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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퍼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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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리퍼 작전은 1941년 11월 영국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에르빈 롬멜을 사살하거나 생포하기 위해 시도한 특수 작전이다. 롬멜의 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나, 롬멜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작전이 진행되어 실패로 끝났다. 작전 지휘관인 로버트 레이코크 중령과 제프리 키스 중령 등이 투입되었으며, 키스는 작전 중 사망하여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 플리퍼 작전은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강행했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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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퍼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플리퍼 작전 (Operation Flipper), 롬멜 습격 작전
일부서부 사막 전역
날짜1941년 11월 10일 ~ 1941년 11월 18일
장소리비아
결과추축국 승리, 영국의 작전 실패
교전 세력
교전국 2
지휘관 및 지도자
영국로버트 레이콕
제프리 키스
추축국에르빈 롬멜
알프레도 메르쿠로
사상자 및 피해
영국2명 전사
28명 포로 (3명 부상자 포함)
추축국4명 전사
3명 부상
관련 전투

2. 배경

1941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은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롬멜의 뛰어난 전술과 지휘 능력은 영국군에게 큰 위협이었고, 이에 영국군은 롬멜을 제거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버트 레이콕 대령의 지휘 아래 롬멜을 암살 또는 유괴하기 위한 플리퍼 작전이 계획되었다.[1] 그러나 이 작전은 1941년 11월 10일부터 12월 25일까지 진행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2]

2. 1. 작전 계획

1941년 10월부터 11월까지, 제8군 사령부에서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작전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1]

목표
베다 리토리아 인근, 아폴로니아에서 내륙으로 약 28.9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롬멜의 예상 사령부.
아폴로니아에 있는 무선 기지 및 정보 센터.
키레네에 있는 이탈리아 사령부 및 통신 케이블 기둥.
슬론타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사단 사령부.



명령서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습격의 목표는 롬멜을 사살하거나 생포하여 십자군 작전 개시 전에 독일군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존 해즐던 대위가 아랍인으로 위장하여 정찰한 결과 롬멜의 참모차량이 이전 현청을 오가는 것을 보고했기 때문에, 롬멜의 사령부는 베다 리토리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작전은 로버트 레이콕 중령이 지휘했으며, 기획 단계 전체에 참여한 제프리 찰스 태스커 키스 중령은 롬멜 사령부 공격이라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1] 제프리 키스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5]

계획자들은 베다 리토리아가 롬멜의 사령부로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고, 아프리카 기갑 집단de의 주임 병참 장교인 슐로이저 장군이 이곳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몇 주 전, 롬멜은 작전 수행을 위해 그의 사령부를 토브룩 근처로 옮겼다. 롬멜은 플리퍼 작전 당시 북아프리카에 있지도 않았는데, 영국군에 의해 격침된 보급선에 대한 대체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기 때문이다.[1]

3. 작전 실행

잠수함 HMS 토베이


1941년 11월 10일, 영국군 코만도 부대는 잠수함 HMS 토베이(Torbay)와 HMS 탈리스만(Talisman)을 이용하여 북아프리카 해안에 상륙을 시도했다. HMS 토베이에는 제프리 키스, 로빈 캠벨 대위, 로이 쿡 중위, 그리고 25명의 대원이 탑승했고, HMS 탈리스만에는 로버트 레이코크, 글렌 대위, 데이비드 맥베스 서덜랜드 중위, 그리고 25명의 대원이 탑승했다.

11월 14/15일 밤, 키스 부대는 폴보트(접이식 카누)를 탄 2인 특별 보트 부대(SBS) 팀의 안내를 받아 Khashm al-Kalb|카심 알-칼브ar(개의 코) 해변에 상륙했다.[3] 이 해변은 하마마로 알려진 장소 근처로, 추축군 후방 약 약 402.33km 지점에 있었다.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이전에 장거리 사막 그룹에 의해 투입된 헤이즐든과 접촉했다.

날씨가 악화되면서 레이콕 부대는 상륙에 어려움을 겪었다. 레이콕과 7명의 대원만 상륙에 성공했고, 나머지는 HMS 탈리스만에 고립되었다. 59명의 대원 중 34명만 남게 되면서, 목표물을 공격하는 부대는 4개에서 3개로 줄었다.[3] 레이콕은 해변 확보를 위해 3명의 대원과 함께 대기했고, 키스는 25명의 대원을 이끌고 롬멜의 본부로 추정되는 곳을 공격했다. 쿡 중위는 6명의 대원을 데리고 키레네 근처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헤이즐든의 부대는 임무를 완수하고 장거리 사막 그룹에 의해 회수되었다.

