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시티 모나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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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는 1920년 J.L. 윌킨슨에 의해 창단된 흑인 야구팀으로, 흑인 야구 리그에서 강력한 팀으로 자리매김했다. 1924년 흑인 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으며, 새첼 페이지, 재키 로빈슨 등 많은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를 배출했다. 야간 경기 도입과 인종 차별 철폐 시기에 메이저 리그 선수 육성에 기여했으나, 1965년 해체되었다. 2021년 캔자스시티 T-Bones가 팀명을 부활시켰고,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모나크스를 기리는 유니폼을 착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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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시티 모나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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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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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20년 |
해체 | 1965년 |
연고지 | 캔자스시티, 미주리 주 |
리그 | 니그로 내셔널 리그 (1920–1931) 독립 (1932–1936)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 (1937–1961) 독립 (1962–1965) 1956–65년 그랜드래피즈, 미시간 주에 기반을 두었지만 캔자스시티라는 이름을 유지함 |
홈구장 | 어소시에이션 파크 (1920–1923) 무엘레바흐 필드 (1923–1955) a.k.a. 루퍼트 스타디움 (1937–1942) a.k.a. 블루스 스타디움 (1943–1954) a.k.a. 뮤니시펄 스타디움 (1955) 밸리 필드, 그랜드래피즈 (1956–1965) |
리그 타이틀 | 1923 1924 1925 1929 1937 1939 1940 1941 1942 1946 1953 1957 |
시리즈 | 니그로 월드 시리즈 |
시리즈 우승 | 1924 1942 |
2. 역사
J. L. 윌킨슨이 올 네이션스 팀과 제25 보병 연대 렉커스 팀의 선수들을 모아 1920년에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를 창단했다. 초기에는 불렛 로건, 도비 무어, 헤비 존슨 등이 주요 선수로 활약했으며, 루브 포스터의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24년 호세 멘데스 감독 부임 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첫 번째 흑인 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힐데일 데이지스를 꺾고 우승했다. 1925년에는 불렛 로건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힐데일에 패했다.[5][6] 이 시기 뉴트 앨런, 프랭크 던컨, 뉴트 조셉 등이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1]
1926년 불렛 로건이 선수 겸 감독을 맡았고, 체트 브루어, 윌리엄 벨, 앤디 쿠퍼 등이 팀에 합류했다. 1929년 모나크스는 NNL 타이틀을 획득하며 62승 17패라는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1]
1930년대에 모나크스는 야간 경기를 도입하여 더 많은 관중을 유치했다. 1930년 3월 초, 캔자스주 로렌스에서 첫 야간 경기가 열렸다. 이동식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휴대용 발전기로 전력을 공급받아 인공 조명 아래에서 정기적으로 야구를 한 최초의 팀이었다. 야간 경기는 모나크스가 더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여 니그로 리그에서 가장 안정적인 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1] 이 시기 힐튼 스미스, 윌라드 브라운이 팀의 주축 선수였다.[1]
앤디 쿠퍼 감독이 이끈 모나크스는 1937년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NAL)의 창립 멤버가 되어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39년과 1940년에도 우승을 차지했고, 1942년 니그로 월드 시리즈에서 홈스테드 그레이스를 꺾고 우승했다.[2][3] 새첼 페이지는 1939년 모나크스 B팀에 합류하여 1940년 주전 선수로 승격, 팀의 흥행 카드가 되었다. 힐튼 스미스, 체트 브루어 등과 함께 1946년 마지막 NAL 우승을 이끌었지만, 뉴어크 이글스에게 패했다.[9][2][10]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면서 흑인 야구의 판도가 바뀌었다.[10]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걸쳐 야구계에서 인종 차별이 점차 철폐되면서,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는 메이저 리그를 위한 흑인 선수 육성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새첼 페이지, 어니 뱅크스, 엘스턴 하워드, 행크 톰슨, 윌라드 브라운 등 다른 니그로 리그 팀보다 더 많은 선수를 메이저 리그에 배출했다.
