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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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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르세스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환관이자 군인으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동안 고위 재무관, 환관 근위대 사령관, 대궁내장을 거쳐 군사령관까지 올랐으며, 532년 니카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승리하고 토틸라를 죽여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통치 후 황후 소피아와의 갈등으로 소환된 후 나폴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말년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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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전통적으로 나르세스로 확인되는 인물, 산 비탈레 대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수행원들을 묘사한 모자이크에서.
개인 정보
출생일478년 또는 480년
사망일566년 또는 573년 (향년 86/95세)
군사 경력
소속동로마 제국
군종동로마군
계급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니카 반란
고트 전쟁
타기나이 전투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
볼투르누스 전투

2. 초기 생애와 배경

나르세스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출신의 아르메니아인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478년에서 48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의 가족, 혈통, 어떻게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2][3][6]

아가티아스는 나르세스를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고 시대에 적응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문학에 정통하지도 않았고 웅변에도 능숙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지의 풍부함으로 그것을 만회했다."라고 묘사하며,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기운이 넘쳤다"라고 평가했다.[7]

2. 1. 출신과 환관이 된 배경

나르세스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약 100년 전 아킬리세네 조약에 따라 페르시아에 할양된 아르메니아의 동부 지역이었다.[2] 그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3] 1차 사료에서 그에 대한 최초 언급은 서기 530년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6] 나르세스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들은 출생년도를 478년, 479년, 480년 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사망년도는 566년에서 574년 사이로 추정하여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6세에서 96세 사이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가족과 혈통, 출신, 환관이 된 배경에 대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가티아스는 그를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고, 시대에 적응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문학에 정통하지도 않았고, 웅변에도 능숙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지의 풍부함으로 그것을 만회했다." 그리고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기운이 넘쳤다."라고 묘사했다.[7]

2. 2. 종교적 신념

나르세스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헌신을 보인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에바그리우스 슐라스티쿠스의 교회사(Ecclesiastica Historia)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공격할 적절한 시기를 알려주었고, 나르세스는 그녀의 허락 없이는 결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8] 또한 나르세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교회를 복구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기도와 철야에 그토록 헌신적이었기에 "전쟁의 무기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로 승리를 얻었다"고 한다.[9] 나르세스는 군대의 최고 사령관직을 수락하기 전에 퇴역 후 거처할 요량으로 카파도키아에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했다.[10]

3. 초기 경력

나르세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언제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로코피우스는 53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집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나르세스를 처음 언급했다. 나르세스는 황제의 재정과 황실 재무부 지출을 담당하는 고위 재무관이었다. 그는 황제의 환관 근위대 사령관을 거쳐 대궁내장(praepositus sacri cubiculi)이자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다.[11] 테오도시우스 2세422년 환관의 귀족(Patrician) 임명을 금지했지만,[12]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법을 뒤엎어 나르세스는 귀족이 되었다.

3. 1.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활동

나르세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언제 어떻게 도착했는지, 또는 대궁내장 직무에서 어떻게 발판을 마련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프로코피우스가 나르세스를 처음 언급하는 것은 53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집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이다. 나르세스는 황제의 재정과 황실 재무부의 지출을 담당하는 고위 재무관이었다. 그는 계급을 밟아 황제의 환관 근위대 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대궁내장(praepositus sacri cubiculi)이자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다.[11] 테오도시우스 2세422년 환관의 귀족(Patrician) 임명을 금지했지만[12]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법을 뒤엎었고, 따라서 나르세스는 귀족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인 궁정 관리 나르세스는 정직한 성격으로 인정받아 대재무관까지 승진했다. 532년 니카의 폭동에서 황제를 구출했다.

3. 2. 니카 반란 진압 (532년)

나르세스는 532년 니카 폭동 진압에 관여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또는 테오도라 황후의 지시를 받아 푸른 당파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줄 충분한 자금을 가져갔다. 나르세스는 그들의 당파심에 호소하여, 그들이 황제로 선포하려던 히파티우스가 녹색 당파 출신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푸른 당파를 지지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돈이든 그의 말이든 푸른 당파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지지하고 히파티우스에게 등을 돌리도록 설득했다.[13] 나르세스 자신이 황제석에서 히파티우스를 끌어내린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 군사 경력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능한 장군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 제국 재건 원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니카의 폭동 진압에 기여했으며,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서 활약했다.

