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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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집정관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최고 행정관으로, 평시에는 행정, 입법, 사법 권한을, 전시에는 최고 군사 지휘권을 행사했다. 기원전 509년 공화정 수립과 함께 시작되어 두 명의 집정관이 매년 선출되었으며, 상호 거부권을 통해 권력 남용을 방지했다. 집정관은 로마 제정 시대에도 명목상 최고위직으로 존속했으나, 황제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집중되었다. 현대에는 산마리노에서 2명의 집정관이 6개월 임기로 통치하며, 베네치아 공화국과 프랑스 혁명 정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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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라틴어 | consul |
한국어 표기 | 집정관, 콘술 |
고대 로마의 정치 체제 | |
역할 | 고대 로마의 최고 관직 |
선출 방식 | 매년 선출되는 2명의 동료 집정관 체제 |
임기 | 1년 |
권한 | 군사적 권한 사법적 권한 행정적 권한 |
집정관의 기원 | |
시기 | 기원전 509년경 |
이전 관직 | 왕정 시대의 왕 |
집정관의 역할 변화 | |
공화정 초기 | 실질적인 국가 통치 |
제정 시대 | 명예직으로 권한 축소 |
기타 | |
관련 관직 | 감찰관 (censor), 전직 집정관 (proconsul) |
2. 역사
집정관은 고대 로마의 최고위 정무관직으로,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걸쳐 존재했다. 왕정이 폐지된 후, 왕의 권한을 이어받아 공화정을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이 선출되어 1년의 임기 동안 동등한 권한을 행사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이는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한 중요한 장치였다. 초기에는 파트리키(귀족)만이 맡을 수 있었으나, 플레브스(평민)와의 오랜 신분 투쟁 끝에 플레브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 집정관은 평시에는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고, 전시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원수정이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 시대가 열리자, 집정관의 실질적인 권력은 점차 황제에게 넘어가고 상징적인 명예직으로 변모했다. 황제들은 종종 자신이나 측근을 집정관에 임명하여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국 후기로 가면서 집정관직의 중요성은 더욱 감소했으며, 동서 로마 분열 이후 변화를 겪다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2. 1. 공화정 시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은 왕정 폐지 이후 왕의 권한을 이어받아 탄생한 최고 정무관직이었다.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추방된 후, 왕의 권력과 권위는 새롭게 설립된 집정관직에 주어졌다. 처음에는 최고 군사 지휘관이라는 의미를 담아 프라이토르( praetor|프라이토르la, "지도자")라고 불렸으나,[1] 기원전 305년경부터는 '콘술( consul|콘술la )'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1] '콘술'이라는 칭호는 라틴어 동사 'consulere'(협의하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2] 두 명의 집정관이 함께 직무를 수행하는 공동적 성격을 반영하여 'con-'(함께)과 'sal-'(얻다) 또는 'sell-/sedl-'(앉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3] 그리스어로는 στρατηγὸς ὕπατος|스트라테고스 휘파토스grc("최고 사령관") 또는 간단히 ὕπατος|휘파토스grc라고 불렸다.[2]전설에 따르면 초대 집정관은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맡았다.[36] 콜라티누스가 곧 사임하면서 같은 해에 최초의 보충 집정관(보좌집정관)도 선출되었다. 집정관은 매년 켄투리아회에서 2명을 선출했으며,[6] 임기는 1년이었다. 두 집정관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함께 직무를 수행했으며, 서로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집정관은 쿠리아회에서 임페리움(imperium, 명령권)을 부여하는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 법이 통과된 후에야 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매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취임하는 집정관을 직권집정관( Consules ordinarii|콘술레스 오르디나리이la )이라고 불렀으며, 로마에서는 이들의 이름으로 해를 기록했다(로마 집정관 연대표 참조). 만약 집정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거나 사임, 해임되는 경우에는 남은 임기를 채울 보좌집정관( Consules suffecti|콘술레스 수펙티la )을 선출했다. 일반적으로 직권집정관이 보좌집정관보다 더 큰 명예를 누렸다.
