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기나이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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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기나이의 전투는 552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동고트족과 비잔틴 제국 간의 전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동고트족과의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나르세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은 기만 전술을 사용했지만, 비잔틴 군의 방어에 막혔다. 결국 나르세스가 이끄는 비잔틴 군의 총공격으로 동고트족은 패배했고, 토틸라는 전사했다. 이 전투는 동고트 왕국의 멸망을 가져왔고,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재정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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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기나이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동로마-고트 전쟁 |
날짜 | 552년 7월 |
장소 | 타기나이, 현재의 이탈리아 중부 (괄도타디노, 움브리아 주)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완벽한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동로마 제국 |
용병 | 포에데라티 롬바르드족 헤룰리족 게피드족 |
교전국 2 | 동고트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동로마 제국 지휘관 | 나르세스 |
동고트 왕국 지휘관 | 토틸라 |
병력 규모 | |
동로마 제국 병력 | 20,000명 |
동로마 제국 용병 규모 | 롬바르드족: 5,000명 헤룰리족: 3,000명 게피드족: 400명 |
동고트 왕국 병력 | 15,000명 |
사상자 규모 | |
동로마 제국 사상자 | 알 수 없음, 미미한 수준 |
동고트 왕국 사상자 | 6,000명 사망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전쟁 |
2. 배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에 시작된 동고트족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549년부터 이탈리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550~551년에 걸쳐 20,000명에서 25,000명 규모의 원정군이 아드리아 해의 살로나에 점차 집결했는데, 여기에는 정규 비잔티움 부대와 롬바르드족, 헤룰리족, 불가르족 등 외국 동맹군이 포함되었다.[6] 551년 중반, 황제의 시종관(cubicularius)이자 환관 출신의 노장 나르세스가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
2. 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수복 전쟁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49년 초부터 535년에 시작된 동고트족과의 장기적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탈리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550~551년 사이 아드리아 해의 살로나에는 정규 비잔티움 부대와 롬바르드족, 헤룰리족, 불가르족 등 외국 동맹군을 포함, 총 20,000~25,000명 규모의 원정군이 점차 집결했다.[6] 551년 중반, 제국 시종관(cubicularius) 나르세스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봄, 나르세스는 이 비잔티움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안코나까지 이동한 후,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로마로 진군하려 했다.2. 2. 나르세스의 등용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에 시작된 동고트족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549년부터 이탈리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550~551년에 걸쳐 20,000명 또는 25,000명 규모의 원정군이 아드리아 해의 살로나에 점차 집결했는데, 여기에는 정규 비잔틴 부대와 롬바르드족, 헤룰리족, 불가르족 등 외국 동맹군이 포함되었다.[6] 551년 중반, 황제의 시종관(cubicularius)이자 환관 출신의 노장 나르세스가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3. 전투 전개
비잔틴군은 토틸라 왕이 지휘하는 동고트군과 타기나이 또는 타디나이(전통적으로 현대 괄도 타디노 북쪽에 위치) 마을 근처에서 마주쳤다. 병력에서 열세였던 토틸라는 겉으로는 협상에 들어가는 척하면서 기습 공격을 계획했지만, 나르세스는 이러한 계략에 속지 않았다.[7]
토틸라는 전투를 지연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가식적인 협상 제안을 하거나, 전투선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를 제안했다.[7] 토틸라는 코카스라는 이름의 비잔틴 탈영병을 보내 비잔틴 군에게 단독 전투를 신청하게 했다. 코카스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전사였지만, 나르세스의 경호원인 아르메니아인 안잘라스가 도전에 응해 코카스를 물리쳤다.[7] 또한 토틸라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을 타는 묘기를 선보이며 시간을 끌었다.[7]