538년, 나르세스는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코나에 상륙하여 벨리사리우스와 합류했다.[14] 아리미눔 공성전에서 벨리사리우스를 설득하여 요한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벨리사리우스와 갈등을 겪었다.[16] [17] 군대는 벨리사리우스 파와 나르세스 파로 나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나르세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18] [19] 그러나 분열은 계속되었고, 결국 나르세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20]

551년,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원정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황제의 재정 지원을 받아 2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의 대규모 군대를 모집했으며,[24] 병사들을 잘 대우하여 많은 용병들의 지지를 얻었다.[25]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가 인원과 무기 면에서 "로마 제국에 걸맞은" 군대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26]

나르세스는 동고트 왕국의 왕 토틸라가 이끄는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세나 갈리카 전투: 동고트 함대를 격파하여 토틸라의 해상 지배력을 종식시켰다.[27] [29]
  • 타기나이 전투: 토틸라를 전사시키고 동고트군을 대파했다.[33]
  • 로마 점령: 타기나이 전투 이후 로마를 점령하고, 쿠마에에 보관되어 있던 토틸라의 국고를 점령했다.
  •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 테이아가 이끄는 잔존 동고트군을 격파했다.[44]
  • 볼투르누스 전투: 프랑크족의 침입을 막아냈다.[50]


나르세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전략으로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4. 1. 이탈리아 원정 이전

아르메니아 출신인 나르세스는 정직한 성격으로 궁정 관리로서 인정을 받아 대재무관까지 승진했다. 532년, 니카의 폭동에서 황제를 구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14]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 제국 재건 원정에서 벨리사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 군대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여 동방 전선 재건을 위해 본국으로 소환된 후,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원정에 파견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부재 중 동로마군은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군에게 패배를 거듭하며 로마나폴리 등 주요 도시를 빼앗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이탈리아로 보냈지만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벨리사리우스를 해임하고 나르세스를 동고트 왕국 정복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538년 6월, 나르세스는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코나에 도착했다.[14] 이 병력은 여러 부족 출신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다.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를 "환관치고는 예리하고 활동적"이라고 묘사했다.[15]

나르세스는 피르뭄에서 벨리사리우스를 만나 아리미눔 공성전과 요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전쟁 회의를 열었다. 나르세스는 요한이 이미 무례함에 대한 벌을 받았으며, 고트족이 리미니를 점령하면 전쟁의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16]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북서쪽에서 리미니로 진격하기 위해 내륙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부대를 이끌었다.

요한은 벨리사리우스를 설득한 나르세스에게 감사했지만, 프로코피우스는 "그때부터 두 사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은 서로를 매우 의심하기 시작했다"라고 기록했다.[17]

4. 2. 벨리사리우스와의 갈등

538년 6월, 나르세스는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벨리사리우스와 합류했다.[14] 이들은 피르뭄에서 만나 아리미눔 공성전과 요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나르세스는 고트족이 리미니를 점령하면 전쟁의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벨리사리우스를 설득했다.[16]

요한은 벨리사리우스를 설득한 나르세스에게 감사했지만, 프로코피우스는 "그때부터 두 사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은 서로를 매우 의심하기 시작했다."라고 기록했다.[17] 538년 가을과 겨울 동안 이탈리아의 군대는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파로 나뉘었다.[18]

이러한 분열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나르세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19] 그러나 분열은 계속되었고, 밀라노는 분열된 지휘 체계 때문에 함락되었다. 결국 나르세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지만, 일부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명예스러운 소환은 아니었다.[20]

4. 3. 이탈리아 재원정 (551년)

551년, 나르세스는 황제의 재정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원정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나르세스는 국고를 이용하여 2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의 대규모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다.[24] 이 군대는 대부분 야만인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나르세스는 그들을 "특히 잘" 대우했기 때문에 많은 용병들의 호감을 산 것으로 보인다.[25]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가 인원과 무기의 요건에서 "로마 제국에 걸맞은" 군대를 건설했다고 보고했다.[26]