집정관은 평화 시에는 행정, 입법, 사법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고, 전시에는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군대를 이끌었다. 또한 국가의 중요한 종교 의례를 주관하는 책임도 있었으며,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점을 치는 의식을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초기 공화정 시기에는 파트리키(귀족)만이 집정관이 될 수 있었으나, 플레브스(평민)와의 오랜 신분 투쟁 결과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플레브스에게도 집정관직이 개방되었다.[7] 이 법 제정 이후 플레브스 출신 집정관들이 등장하면서 파트리키 및 플레브스 출신 고위 정무관 경험자들은 노빌레스라는 새로운 지배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집정관 경험자는 원로원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정관직은 로마인이 정치 경력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운 자리, 즉 쿠르수스 호노룸의 정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쟁 시기에는 군사적 능력과 명성이 집정관 선출의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선거는 항상 정치적으로 치열했다. 술라가 쿠르수스 호노룸을 법으로 규정하면서 집정관 출마 최소 연령은 42세(또는 43세)로 정해졌으나,[10] 제정 시대에는 32세로 낮아졌다.[11] 후기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프로콘술로서 원로원 속주의 총독을 맡는 것이 일반적인 경력이 되었다.
2. 1. 1. 집정관직 권력 제한 시도
전통적으로 왕이 추방된 후 왕에게 속했던 모든 권력은 두 직책, 즉 집정관직과 왕정사제( rex sacrorum|렉스 사크로룸la ) 직책으로 이전되었다. 왕정사제는 왕의 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계승했고, 다양한 종교적 기능은 대제사장( pontifex maximus|폰티펙스 막시무스la )들에게 넘겨졌지만, 집정관들은 나머지 민정 및 군사적 책임을 부여받았다. 왕권 남용을 막기 위해 이 권한은 두 명의 집정관이 공유했으며, 각 집정관은 서로의 행동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임기는 짧은 1년이었다.집정관들은 국가의 행정권을 위임받아 공화정 정부를 이끌었으나, 로마 법 체계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일부 중요한 기능이 집정관직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관리들에게 할당되었다. 기원전 443년에는 인구조사 실시 책임이 감찰관에게 넘어갔고, 기원전 366년에는 주요 사법권이 법무관에게 이전되었다. 이후 집정관은 특별한 형사 사건에서 상원의 요청이 있을 때만 판사 역할을 수행했다.
집정관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핵심 장치는 각 집정관이 동료의 행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한 집정관의 결정에 대해 동료 집정관에게 항소할 수 있었고, 항소가 받아들여지면 결정은 뒤집혔다. 다만, 각자 최고 사령관으로 활동하는 속주에서는 예외였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매달 한 명의 집정관만이 실질적인 직무를 수행하고 다음 달에 역할을 교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임기가 끝나면 자신의 직무 수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으며, 직무 내용은 상원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 임기 종료 직후 바로 다시 선출될 수 없었고, 일반적으로 집정관직 사이에는 10년의 간격을 두어야 했다. 수도 로마 내에서 군 지휘권인 임페리움( imperium|임페리움la )을 행사할 때도 원로원을 고려해야 하는 등 제약이 따랐다.
