도 캄파니아 지방의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고, 기원전 327년에 다시 삼니움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2. 1. 제2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4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남부는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지역에 사는 삼니움인의 세력, 연안부의 그리스인 식민 도시, 평야부의 캄파니아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삼니움의 세력권이 확대되면서 캄파니아인의 영역과 충돌했고, 캄파니아인의 요청에 따라 로마가 개입하여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년~기원전 341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종결되었고, 로마는 카푸아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니아 지방을 얻어 주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 후에도 캄파니아 지방의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고, 기원전 327년에 다시 삼니움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2. 2. 로마와 삼니움의 대립
기원전 4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남부는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지역에 사는 삼니움인, 연안부의 그리스인 식민 도시, 평야부의 캄파니아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삼니움의 세력권이 확대되면서 캄파니아인의 영역과 충돌했고, 캄파니아인의 요청에 따라 로마가 개입하여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기원전 341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종결되었고, 로마는 카푸아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니아 지방을 얻어 주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제1차 삼니움 전쟁 후에도 캄파니아 지방의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고, 기원전 327년에 다시 삼니움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3. 카우디네 협곡으로의 진군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1] 기원전 321년, 로마의 집정관인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칼라티아(카푸아의 남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한 캄파니아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폰티우스는 칼라티아 맞은편 산 너머의 카우디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로마군이 칼라티아에 있다는 것을 알자 병사 10명을 양치기로 변장시켜 풀어 루케리아(루체라)를 공격하러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4] 허보를 믿은 칼비누스와 알비누스는 루케리아를 구원하기로 결정하고 현지로 급히 향하기 위해 해안길이 아닌 아펜니노 산맥 속의 카우디움 협곡을 지나는 길을 선택했다.[4] 로마 지휘관들은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루체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더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나중에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에 있는 좁은 산길인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1]
카우디네 협곡 주변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에 이르자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확실하게 점거된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1] 삼니움군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랐다. 폰티우스는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하도록 설득당했다. 답신은 로마군을 무해하게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 조언은 거부되었고, 헤레니우스에게 다시 편지가 보내졌다. 이번 조언은 마지막 한 명까지 모든 로마군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조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삼니움군은 헤레니우스에게 직접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헤레니우스가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군을 무해하게 풀어주면 로마의 우정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모든 로마군을 죽인다면, 로마는 너무 약해져서 여러 세대 동안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완전한 어리석음이며, 로마군을 약화시키지 않고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1]
3. 1. 로마군의 전략적 판단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1] 기원전 321년, 로마의 집정관인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칼라티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폰티우스는 로마군이 칼라티아에 있다는 것을 알자 병사 10명을 양치기로 변장시켜 루케리아(루체라)를 공격하러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4]로마 지휘관들은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루체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더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나중에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에 있는 좁은 산길인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1] 허보를 믿은 칼비누스와 알비누스는 루케리아를 구원하기로 결정하고 현지로 급히 향하기 위해 해안길이 아닌 아펜니노 산맥 속의 카우디움 협곡을 지나는 길을 선택했다.[4]
카우디네 협곡 주변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에 이르자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확실하게 점거된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1]