1948년, 벅 오닐이 감독직을 맡았고, 같은 해 J.L. 윌킨슨이 모나크스를 톰 베어드에게 매각했다.[3]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수들을 메이저 리그 구단에 판매하면서 로스터가 줄어들었다. 오닐은 1953년과 1955년에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1954년에는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가 쇠퇴하고 규모가 축소되면서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55년, 톰 베어드는 선수들을 메이저 리그 및 마이너 리그 구단에 팔았고,[11] 감독 벅 오닐을 해고했다. 오닐은 이후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트로 계약했다.[10] 베어드는 구단을 야구 사업가 테드 라즈베리에게 매각했고, 라즈베리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구단의 연고지를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로 옮겼다.[12]
1956년부터 모나크스는 본격적인 지방 순회 팀이 되었다.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는 1962년에 운영을 중단했고, 모나크스는 1965년 시즌 이후 해체되었다.
2. 1. 창단과 초기 (1920-1929)
J. L. 윌킨슨이 올 네이션스 팀과 제25 보병 연대 렉커스 팀의 선수들을 모아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를 창단했다. 초기 모나크스의 주요 선수로는 불렛 로건, 도비 무어, 헤비 존슨, 조지 카, 헐리 맥네어, 루브 커리, 클리프 벨 등이 있었다. 모나크스는 루브 포스터의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1924년, 호세 멘데스 감독 부임 후 모나크스는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첫 번째 흑인 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힐데일 데이지스를 상대로 5승 4패 1무로 승리하며 우승했다. 이 시리즈에서 멘데스는 4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했고, 선발 투수로 출전한 한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었다.[5] 1925년 리그 일정이 분할 시즌 형식으로 변경되었지만, 모나크스는 다시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월드 시리즈에서는 불렛 로건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힐데일에 1승 5패로 패했다.[6]
이 시기 팀의 주전 선수로는 2루수 겸 유격수 뉴트 앨런과 프랭크 던컨이 있었다. 뉴트 조셉은 1922년부터 NNL 시절까지 모나크스의 3루수로 뛰면서 통산 타율 0.284를 기록했다.[1]
1926년 멘데스 감독이 쿠바로 돌아가자 불렛 로건이 선수 겸 감독을 맡았다. 그 후 체트 브루어, 윌리엄 벨, 앤디 쿠퍼 등 뛰어난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크리스토발 토리엔테가 영입되었지만, 도비 무어는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모나크스는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에게 패했다. 1929년 모나크스는 NNL 타이틀을 획득하며 62승 17패라는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앤디 쿠퍼가 이 시기에 모나크스에 합류했다.[1]
2. 2. 야간 경기 도입과 전성기 (1930-1947)
모나크스는 1930년대에 야간 경기를 도입하여 더 많은 관중을 유치했다. 1930년 3월 초, 캔자스주 로렌스에서 첫 야간 경기가 열렸다. 모나크스는 팀 버스로 모든 경기에 운반할 수 있는 이동식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조명은 휴대용 발전기로 전력을 공급받았고 접이식 기둥에 부착되었다. 메이저 리그 팀을 포함하여 인공 조명 아래에서 정기적으로 야구를 한 최초의 팀이었다. 야간 경기는 모나크스가 더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여 니그로 리그에서 가장 안정적인 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1]모나크스는 리그가 해체된 후 수년간 독립 팀으로 활동하며 주로 중서부, 서부, 그리고 캐나다 서부를 바람잡이 투어했다. 종종 데이비드 하우스 야구팀과 함께 투어했다. 이 시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힐튼 스미스와 강타자 유격수 겸 외야수 윌라드 브라운이 팀의 주축 선수였다.[1] 앤디 쿠퍼 감독이 이끈 모나크스는 1937년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NAL)의 창립 멤버가 되어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앤디 쿠퍼는 1939년과 1940년에도 팀을 이끌며 우승기를 가져왔다.