집정관을 비롯한 임페리움( imperium|임페리움la ) 보유자는 리크토르라는 호위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권위의 상징인 파스케스( fasces|파스케스la )를 들고 다녔다. 초기 집정관 중 한 명인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는 포메리움( pomerium|포메리움la ) 안에서는 파스케스에서 도끼를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집정관이 내린 사형 등 극형에 대해 시민이 항소할 권리를 법으로 만들었다. 역사가 테오도르 모멘젠은 이를 강력했던 왕권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했다. 이후 기원전 462년 호민관 테렌티우스처럼 집정관의 권력을 더욱 축소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반면, 비상시에 임명되는 독재관은 예외적으로 포메리움( pomerium|포메리움la ) 안에서도 도끼를 붙인 파스케스( fasces|파스케스la )를 사용했으며, 독재관의 결정에는 항소할 수 없었다. 이는 평상시 집정관의 권력이 상당한 제한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2. 1. 2. 신분 투쟁과 집정관직
전통적으로 로마 공화정 초기 집정관직은 파트리키(귀족)에게만 개방되었다.[7] 그러나 플레베이(평민)들은 꾸준히 정치적 권리 확대를 요구하며 신분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정관직의 성격과 선출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기원전 5세기 동안에는 국가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두 명의 집정관 대신 집정관 트리뷰누스가 선출되기도 했다.[4] 이는 파트리키와 플레베이 간의 신분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 제도는 기원전 367년까지 유지되었다.[5]
기원전 367년, 플레베이의 오랜 투쟁 끝에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법은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플레베이 출신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7] 이 법의 시행으로 집정관 트리뷰누스 제도는 폐지되었고, 집정관직이 공화정 최고 정무관직으로 다시 확립되었다.[5] 법 제정 다음 해에는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최초의 플레베이 출신 집정관으로 선출되어[7] 신분 차별 철폐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초기 공화정 시기 집정관직 독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에 일부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이전에도 집정관 명단에 플레베이식 이름이 약 30% 포함되어 있다는 점,[8] 그리고 공화정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시 플레베이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8]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일각에서는 5세기 동안 신분 투쟁이 격화되면서 오히려 파트리키 엘리트들이 집정관직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9]
이러한 신분 투쟁 과정을 거치며 집정관직은 점차 모든 로마 시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직, 즉 쿠르수스 호노룸의 정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2. 제정 시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원수정 체제를 수립하며 초대 로마 황제가 된 이후, 집정관은 실질적인 권력과 책임을 대부분 상실했다.[28][29]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국가 최고위직이었으나, 공화정 시대의 유산을 상징하는 존재에 가까웠다.[28][29]초기 원수정 시대에는 형식상 '''켄투리아회'''에서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수(princeps), 즉 황제가 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켄투리아회와 하급 관리직을 선출하던 '''트리부스 민회'''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모든 관직 선출은 단일화된 "국민회의"에서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황제의 임명권이 강했다.[14] 플라비우스 왕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선거가 원로원으로 이관되었지만, 3세기까지도 민중의 비준 절차가 요구되었다.[17]
황제 자신이 집정관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28][29] 이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후계자를 지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13번, 도미티아누스는 17번, 테오도시우스 2세는 18번 집정관을 역임했다.[18][19] 황제는 상원 회의 주재권,[28][29] 사법 문제 처리권, 그리고 비용을 자비로 충당하는 조건으로 공공 오락(ludi publici) 및 공공 행사 조직권을 가졌다.[28][29]
원수정 시대(3세기까지) 집정관직은 로마 귀족이 행정부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전직 집정관만이 집정관 특사, 아프리카 및 아시아 속주 총독, 로마 시 행정관이 될 수 있었다. 보통 귀족은 30대 초반, 그 외에는 40대 초반에 임명되었으나, 황제는 종종 나이 제한을 무시하고 자신이나 측근, 친척을 임명했다. 칼리굴라가 자신의 말 인키타투스를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한 일화는 원로원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15][16]
집정관직을 채울 인력 풀 확보를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보결 집정관(suffect consul) 제도를 개편하여 정규 집정관보다 많은 인원을 임명할 수 있게 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정규 집정관이 연중에 사임하는 경우가 많았고, 플라비우스 및 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임기가 4개월 정도로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17]
보결 집정관의 증가와 '''신흥 귀족'''(Novus homo)에게 집정관직이 개방되면서 점차 그 가치가 하락했다. 하지만 황제와 공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책이었기에 정규 집정관직(consul ordinarius)의 명예는 유지되었다. 특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가치가 있는 인물은 두 번째, 드물게는 세 번째 집정관직을 달성하기도 했다.
