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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외국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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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외국인학교는 1900년 6월 평양에 설립된 외국인 자녀를 위한 학교이다. 당시에는 Pyeng Yang Foreign School로 불렸으며, 1914년 기숙사 설립 이후 뉴욕주 교육과정을 따르는 명문 학교로 성장했다. 중국, 일본 등 동양에 거주하는 외국인 자녀들이 다녔으며, 대천덕 신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40년 11월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폐교되었으며, 학교 건물은 한국 전쟁 중 파괴되었다. 대전외국인학교가 평양외국인학교의 교육 정신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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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외국인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평양외국인학교
평양외국인학교 2012
2012년 평양외국인학교
기본 정보
이름평양외국인학교
원래 이름평양외국인학교
한자 표기平壤外國人學校
로마자 표기Pyeongyang Oegugin Hakgyo
문화어 표기P'yŏngyang Oegugin Hakkyo
위치평양시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역사

1900년 6월 평양에서 학생 네 명과 루이스 오길비 교사 한 명으로 외국인 학교가 시작되었다.[5] 당시 학교 이름은 영문으로 Pyeng Yang Foreign School이었다. 1914년 학생 기숙사가 세워지고 미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이 많이 오면서 뉴욕주 교육부의 교육과정을 따르게 되었다. 그 결과 평양외국인 학교 졸업생들은 미국 고등학교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고, 점차 명문 학교로 인정받았다. 평양이 동양의 기독교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당시 조선은 물론 중국일본에 있는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자녀를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존 윌슨 박사가 제작한 평양외국인학교 40년사 앨범에 따르면, 40년 동안 이 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584명, 졸업생은 188명이었다.[6] 대천덕 신부,[7]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8]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졸업생 다수는 한국에 남아 이화여전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1940년 11월,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되었다.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후 남장로교 선교사로 일했던 로버트 윌슨의 후손 수십 명이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의 몬트릿 지역에 살고 있어 미국의 소리(VOA Korea) 기자가 방문하여 평양외국인학교를 소개한 바 있다.[8] 몬트릿은 빌리 그레이엄루스 그레이엄 부부가 살던 작은 마을이기도 하다.

2. 1. 설립 초기 (1900년 ~ 1910년대)

1900년 6월 평양에서 학생 네 명과 루이스 오길비 교사 한 명으로 외국인 학교가 시작되었다.[5] 당시 학교 이름은 영문으로 Pyeng Yang Foreign School이었다. 1914년 학생 기숙사가 세워지고 미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이 많이 오면서 뉴욕주 교육부의 교육과정을 따르게 되었다. 그 결과 평양외국인 학교 졸업생들은 미국 고등학교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고, 점차 명문 학교로 인정받았다.[6]

2. 2. 발전과 번영 (1910년대 ~ 1940년)

1910년대에 평양이 동양의 기독교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평양외국인학교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사 및 외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명문 학교로 인정받게 되었다.[6] 학생 기숙사가 세워지고 미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이 오면서, 뉴욕주 교육부의 규정을 따라 교육과정을 가르쳤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미국 고등학교로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5]

존 윌슨 박사가 제작한 평양외국인학교 40년사 앨범에 따르면, 40년 동안 584명이 등록하고 188명이 졸업했다.[6] 대천덕 신부,[7]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3][8] 등 저명한 인사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졸업생 다수는 한국에 남아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2. 3. 폐교와 그 이후 (1940년 ~ 현재)

1940년 11월,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되었다.[8] 한국 전쟁 중에 학교 건물이 파괴되었고, 그 부지는 현재 러시아 대사관 단지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4] 1958년부터 관련된 선교 교직원들은 대전외국인학교에서 그들의 유산을 이어갔다.[2] 1930년대빌리 그레이엄의 부인인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가 평양외국인학교에 다녔다.[3]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후 남장로교 선교사로 일했던 로버트 윌슨의 후손 수십 명이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의 몬트릿 지역에 살고 있어 미국의 소리(VOA Korea) 기자가 방문하여 평양외국인학교를 소개한 바 있다.[8] 몬트릿은 빌리 그레이엄루스 그레이엄 부부가 살던 작은 마을이기도 하다.

3. 저명한 동문

대천덕 신부는 한국 성공회 신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했다.[7]

루스 벨 그레이엄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으로, 복음주의 운동가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에 유학 와서 졸업한 후 미국 휘튼대학으로 진학했다.[3][7]

참조

[1] Youtube Pyongyang Foreigners School https://www.youtube.[...]
[2] 웹사이트 평양외국인학교 계승한 대전외국인학교, 새 캠퍼스 신축이전 http://m.kmib.co.kr/[...] 2012-07-09
[3] 웹사이트 Ruth Bell Graham Concludes Historic Return Trip To North Korea http://www.prnewswir[...]
[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Pyongyang Anthem Press 2013
[5] 서적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6] 웹사이트 4대째 한 반도에서 봉사하는 블랙마운틴의 미국인들 https://www.voakorea[...] VOA 2007-11-28
[7] 서적 종교개혁 길위를 걷다 두란노 2017
[8] 웹사이트 4대째 한 반도에서 봉사하는 블랙마운틴의 미국인들 https://www.voakorea[...] VOA 200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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