테이아로부터 2,000명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토틸라는 대형을 깨고 점심 식사를 위해 물러났고, 나르세스는 혹시 모를 계략에 대비하여 그의 군대가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7] 토틸라는 비잔틴 군 중심부에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기병 공격을 시작했지만, 비잔틴 군은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비잔틴 궁병들은 측면에 집결하여 전선을 중심으로 기울여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고, 양측에서 측면 사격을 받은 오스트고트 기병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격이 멈췄다.[7] 이후 전투의 과정은 불확실하지만, 초저녁 무렵 나르세스는 전반적인 진격을 명령했고, 오스트고트족은 붕괴되어 도주했다.[1]
3. 1. 양측 군대의 배치
나르세스는 군대를 강력한 방어 태세로 배치했다. 중앙에는 밀집 대형으로 하마한 대규모 게르만 용병 부대를 배치하고, 그 양쪽에 비잔틴군을 배치했다. 각 측면에는 4,000명의 보병 궁수를 배치했다.[7]토틸라는 처음에는 비잔틴 군 후방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장악하고 있는 비잔틴 좌익의 작은 언덕을 점령하여 상대를 우회하려 시도했으나, 방패로 잘 보호된 밀집 대형으로 배치된 비잔틴 보병들이 오스트고트 기병의 연이은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7]
나르세스의 위치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테이아로부터 2,000명의 증원군을 기대하며, 토틸라는 가식적인 협상 제안과 전투선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를 포함하여 전투를 지연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편을 사용했다. 그중 하나로, 토틸라는 코카스라는 이름의 비잔틴 탈영병을 보내 비잔틴 군에게 단독 전투를 신청하게 했다. 코카스는 거대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인물로, 고트족 사이에서 무자비하고 강력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나르세스의 경호원 중 한 명인 아르메니아인 안잘라스가 도전에 응했다. 코카스가 안잘라스에게 돌진했지만, 마지막 순간 안잘라스는 말을 급히 돌려 고트족 챔피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것은 오스트고트족에게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7]
오스트고트 왕에게는 또 다른 지연 전술이 있었다. 두 군대는 토틸라가 빛나는 자주색과 금색 갑옷을 입고 거대한 종마를 타고 두 대규모 군대 사이의 공간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말은 빙글빙글 돌고, 뒷발을 들고, 회전하고, 뒤로 달렸으며, 토틸라는 창을 공중에 던져 잡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군대로 돌아가 전투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테이아가 도착했다.[7]
증원군이 도착하자 토틸라는 대형을 깨고 점심 식사를 위해 물러났다. 나르세스는 가능한 계략을 경계하여 그의 군대가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허용했다. 토틸라는 적을 기습하려는 듯, 비잔틴 군 중심부에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기병 공격을 시작했다. 고대 및 현대 작가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비난했지만, 토틸라는 아마도 강력한 비잔틴 궁병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적과 접근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군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비했고, 궁병들은 측면에 집결하여 전선을 중심으로 기울여 그의 전투 대형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했다. 양측에서 측면 사격을 받아 오스트고트 기병은 큰 사상자를 냈고 공격은 멈췄다.[7]
3. 2. 토틸라의 기만 전술
Βουσταγαλλώρων|Boustagallṓrōngrc (문자 그대로 "갈리아인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에서[7], 타기나이 또는 타디나이(전통적으로 현대 괄도 타디노 북쪽에 위치) 마을 근처에서 비잔틴군은 토틸라 왕이 지휘하는 동고트군과 마주쳤다. 병력에서 열세였던 토틸라는 겉으로는 협상에 들어가는 척하면서 기습 공격을 계획했지만, 나르세스는 이러한 계략에 속지 않았다.나르세스의 위치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테이아로부터 2,000명의 증원군을 기대하며, 토틸라는 가식적인 협상 제안과 전투선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를 포함하여 전투를 지연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중 하나로, 토틸라는 코카스라는 이름의 비잔틴 탈영병을 보내 비잔틴 군에게 단독 전투를 신청하게 했다. 코카스는 덩치가 크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트족 사이에서 무자비하고 강력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나르세스의 경호원 중 한 명인 아르메니아인 안잘라스가 도전에 응했다. 코카스는 안잘라스에게 돌진했지만, 마지막 순간 안잘라스는 말을 급히 돌려 고트족 챔피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것은 오스트고트족에게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고트 왕에게는 또 다른 지연 전술이 있었다. 두 군대는 토틸라가 빛나는 자주색과 금색 갑옷을 입고 거대한 종마를 타고 두 대규모 군대 사이의 공간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말은 빙글빙글 돌고, 뒷발을 들고, 회전하고, 뒤로 달렸으며, 토틸라는 창을 공중에 던져 잡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군대로 돌아가 전투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테이아가 도착했다.