나르세스는 임명 후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렸는데, 이는 그의 군대 전체가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긴 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동고트 왕 토틸라는 이탈리아 동부 해역을 장악하고 나르세스 군대를 향해 출항하는 보급선을 방해했다. 살로나의 요한은 38척의 배를 이끌고 발레리아누스는 12척의 배를 이끌고 토틸라의 군대와 만나 안코나에 구원을 가져다주었다.[27] 프로코피우스는 그 후의 세나 갈리카 전투를 육상 전투와 비슷한 해전으로 묘사했다. "마치 전장에서처럼 화살이 발사되고 칼과 창으로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28] 세나 갈리카에서의 비잔티움의 승리는 압도적이었으며, 고트 함선 47척 중 36척이 파괴되었고, 고트 해군 사령관 기발이 사로잡혔다. 역사가 아치볼드 R. 루이스는 토틸라의 해상 지배력이 끝난 후에야 나르세스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29]

나르세스의 행군이 매우 느렸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토틸라가 지연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여러 부대를 파견했고, 프랑크족은 나르세스의 동맹인 롬바르드족의 적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가 "완전히 당황했다"고 말했지만, 요한은 이탈리아 그 지역에 익숙했고 그에게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조언했다.[30] 이 조언을 이용하여 나르세스는 아무런 저항 없이 라벤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토틸라는 나르세스가 이전의 모든 침략이 온 바다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31]

4. 4. 동고트 왕국과의 전쟁

나르세스는 551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촌인 게르마누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마무리하도록 임명되었으나, 55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23] 나르세스는 새로운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2년 만에 이탈리아로 복귀했다. 고령의 나르세스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나르세스는 황제의 재정 지원을 받아 2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의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24] 그는 병사들을 잘 대우하여 많은 용병들의 지지를 얻었다.[25]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가 인원과 무기 면에서 "로마 제국에 걸맞은" 군대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26] 이 군대는 대부분 야만족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나르세스 군대와 유사했다.

나르세스는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육로로 이동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도착에 1년 이상이 걸렸다. 동고트 왕 토틸라는 이탈리아 동부 해역을 장악하고 보급선을 방해했다. 살로나의 요한과 발레리아누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함대는 세나 갈리카 전투에서 토틸라의 함대를 격파하고 36척의 함선을 파괴했다.[27] 이 승리로 토틸라의 해상 지배력은 종식되었다.[29]

토틸라의 지연 전술과 롬바르드족의 적이었던 프랑크족의 방해로 나르세스의 진군은 더뎠다. 프로코피우스는 나르세스가 "완전히 당황했다"고 기록했지만,[30] 요한의 조언으로 나르세스는 저항 없이 라벤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토틸라는 나르세스가 해상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도 있다.[31]

4. 4. 1. 타기나이 전투 (552년)

나르세스는 토틸라에게 항복하거나 전투 날짜를 정할 기회를 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토틸라의 "8일 후에 우리의 힘을 겨뤄보자."라는 답변에 속지 않았다.[33] 그는 자신의 군대가 토틸라의 군대보다 규모가 클 것이므로 전술적 방어를 선택했다. 이후 전투는 나르세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그의 군사적 재능은 벨리사리우스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나르세스는 병력을 초승달 모양[34]으로 배치했는데, 중앙에는 주로 보병을 배치하고 양쪽 측면에는 궁수를 배치했다. 보병은 사실 기병이었는데, 많은 고트족이 일반 보병은 약하고 돌격 앞에서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병을 해체시켜 보병으로 사용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헤룰리족과 롬바르드족을 중앙에 해체시켜 배치한 데에는 정치적 동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르세스가 그들이 토틸라에게 동정심이나 찬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가능성이 있다.[35]