[2] 이후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는 두 번 더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1942년 니그로 월드 시리즈에서 홈스테드 그레이스를 상대로 4경기 만에 승리하여[3] 1942년에 부활한 니그로 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이러한 활약과 함께 모나크스는 명예의 전당 투수 새첼 페이지를 영입했다. 1927년 루키 시즌 이후 여러 팀에서 흑인 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명성을 쌓았던[9] 페이지는 팔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끝났다고 여겨졌으나, 1939년 모나크스 B팀에 합류했다. 1940년까지 회복하여 모나크스 주전 선수로 승격된 그는 팀의 흥행 카드가 되었다. 페이지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자를 삼진으로 잡기 전에 외야수들에게 그라운드에 앉아 있으라고 지시하거나, 경기 전 홈 플레이트 앞에서 껌 종이를 던지며 몸을 푸는 등 진실과 전설을 넘나드는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2] 힐튼 스미스, 체트 브루어 등을 포함한 모나크스의 뛰어난 투수진을 이끌었던 페이지는 1946년 마지막 NAL 우승을 이끌었지만, 뉴어크 이글스에게 7차전에서 패했다(3승 4패).[10]
2. 3. 인종 통합과 쇠퇴기 (1948-1965)
재키 로빈슨이 1946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며 몬트리올 로열스에서 마이너 리그의 인종 장벽을 깼고, 1947년에는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면서 흑인 야구의 판도가 바뀌었다.[10]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걸쳐 야구계에서 인종 차별이 점차 철폐되면서,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는 메이저 리그를 위한 흑인 선수 육성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모나크스는 새첼 페이지, 어니 뱅크스, 엘스턴 하워드, 행크 톰슨, 윌라드 브라운 등 다른 니그로 리그 팀보다 더 많은 선수를 메이저 리그에 배출했다.1948년, 오랜 기간 팀의 1루수로 활약했던 벅 오닐이 감독직을 맡았다. 같은 해, 모나크스는 리그 타이틀을 버밍햄 블랙 배런스에게 내주며 마지막 니그로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48년은 J.L. 윌킨슨이 모나크스를 톰 베어드에게 매각한 해이기도 하다.[3] 베어드는 1950년대 마이너 리그 시절까지 팀을 소유했다.
모나크스는 1949년 리그 서부 디비전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지만, 선수들을 메이저 리그 구단에 판매하면서 로스터가 줄어들어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 불참했다. 1950년에는 NAL 서부 디비전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동부 챔피언 인디애나폴리스 클라운스와 대결하지는 않았다. 1951년에는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 오닐은 1953년과 1955년에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1954년에는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가 쇠퇴하고 규모가 축소되면서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55년, 톰 베어드는 8명의 선수를 메이저 리그 구단에, 4명의 선수를 마이너 리그 팀에 팔았고,[11] 감독 벅 오닐을 해고했다. 오닐은 이후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트로 계약했다.[10] 베어드는 구단을 야구 사업가 테드 라즈베리에게 매각했고, 라즈베리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구단의 연고지를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로 옮겼다.[12]
1956년부터 모나크스는 본격적인 지방 순회 팀이 되었다.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는 1962년에 운영을 중단했고, 모나크스는 1965년 시즌 이후 해체되었다.
3. 주요 선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선수로는 어니 뱅크스, 쿨 파파 벨, 윌라드 브라운, 앤디 쿠퍼, 빌 포스터, 호세 멘데스, 벅 오닐, 새첼 페이지, 재키 로빈슨, 불릿 로건, 힐튼 스미스, 터키 스턴스, 크리스토발 토리엔테, 윌리 웰스, J.L. 윌킨슨 등이 있다.
토니 스톤은 흑인 리그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선수이며, 엘스턴 하워드는 12회 MLB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63년 아메리카 리그(AL) 최우수 선수(MVP)를 수상했다. 퀸시 트루페와 샘 뱅크헤드도 주목할 만한 선수였다.[1]
3. 1.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
1946–19491933–1939
1933–1938
1938–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