삼니움군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랐다. 폰티우스는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하도록 설득당했다. 답신은 로마군을 무해하게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 조언은 거부되었고, 헤레니우스에게 다시 편지가 보내졌다. 이번 조언은 마지막 한 명까지 모든 로마군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조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삼니움군은 헤레니우스에게 직접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헤레니우스가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군을 무해하게 풀어주면 로마의 우정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모든 로마군을 죽인다면, 로마는 너무 약해져서 여러 세대 동안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완전한 어리석음이며, 로마군을 약화시키지 않고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3. 2. 폰티우스의 계략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1] 기원전 321년, 로마의 집정관인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칼라티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폰티우스는 칼라티아 맞은편 산 너머의 카우디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로마군이 칼라티아에 있다는 것을 알자 병사 10명을 양치기로 변장시켜 풀어 루케리아를 공격하러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4]로마 지휘관들은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루체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더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나중에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에 있는 좁은 산길인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1] 칼비누스와 알비누스는 루케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해안길이 아닌 아펜니노 산맥 속의 카우디움 협곡을 지나는 길을 선택했다.[4] 카우디네 협곡 주변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에 이르자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확실하게 점거된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1]
삼니움군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랐다. 폰티우스는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하도록 설득당했다. 답신은 로마군을 무해하게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 조언은 거부되었고, 헤레니우스에게 다시 편지가 보내졌다. 이번 조언은 마지막 한 명까지 모든 로마군을 죽이라는 것이었다.[1]
이러한 상반된 조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삼니움군은 헤레니우스에게 직접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헤레니우스가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군을 무해하게 풀어주면 로마의 우정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모든 로마군을 죽인다면, 로마는 너무 약해져서 여러 세대 동안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완전한 어리석음이며, 로마군을 약화시키지 않고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1]
3. 3. 로마군의 선택: 협곡 통과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1] 기원전 321년, 로마의 집정관인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칼라티아(카푸아의 남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한 캄파니아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4]로마 지휘관들은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루체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더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나중에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에 있는 좁은 산길인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1] 폰티우스는 칼라티아 맞은편 산 너머의 카우디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로마군이 칼라티아에 있다는 것을 알자 병사 10명을 양치기로 변장시켜 풀어 루케리아(루체라)를 공격하러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4] 허보를 믿은 칼비누스와 알비누스는 루케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해안길이 아닌 아펜니노 산맥 속의 카우디움 협곡을 지나는 길을 선택했다.[4]
카우디네 협곡 주변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에 이르자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확실하게 점거된 상태였다.[1]
이 시점에서 로마군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1]
4. 전투의 경과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 이 계략에 속은 로마 지휘관들은 루체라를 지원하기 위해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카우디네 협곡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1]
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으나,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절망에 빠졌다.[1]
삼니움군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라, 폰티우스는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헤레니우스는 로마군을 빨리 돌려보내거나, 모두 죽이라고 상반된 조언을 했다. 헤레니우스는 직접 카우디움에 와서, 로마군을 풀어주면 로마의 우정을 얻고, 모두 죽이면 여러 세대 동안 로마의 위협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폰티우스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묻자,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로마에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우디움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평야로, 삼니움군은 두 출구에 바리케이드를 쳐 로마군을 가뒀다. 로마군은 삼니움 병사들의 조롱 속에서 숙영지(카스트라)를 건설했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포위한 로마 병사가 많아 처치에 곤란을 겪자, 아버지 헬레니우스에게 다시 조언을 구했다. 헬레니우스는 로마 병사를 즉시 석방하거나 모두 죽이라고 권했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로마에 대해 삼니움 영토로부터의 철병과 콜로니아의 철수를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물길이 끊긴 상황에서 항복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로마군은 무장 해제되어 튜닉만 입은 채,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5]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땅에 로마 병사의 창 2개를 꽂고, 그 위에 다른 창 1개를 가로질러 멍에를 만들었다. 로마 병사들은 무장한 삼니움 병사의 창끝 사이를 걸었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다.[6] 600명의 기병(에퀴테스)이 인질로 억류되었다.
4. 1. 협곡에 갇힌 로마군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 10명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 이 계략에 속은 로마 지휘관들은 루체라를 지원하기 위해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카우디네 협곡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1]로마군은 한쪽 협곡으로 들어갔지만, 두 번째 협곡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첫 번째 협곡으로 돌아갔으나,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절망에 빠졌다.[1] 삼니움군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라, 폰티우스는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헤레니우스는 로마군을 빨리 돌려보내거나, 모두 죽이라고 상반된 조언을 했다.