초승달 양쪽 측면에는 보병 궁수들이 배치되어, 고트족 기병을 사격하여 섬멸할 수 있었다. (궁수의 배치와 전투에 미친 영향은 후일의 아쟁쿠르 전투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34] 다음으로 나르세스는 해체된 보병 양쪽 측면에 기병 대부분을 배치했다. 일반적으로 기병은 중앙 뒤에 배치되었겠지만, 이들은 어려움을 겪는 전열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고트군이 완전히 포위되었을 때 기습 공격을 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나르세스는 토틸라가 "약한" 중앙을 공격하는 유리한 점을 이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고트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다. 프로코피우스는 토틸라가 "자신의 어리석음에 능가당했다"[36]고 말했는데, 토틸라가 빠른 타격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부대에게 창만 사용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토틸라는 끊임없이 부대를 파견했지만, 쏟아지는 화살비에 혼란에 빠져 해체된 보병과 만났을 때는 이미 완전히 궤멸 상태였다. 고트족 보병은 나르세스의 기병이 언덕에서 측면을 공격할까봐 두려워 전진을 망설였고,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토틸라의 기병은 자체 보병 전열로 밀려났고, 나르세스는 예비로 유지했던 자신의 기병을 돌격시켰다.[37] 고트족 기병이 보병을 짓밟고 후퇴하면서, 후퇴는 순식간에 궤멸로 이어졌다.[38]

토틸라 자신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프로코피우스는 오스트로고트 왕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전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토틸라가 전투에서 처음에는 살아남아 단 5명의 추종자만 데리고 전장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게피드족의 지도자 아스바드가 그를 따라잡아 창으로 찔렀다. 시신은 즉시 카프라에 마을로 옮겨져 서둘러 매장되었다.[39] 두 번째 이야기는 토틸라가 첫 번째 파상 공격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그의 표적을 알아보지도 못한 궁수의 화살에 맞았다는 것이다.[40] 후에 한 고트족 여성이 토틸라의 매장지점을 알려주었고, 시신을 발굴하여 신원을 확인했기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가 역사가들 사이에서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4. 4. 2. 로마 점령

나르세스는 타기나이 전투 이후 로마로 진군하여 단기간의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나르세스는 대규모 궁수 부대를 이끌고 한쪽에서 공격하는 동안, 요한은 성벽의 다른 부분을 공격했다.[41] 로마에서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모든 오스트로고트 군대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나르세스는 쿠마에에 보관되어 있던 토틸라의 국고를 점령했다. 프로코피우스와 아가티아스는 모두 쿠마에 요새가 매우 강력하다고 기록했다.[42] [43]

4. 4. 3.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 (553년)

토틸라가 죽은 후, 테이아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새로운 왕이 되었지만, 살레르노 근교의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Battle of Mons Lactarius)에서 나르세스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44]

고트족은 갑작스럽게 산에서 밀집한 방진을 이루어 내려와 보병으로 싸우고 있던 군대를 기습했다.[44] 기습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르세스 또한 무장하지 않고 싸운 것으로 보인다. 이어진 전투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프로코피우스는 테이아스 왕의 용감함을 묘사하면서 이 전투를 "매우 중요한 전투"라고 소개했고, 테이아스 왕이 보여준 영웅심은 "전설 속 영웅들에 뒤지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45]

테이아스는 나르세스를 향해 돌격을 이끌었다. 프로코피우스는 그의 방패가 화살로 가득 찰 때마다 무장병으로부터 다른 방패를 받았다고 전한다. 창이 그의 방패를 뚫었을 때, 그는 다른 방패를 받았지만 치명상을 입었다. 병사는 그의 머리를 잘라 고트족에게 왕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고트족은 낙담하지 않고 다음 날까지 싸웠다.[46] 둘째 날은 첫째 날과 매우 비슷했고, 고트족은 보병으로 돌격하여 싸웠으며, 전술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트족은 장교 몇 명을 나르세스에게 보내 안전하게 나라를 떠날 수 있다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요한의 조언을 받은 나르세스는 그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47]

4. 4. 4. 프랑크족 격퇴 (554년)

고트 전쟁 이후, 프랑크족의 레우타리스와 부킬리누스 형제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교황서에는 "그들(프랑크족) 또한 이탈리아를 황폐화했다. 그러나 주님의 도움으로 그들 또한 나르세스에게 멸망당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이 기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8] 나르세스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로마에 재집결하여 봄에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49]

카실리눔 전투에서 나르세스는 중앙에 "안테시그나니(Ante-signani)"라고 불리는 정예 중장보병을 배치하고, 긴 갑옷을 착용하게 했다.[50] 측면에는 훈련된 기병대를 배치하여 모든 무기를 장착하게 했다. 아가티아스는 프랑크족을 "매우 무례하고 기병이 없는 자들"이라고 묘사하며, 그들의 주요 무기는 도끼와 갈고리창이었다고 기록했다.[51]