증원군이 도착하자 토틸라는 대형을 깨고 점심 식사를 위해 물러났다. 나르세스는 혹시 모를 계략에 대비하여 그의 군대가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허용했다.
3. 3. 전투의 시작과 결과
토틸라는 처음에는 비잔티움 군의 후방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장악하고 있는 비잔티움 좌익의 작은 언덕을 점령하여 상대를 우회하려 시도했으나, 방패로 잘 보호된 밀집 대형으로 배치된 비잔티움 보병들이 오스트고트 기병의 연이은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나르세스의 위치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테이아로부터 2,000명의 증원군을 기대하며, 토틸라는 가식적인 협상 제안과 전투선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를 포함하여 전투를 지연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편을 사용했다.[1] 그중 하나로, 토틸라는 코카스라는 이름의 비잔티움 탈영병을 보내 비잔티움 군에게 단독 전투를 신청하게 했다.[1] 코카스는 거대하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트족 사이에서 무자비하고 강력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1] 나르세스의 경호원 중 한 명인 아르메니아인 안잘라스가 도전에 응했다.[1] 코카스는 안잘라스에게 돌진했지만, 마지막 순간 안잘라스는 말을 급히 돌려 고트족 챔피언의 옆구리를 찔렀다.[1] 이것은 오스트고트족에게 가장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1]
그러나 오스트고트 왕에게는 또 다른 지연 전술이 있었다.[1] 두 군대는 토틸라가 빛나는 자주색과 금색 갑옷을 입고 거대한 종마를 타고 두 대규모 군대 사이의 공간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1] 그의 말은 빙글빙글 돌고, 뒷발을 들고, 회전하고, 뒤로 달렸으며, 토틸라는 창을 공중에 던져 잡았다.[1] 마침내 그는 자신의 군대로 돌아가 전투 갑옷으로 갈아입었다.[1] 테이아가 도착했다.[1]
증원군이 도착하자 토틸라는 대형을 깨고 점심 식사를 위해 물러났다.[1] 나르세스는 가능한 계략을 경계하여 그의 군대가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허용했다.[1] 토틸라는 적을 기습하려는 듯, 비잔티움 군 중심부에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기병 공격을 시작했다.[1] 고대 및 현대 작가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비난했지만, 토틸라는 아마도 강력한 비잔티움 궁병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적과 접근하려 했을 것이다.[1] 그러나 비잔티움 군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비했고, 궁병들은 측면에 집결하여 전선을 중심으로 기울여 그의 전투 대형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했다.[1] 양측에서 측면 사격을 받아 오스트고트 기병은 큰 사상자를 냈고 공격은 멈췄다.[1] 이후 전투의 과정과 지속 시간은 불확실하지만, 초저녁 무렵 나르세스는 전반적인 진격을 명령했고, 오스트고트족은 붕괴되어 도주했다.[1] 기록은 다르지만, 토틸라가 사망한 것은 아마도 그 이후의 도주 과정에서였을 것이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타기나이의 전투는 동고트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간의 오랜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4. 1. 동고트 왕국의 멸망
나르세스는 로마로 진군했고, 로마는 제한적인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후계자 테이아 아래 재집결했지만, 베수비오 산 근처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최종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후 동고트족은 6세기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또 다른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 2.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재정복
나르세스는 로마로 진군했고, 로마는 제한적인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1]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후계자 테이아 아래 재집결했지만, 베수비오 산 근처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최종적인 패배를 겪었다.[1] 이후 6세기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또 다른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4. 3. 역사적 의의
나르세스는 로마로 진군하여 제한적인 저항 끝에 로마를 함락시켰다.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후계자 테이아 아래 재집결했지만, 베수비오 산 근처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이들은 6세기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또 다른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ume 3
[2]
서적
Handbook of mediæval geography and history
[3]
서적
Battles The World's History: Central and northern Europe
[4]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https://archive.org/[...]
[5]
서적
Encyclopædia Britannica: Vol. XI
[6]
서적
Byzantium: The Early Centuries
[7]
서적
Busta Gall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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