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메
1. 개요
켈메는 리투아니아에 위치한 도시로, '그루터기가 많은 곳'을 의미하는 리투아니아어 단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416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켈메 탈무드 토라라는 랍비 학교가 있던 유대인 교육의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켈메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대량 학살되었으며, 헝가리의 호드메죄바샤르헤이와 폴란드의 비우고라이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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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도시 |
|---|---|
| 위치 | 리투아니아, 사모기티아, 샤울랴이 주, 켈메 지구 |
| 수도 | 켈메 지구 |
| 최초 언급 | 1484년 |
| 도시 권한 부여 | 1947년 |
| 시장 | 바클로바스 안드룰리스 |
| 면적 | 7.85km² |
| 고도 | 128m |
| 시간대 | EET (UTC+2) |
| 하계 시간대 | EEST (UTC+3) |
| 웹사이트 | 켈메 공식 웹사이트 |
| 총 인구 (2021년) | 7,544명 |
|---|---|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 폴란드어 이름 | 키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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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명
켈메(Kelmė)의 이름은 설립 당시 그곳에 있던 숲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이며, 리투아니아어 단어 kelmynės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kelmynės는 문자 그대로 '그루터기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 이디시어 이름은 켈름(Kelm)이며, 이는 켈름 탈무드 토라에서 사용된 이름과 같다.
3. 역사
켈메는 1416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 해에 켈메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켈메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사모기티아 공국의 일부였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켈메(Kelm이디시어)는 켈메 탈무드 토라의 본거지였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켈메 인구 3,914명 중 2,710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 1941년 켈메 농촌 지역 유대인들은 대량 학살되었고,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학살이 있었다. 이 학살은 독일군, 보조 경찰, 리투아니아 협력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희생자 수는 총 1,250~1,300명이다.
3.1. 켈메 탈무드 토라와 유대인 공동체
켈메는 1416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 해에 켈메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켈메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사모기티아 공국의 일부였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켈메(Kelm이디시어)는 유명한 랍비 학교인 켈메 탈무드 토라의 본거지였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켈메의 3,914명 중 2,710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상인과 무역업자였다. 1941년 7월 29일, 켈메 농촌 지역 유대인 대부분이 대량 학살로 살해되었다. 8월 22일에는 두 번째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1941년 10월 2일, 일부 켈메와 바이구바의 유대인들이 자가레에서 살해되었다. 학살은 독일군, 보조 경찰, 그리고 리투아니아 협력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희생자 수는 총 1,250~1,300명이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켈메는 유대인 교육의 중심지였다.
3.2.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켈메(Kelm이디시어)는 유명한 랍비 학교인 켈메 탈무드 토라의 본거지였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켈메의 3,914명 중 2,710명이 마을의 유대인 인구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상인과 무역업자였다.
1941년 7월 29일, 켈메 농촌 지역의 유대인 대부분이 대량 학살로 살해되었고, 8월 22일 두 번째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1941년 10월 2일, 일부 켈메와 바이구바의 유대인들이 자가레에서 살해되었다. 이 학살은 독일군, 보조 경찰, 그리고 리투아니아 협력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희생자 수는 총 1,250~1,300명이다.
4. 주요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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