프랑크족은 나르세스의 중앙을 공격했고, 처음에는 후퇴했지만 헤룰리족의 증원으로 공격 속도가 늦춰졌다.[52] 이때 나르세스는 기병대를 측면에서 이동시켜 프랑크족에게 화살을 퍼붓게 했다.[53] 프랑크족은 혼란에 빠졌고, 밀집 대형이 붕괴되었다. 나르세스는 총공격을 명령하여 프랑크족을 몰살시켰다.[54] 아가티아스는 나르세스의 손에서 겨우 다섯 명만이 탈출했다고 주장했다.[55]

554년 가을, 나르세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가티아스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56]

5. 이탈리아 통치와 말년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 남아 정부를 재편했을 가능성이 있다.[57]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나르세스에게 "실정령"으로 알려진 일련의 새 칙령을 보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일부 복원 사업을 완료했지만, 로마를 옛 영광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시로 들어가는 많은 다리를 수리하고 도시 성벽을 재건했다.[59]

나르세스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567년 또는 574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0] 전설에 따르면, 로마인들을 억압하여 유스티누스 2세와 황후 소피아의 분노를 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이후 나폴리로 은퇴했다.[60] 나폴리에서 롬바르드족에게 이탈리아 북부 침략을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60]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그의 시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평화로운 은퇴 및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로 초대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된다.[61]

그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다시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벨리사리우스와 견줄 만하며, 특히 타기나이 전투에서의 전술은 높이 평가받는다. 환관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라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한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1]

5. 1. 이탈리아 통치 (554년 ~ 567/574년)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 남아 정부를 재편했을 가능성이 있다.[57]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나르세스에게 "실정령"으로 알려진 일련의 새 칙령을 보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시기의 나르세스를 엑사르크(총독)로 언급한다.[58]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서 일부 복원 사업을 완료했지만, 로마를 옛 영광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시로 들어가는 많은 다리를 수리하고 도시 성벽을 재건했다.[59]

5. 2. 말년과 죽음

나르세스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567년 또는 96세의 나이로 574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0]

전설에 따르면, 나르세스는 로마인들을 억압하여 유스티누스 2세와 그의 아내 황후 소피아의 분노를 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이후 나폴리로 은퇴했다.[60] 소피아가 나르세스에게 황금 방추를 보내며 궁궐로 돌아와 여자들의 방적을 감독하라는 비꼬는 메시지를 보냈고, 나르세스는 그녀와 유스티누스 모두 결코 끝을 찾을 수 없는 실을 뽑겠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폴리에서 나르세스는 롬바르드족에게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하도록 초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60] 역사학자 던랩은 황후와 나르세스 사이에 적대감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61]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그의 시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평화로운 은퇴와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로 초대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된다.[61] 에페수스의 요한은 나르세스가 황제와 황후 앞에서 그가 세운 비티니아 수도원에 묻혔다고 기록했다.[62][63]

5. 3. 유산

나르세스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다시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벨리사리우스와 견줄 만하며, 특히 타기나이 전투에서의 전술은 높이 평가받는다. 환관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라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한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1]

6. 평가

나르세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된다. 니카의 폭동에서 황제를 구출하고, 동고트 왕국 정복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벨리사리우스가 이룬 성과를 이어받아 이탈리아 반도 재정복을 완수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나르세스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국력을 회복한 영웅적인 인물로 재조명될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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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Narses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Byzantium Scarecrow Pres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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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History of the Wars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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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History of the Langobards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07
[10] 서적 The Age of Justinian and Theodora Gorgias Press 1905
[11] 서적 Na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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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논문 The Barbarians in Justinian's Armies 196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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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The Histories Walter de Gruyter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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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서적 The City Walls of Imperial Rome Clarendon Press 1930
[60] 서적 Na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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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적 Office of the Grand Chamberlain
[63] 웹사이트 The Eunuch in Byzantine History and Societ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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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서적 ビザンツ 文明の継承と変容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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