헤레니우스는 직접 카우디움에 와서, 로마군을 풀어주면 로마의 우정을 얻고, 모두 죽이면 여러 세대 동안 로마의 위협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폰티우스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묻자,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로마에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우디움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평야로, 삼니움군은 두 출구에 바리케이드를 쳐 로마군을 가뒀다. 로마군은 삼니움 병사들의 조롱 속에서 숙영지(카스트라)를 건설했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포위한 로마 병사가 많아 처치에 곤란을 겪자, 아버지 헬레니우스에게 다시 조언을 구했다. 헬레니우스는 로마 병사를 즉시 석방하거나 모두 죽이라고 권했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로마에 대해 삼니움 영토로부터의 철병과 콜로니아의 철수를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물길이 끊긴 상황에서 항복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로마군은 무장 해제되어 튜닉만 입은 채,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5]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땅에 로마 병사의 창 2개를 꽂고, 그 위에 다른 창 1개를 가로질러 멍에를 만들었다. 로마 병사들은 무장한 삼니움 병사의 창끝 사이를 걸었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다.[6] 600명의 기병(에퀴테스)이 인질로 억류되었다.
4. 2. 헬레니우스의 조언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군을 함정에 빠뜨린 후, 이 성공을 어떻게 활용할지 몰라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조언을 구했다.[1] 헤레니우스는 처음에는 로마군을 무사히 돌려보내라고 조언했으나, 폰티우스가 이를 거부하자 모든 로마군을 죽이라는 상반된 조언을 했다.이에 폰티우스는 헤레니우스를 직접 불러 이유를 물었다. 헤레니우스는 로마군을 풀어주면 로마와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모두 죽이면 여러 세대 동안 로마의 위협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폰티우스가 중간 방법은 없냐고 묻자, 헤레니우스는 어떤 중간 방법도 로마에게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라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답했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로마 병사가 예상보다 많아 처리에 곤란을 겪자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고, 헬레니우스는 처음에는 즉시 석방, 다음에는 모두 죽이라고 권했다. 폰티우스는 모순된 조언에 아버지를 카우디움으로 불렀고, 헬레니우스는 조건부 항복은 로마에 치욕을 안겨 복수를 부를 것이라고 충고했다.[1]
4. 3. 로마군의 굴욕적인 항복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삼니움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 군대가 칼라티아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동으로 위장한 병사들을 보내 삼니움군이 아풀리아의 루체라를 포위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1] 로마 지휘관들은 이 계략에 속아 루체라를 지원하기 위해 더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은 아피아 가도가 된 길로, 캄파니아의 베네벤토 근처 카우디네 협곡(''Furculae Caudinae'')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카우디네 협곡은 산으로 둘러싸여 두 개의 협곡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1] 로마군은 협곡에 들어갔지만,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돌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삼니움군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1]폰티우스는 포위한 로마 병사가 많아 처리에 곤란을 겪자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헤레니우스는 처음에는 로마군을 즉시 석방하라고 했다가, 폰티우스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모두 죽이라고 권했다. 폰티우스는 아버지를 카우디움으로 불러들여 다시 묻자, 헤레니우스는 무조건 석방하면 로마와의 우호 관계를 가져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여 로마가 수년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폰티우스가 조건부 항복이라는 '중간 선택지'는 없는지 묻자, 헤레니우스는 로마에 치욕을 안기면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충고했다.[5]
결국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로마에 대해 삼니움 영토로부터의 철병과 로마 식민시(콜로니아)의 철수를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물길이 끊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 로마군은 무장 해제되어 토니카(튜닉)만 입은 반나체 상태로, 삼니움 병사들의 모욕 속에서 굴욕의 상징인 멍에 아래를 한 명씩 구부려 통과해야 했다.[5]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땅에 로마 병사의 창 2개를 꽂고, 그 위에 다른 창 1개를 가로질러 즉석에서 멍에를 만들었다고 한다.[6] 두 명의 집정관을 선두로 로마 병사들은 무장한 삼니움 병사의 창끝 사이를 걸었고, 그중에는 부상을 입고 목숨을 잃은 자도 있었다.[6] 게다가 600명의 기병(에퀴테스)이 인질로 삼니움에 억류되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기를 꺼렸고 로마군이 항복하고 멍에 아래로 지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아에 직면한 군대를 위해 두 명의 지휘 콘술에 의해 동의되었다. 리비우스는 로마군의 굴욕을 상세히 묘사하며, 이는 헤레니우스의 조언의 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3]