3세기 말, 집정관직 이전의 경력 경로가 축소되고 '''기사 계급'''(equites)이 전통적인 원로원 의원의 행정 및 군사 기능을 잠식하면서, 집정관직은 경력이 부족한 젊은 나이(4세기에는 20대 초반 또는 그 이하)에도 임명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두 번째 집정관직(보통 정규 집정관)이 이전보다 훨씬 흔해졌고, 첫 번째 집정관직은 보결 집정관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기사 출신 근위대 대장(praetorian prefect)에게 '''집정관의 장식(ornamenta consularia)'''이 수여되고 이후 정규 집정관이 되어 'cos. II'로 칭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로 집정관직의 가치는 더욱 하락하여, 3세기 말에는 경력 비문에서 생략되기도 했고 4세기 초에는 보결 집정관직 기록이 거의 사라졌다. 한편, 로마에서 분리 독립했던 갈리아 제국(260~274년)도 자체적인 집정관을 두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년)는 집정관 한 명을 로마에, 다른 한 명을 콘스탄티노플에 배정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년) 사후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각 황제가 한 명씩 임명하는 권리를 가졌으나, 때로는 한쪽 황제가 양쪽 모두를 임명하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스틸리코와 같은 강력한 장군들의 영향 아래 동로마 집정관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20]
실질적인 권력은 상실했지만 집정관직은 여전히 큰 영예였으며, 특히 전차 경주 등 관련 행사는 막대한 비용이 수반되었다. 때로는 바로니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 올리브리우스 주니어 등 어린 아이가 집정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21]
6세기에 집정관직은 점차 임명이 드물어졌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년) 치하에서 폐지되었다. 서로마 집정관직은 534년 데키우스 파울리누스를 마지막으로, 동로마 집정관직은 541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알비누스 바실리우스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집정관 연대기법은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의 재위 연도와 인딕티오에 의한 연대기법을 도입한 537년에 이미 폐지되었다.
동로마 궁정에서는 유스티누스 2세(재위 565~578년)부터 황제 즉위식의 일부로 집정관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632년 미래의 콘스탄스 2세(재위 641~668년)가 집정관으로 선포된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9세기 후반 레오 6세(재위 886~912년) 황제는 그의 '''바실리카'''(Basilika) 법령 제94호에서 마침내 이 직책을 폐지했다. 그때까지 집정관과 전 집정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명칭 "'''히파토스(hypatos)'''"와 "'''아포 히파톤(apo hypaton)'''"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명예직 칭호로 변모해 있었다.
서로마에서는 교황청이 개인에게 집정관 지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었다. 719년 교황은 샤를 마르텔에게 로마 집정관 칭호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22] 853년경, 당시 네댓 살이었던 앨프레드 대왕은 교황에 의해 로마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23]
3. 선출 방법과 임기
집정관은 로마 공화정의 최고 정무관으로, 매년 켄투리아 집회에서 투표를 통해 2명을 선출했다.[6] 이는 독재를 막고 왕정이 부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선출 과정에서 원로원이 후보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으며, 선출된 집정관은 쿠리아 집회에서 임페리움(imperium)을 부여하는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lex curiata de imperio) 법이 통과되어야 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6]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원칙적으로 재선은 금지되었으나[1] 실제로는 재선되는 경우도 있었다. 신임 집정관의 취임일은 공화정 초기에는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이후 3월 1일에 취임하다가 기원전 153년부터는 매년 1월 1일에 취임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1월 1일에 취임하여 1년의 임기를 시작하는 집정관을 '''직권 집정관'''(Consules ordinariila)이라고 불렀으며, 로마에서는 이들의 이름으로 해당 연도를 기록했다. (로마 집정관 연대표 참조)
만약 집정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거나 해임되는 등 결원이 발생하면 보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했다. 공화정 초기에는 인터렉스(Interrex)가 임시로 직무를 대행하며 보궐 선거를 위한 민회를 소집했고, 이후에는 켄투리아 집회에서 직접 선출했다. 이렇게 임기 중간에 선출된 집정관은 '''보충 집정관'''(Consules suffectila)이라고 불렸으며, 전임자의 남은 임기 동안 직무를 수행했다. 보충 집정관은 직권 집정관보다 명예가 낮은 것으로 여겨졌다.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직이 파트리키(귀족)에게만 개방되었으나, 플레베이(평민)의 지속적인 권리 투쟁 끝에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변했다.[5] 이 법에 따라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플레베이 출신이어야 했으며, 이듬해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최초의 플레베이 출신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로마 사회의 중요한 진전이었지만, 여전히 집정관직은 소수의 유력 가문들이 주로 차지하는 경향이 있었다.[7]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력)이 정립되면서 집정관직은 로마 정치 경력의 정점으로 여겨졌다. 술라 시대에는 집정관이 되기 위한 최소 연령이 법으로 42세 또는 43세로 규정되었으나,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에는 32세로 낮아졌다.[10][11]
4. 권한
선출된 집정관은 로마법(lex Licinia Sextiala)에 따라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la)에서 선출되고, 쿠리아회(Curiate Assemblyla)에서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lex curiata de imperiola) 법을 통해 임페리움(imperiumla, 명령권)을 부여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로마의 최고 통치권을 행사했다.[6] 이는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추방된 후 왕의 권력이 집정관에게 이양된 전통에 따른 것이다. 초기에는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프라이토르(praetorla, 지도자)로 불렸으나, 기원전 300년경부터 '집정관'(consulla, 협의하는 자)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1][2][3]
집정관은 평시와 전시 모두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 평시 권한:
- 행정: 정부 수반으로서 로마 시 내에서 최고 행정권을 행사했다. 호민관을 제외한 모든 하급 관리들은 집정관에게 종속되었지만, 각자의 직책은 독립성을 유지했다. 법률 집행, 공공질서 유지, 소환 및 체포 권한을 가졌으나, 시민에 대한 사형 집행권은 없었다. 이러한 처벌권은 하급 관리에게까지 미쳤다.
- 입법: 원로원과 민회(쿠리아회, 켄투리아회, 트리부스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주재할 권한이 있었다. 선거를 관리하고 법안을 투표에 부쳤다.
- 사법: 제한적인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집정관의 판결에 대한 항소권이 존재했다.
- 외교: 로마의 수석 외교관으로서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원로원에 소개했으며, 외교 협상을 주도했다.
- 종교: 국가의 최고 관리로서 특정 종교 의식을 주관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나가기 전 점(auguries)을 치는 필수적인 종교적 임무를 수행했다.
- 전시 권한:
- 군사: 로마 시 외곽에서는 로마 군단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완전한 임페리움을 행사했다. 마르스 광장에서 군대를 징병하고, 병사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로마 동맹국들의 병력 동원도 감독했다.[25]
- 전장에서 집정관은 병사, 장교, 시민, 동맹군 등 누구에게나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어떤 처벌(사형 포함)이라도 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 보통 각 집정관은 2개 군단(약 2만 명, 시민 군단 2개와 동맹군 군단 2개)을 지휘했으며, 군사 트리부누스와 재정 담당 퀘스토르의 보좌를 받았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로 환호받고 개선식을 요청할 수 있었다.[26]

집정관의 권위는 모든 공개석상에서 12명의 릭토르(lictorla)가 동행하며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릭토르들은 파스케스(fascesla, 속간)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도끼가 묶인 막대기 다발로 군사력 또는 임페리움을 상징했다.[24] 단, 신성 구역인 포메리움 안에서는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파스케스에서 도끼를 제거했다. 켄투리아회에 들어갈 때는 집정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스케스를 내렸다.
이러한 막강한 권한에는 몇 가지 제한이 있었다.