리비우스는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는지, 아니면 즉시 거부했는지에 대해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리비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조건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원전 316년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다고 주장한다.[3] 로마는 삼니움 측이 제시한 휴전을 거부하고 카우디움의 굴욕에 보복하기 위해 삼니움에 침공하여 몇 차례 삼니움 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기원전 315년 라우톨라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삼니움 군에게 패배하여 캄파니아에서의 로마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폰티우스는 카우디움 전투 수년 후에 로마에 패배하여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5. 1. 로마의 굴욕과 복수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기를 꺼렸고 로마군이 항복하고 멍에 아래로 지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아에 직면한 군대를 위해 두 명의 지휘 콘술에 의해 동의되었다. 리비우스는 로마군의 굴욕을 상세히 묘사하며, 이는 헤레니우스의 조언의 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3]리비우스는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는지, 아니면 즉시 거부했는지에 대해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리비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조건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원전 316년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다고 주장한다.[3] 로마는 삼니움 측이 제시한 휴전을 거부하고 카우디움의 굴욕에 보복하기 위해 삼니움에 침공하여 몇 차례 삼니움 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기원전 315년 라우톨라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삼니움 군에게 패배하여 캄파니아에서의 로마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폰티우스는 카우디움 전투 수년 후에 로마에 패배하여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5. 2. 폰티우스의 최후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기를 꺼렸고 로마군이 항복하고 멍에 아래로 지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아에 직면한 군대를 위해 두 명의 지휘 콘술에 의해 동의되었다. 리비우스는 로마군의 굴욕을 상세히 묘사하며, 이는 헤레니우스의 조언의 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3]리비우스는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는지, 아니면 즉시 거부했는지에 대해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리비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조건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원전 316년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로마가 카우디움 평화를 지켰다고 주장한다.[3] 로마는 삼니움 측이 제시한 휴전을 거부하고 카우디움의 굴욕에 보복하기 위해 삼니움에 침공하여 몇 차례 삼니움 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기원전 315년 라우톨라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삼니움 군에게 패배하여 캄파니아에서의 로마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폰티우스는 카우디움 전투 수년 후에 로마에 패배하여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5. 3. 역사적 논쟁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기록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2] 중앙 평원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협곡은 모두 리비우스가 묘사한 것처럼 좁고 가파르지 않다. 서쪽 협곡(아리에엔초Arienzo 마을 근처)은 폭이 1km가 넘으며, 삼니움족이 로마군이 평원을 건너 동쪽 협곡(아르파이아Arpaia 근처)으로 이동하여 돌아오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막았을 가능성은 낮다. 이 거리는 4.5km이다.[2] 심지어 더 좁은 동쪽 끝조차도 양쪽 언덕에서 던지는 투사체의 사정거리 밖에서 행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다. 호스폴은 리비우스의 지리가 이 사건과 동시대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 대한 기록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2]6. 현대적 해석 및 평가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기록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2] 중앙 평원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협곡은 모두 리비우스가 묘사한 것처럼 좁고 가파르지 않다. 서쪽 협곡(아리에엔초Arienzo 마을 근처)은 폭이 1km가 넘으며, 삼니움족이 로마군이 평원을 건너 동쪽 협곡(아르파이아Arpaia 근처)으로 이동하여 돌아오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막았을 가능성은 낮다. 거리는 4.5km이다. 동쪽 끝은 양쪽 언덕에서 던지는 투사체의 사정거리 밖에서 행군할 수 있을 만큼 넓다. 호스폴은 리비우스의 지리가 이 사건과 동시대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 대한 기록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2]
6. 1. 군사 전략적 교훈
6. 2. 정치적, 외교적 함의
참조
[1]
웹사이트
Livy's Book 9, which includes his account of the battle
https://web.archive.[...]
[2]
논문
"The Caudine Forks: Topography and Illusion"
https://www.jstor.or[...]
1982
[3]
서적
Samnium and the Samnites
Cambridge Univ. Press
1967
[4]
간행물
Caudine Forks
2010
[5]
문서
Livy, viii, 9.2-6
[6]
문서
Appian, History of Rome: The Samnite Wars,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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