- 동료 집정관의 거부권: 각 집정관은 다른 집정관의 결정이나 행동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여 서로를 견제할 수 있었다. 한 집정관의 판결에 대해 동료 집정관에게 항소할 수 있었고, 항소가 받아들여지면 판결은 뒤집어졌다.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매달 한 명의 집정관만이 공식적인 직무를 수행했다.
- 짧은 임기: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었다.
- 원로원의 통제: 수행할 직무는 원로원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
- 연임 제한: 임기 종료 직후 바로 다시 선출될 수 없었고, 일반적으로 다음 집정관직 수행까지 10년의 간격이 요구되었다.
- 책임: 임기 종료 후 자신의 직무 수행(예: 속주 남용, 공금 낭비 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으며, 잘못이 있을 경우 기소될 수 있었다.
- 독재관 임명: 국가 비상시, 즉 로마 영토가 즉각적인 위험에 처했을 때, 원로원의 제안에 따라 최장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 독재관이 임명되면 집정관의 임페리움은 독재관에게 종속되었다.[27]
4. 1. 권한 분담
두 명의 집정관은 기본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권한을 가졌다. 때로는 한 명이 행정을, 다른 한 명이 군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을 나누기도 했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군무 담당은 제비뽑기 등으로 결정되기도 했으나, 이는 구속력이 없었다.각 집정관은 다른 집정관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고위직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두 집정관이 함께 군사 원정을 나서는 드문 경우에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지휘권을 행사했다.
만약 두 집정관 모두 로마 시를 떠나 있을 경우, 그들의 시민적 의무는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이 대신 수행했다. 집정관은 취임 후 보좌역으로 퀘스토르를 임명하여 재판과 재정 업무를 보조하게 할 수 있었다.
4. 2. 보좌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집정관의 보좌관, 특히 퀘스토르(재무관)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내용을 채울 수 없습니다.4. 3. 프로콘술 (전직 집정관)
후기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집정관 임기를 마친 사람은 프로콘술(proconsul, 전직 집정관)로서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보통 수입이 좋은 자리로 여겨졌다. 전직 집정관은 원로원에 의해 특정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담당할 속주는 임기가 끝나기 전에 추첨으로 결정되었다. 프로콘술은 집정관 시절의 임페리움(imperium, 명령권)을 이어받았으나, 그 권한은 자신이 담당하는 속주 내에서만 유효했고 다른 속주에서는 행사할 수 없었다. 임기는 보통 1년에서 5년 사이였으며, 임기가 끝나거나 후임자가 오기 전에는 원로원의 특별 허가 없이는 속주를 떠날 수 없었다.프로콘술 제도는 본래 두 명의 집정관만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군사적 상황 등에 대처하기 위해 집정관 경험자에게 임시로 군사 지휘권 등을 부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록상 최초의 프로콘술은 기원전 326년의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이다. 이후 이 제도는 점차 정례화되어, 집정관 임기를 마친 이들이 속주 총독을 맡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이 시작된 이후, 늘어난 속주를 관리하기 위해 더 많은 총독(즉, 집정관 경험자)이 필요해졌다. 이 때문에 정식 집정관(직권집정관)이 임기 중 사임하고 그 자리를 보좌집정관(보충 집정관)이 채우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더 많은 사람에게 집정관 경력을 쌓게 하여 프로콘술 자격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보충 집정관이 다시 임기 전에 사임하고 또 다른 보충 집정관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코모두스 황제 치세인 190년에 극에 달하여, 한 해 동안 무려 25명이 집정관직을 거쳐 갔다.
5. 현대의 집정관
현재 집정관이 통치하는 나라는 산마리노뿐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하며 임기는 6개월이다.
6. 영향
집정관이라는 명칭은 후대의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영사관 제도를 창설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그 영사에게 consul|콘술la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하였다(현대 영사관에 consul|콘설영어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고대 로마에 대한 강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혁명 시기 프랑스에서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성립된 총재정부의 수반에게 제1집정관(consul프랑스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집정관 또는 총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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