로버트 레이코크는 모인 대원들에게 적진 깊숙이 잠입하기 때문에 생환 가능성은 극히 적으며 각오해 달라고 말했다.[4] 하지만 습격했으나 롬멜은 존재하지 않아 실패했다. 습격 지점은 추축군 병참 사령부였으며 롬멜은 있지도 않은 곳이었다. 레이코크는 살아남은 부대를 작은 조로 나누어 탈출했지만 생환한 것은 레이코크와 다른 1명뿐이었다.[5]

3. 1. 전투 경과

는 11월 10일 키스, 로빈 캠벨 대위, 로이 쿡 중위, 그리고 25명의 대원을 태웠다. 키스의 부대는 폴보트(접이식 카누)를 탄 2인 특별 보트 부대(SBS) 팀의 안내를 받아 Khashm al-Kalb|개의 코ar 해변에 상륙했다.[3] 이 해변은 추축군 후방 약 약 402.33km 지점이었다. 날씨가 악화되면서 레이콕의 그룹은 상륙에 어려움을 겪었다. 레이콕과 7명의 대원만 상륙하고 나머지는 ''Talisman''에 고립되었다. 59명의 대원 중 34명만 남게 되자, 목표물을 공격하는 부대는 3개로 줄었다.[3] 레이콕은 해변을 확보하기 위해 3명의 대원과 함께 대기했고, 키스는 25명의 대원을 이끌고 롬멜의 본부로 추정되는 곳을 공격했으며, 쿡 중위는 6명의 대원을 데리고 키레네 근처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새벽 직전에 키스 부대는 와디로 이동하여 이틀 밤 동안 숨어 있다가 떠났다. 아랍인 안내자는 악화되는 날씨 속에서 동행을 거부했다. 키스는 약 548.64m의 등반을 이끌었고, 칠흑 같은 어둠과 폭우 속에서 약 28.97km를 행군했다. 낮에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사흘 밤 22:00까지 목표 지점에서 몇 백 야드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23:59에 키스는 경비병과 다른 방어선을 지나 집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열린 창문이나 문을 찾을 수 없었던 키스는 캠벨의 뛰어난 독일어 실력을 이용하여 현관문을 두드리며 입장을 요구하게 했다. 그들은 문을 연 경비병을 공격했다. 캠벨이 그를 쏘았고, 키스는 몸싸움에서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키스는 근처 방의 문을 열고 안에서 독일인을 발견하고, 다시 급하게 닫은 다음,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다시 열었으며, 독일인 중 한 명에게 총을 맞았다. 본부 습격 당시 독일군은 단 한 발의 총알만 발사했다.[3]

키스는 밖으로 끌려갔지만 곧 사망했다. 직후, 캠벨은 부하 중 한 명에게 실수로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는 지휘권을 잭 테리 중사에게 넘기고 그 자리에 남았다. 테리는 습격 팀을 모아 17명의 병력과 함께 해변에서 레이콕과 합류하기 위해 후퇴했다. 이탈리아 소식통은 영국인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쿠크의 부대가 이탈리아 경찰 공수 부대 한 개 소대를 만났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군은 만수라 마을(키레네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 근처에서 영국 습격대를 찾고 있었다.

로버트 레이코크가 계획하고 제프리 키스가 참가를 열망하여 습격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레이코크는 모인 대원들에게 적진 깊숙이 잠입하기 때문에 생환 가능성은 극히 적으며 각오해 달라고 말했다.[4] 하지만 습격했으나 롬멜은 존재하지 않아 실패했다. 습격 지점은 추축군 병참 사령부였으며 롬멜은 있지도 않은 곳이었다. 레이코크는 살아남은 부대를 작은 조로 나누어 탈출했지만 생환한 것은 레이코크와 다른 1명뿐이었다.[5] 습격으로 전사한 제프리 키스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

3. 2. 이탈리아군과의 교전

한편, 쿡 중위가 이끄는 부대는 키레네 근처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탈리아 경찰 공수 부대와 교전했다. 1941년 11월 19일, 알프레도 산둘리 메르쿠로 소위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영국군 코만도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3] 영국군 코만도 부대는 동굴로 후퇴했으나, 결국 항복했다. 이탈리아군은 교전 중 3명이 부상을 입었다.[4]

4. 작전 결과 및 영향

플리퍼 작전은 에르빈 롬멜을 제거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1] 영국군은 2명이 전사하고 2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명이 탈출했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4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2] 작전 중 사망한 제프리 키스는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5]

레이콕 부대는 잠수함에 다시 탑승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다 발각되어 지역 이탈리아 헌병대(일부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와 교전을 벌였다. 레이콕은 조직될 대규모 병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병사들에게 흩어지라고 명령했다. 로버트 레이콕과 테리는 37일 만에, SBS 팀의 존 브리틀뱅크는 40일 만에 사막에서 생환했다.

롬멜은 영국군이 자신의 본부가 전선에서 약 402.33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고 한다. 롬멜은 부대와 함께 최전선 근처에 있는 것을 선호했다.[4]

4. 1. 작전 실패 원인

롬멜의 사령부는 원래 베다 리토리아에 있었으나, 몇 주 전 토브룩 근처로 이동했다. 롬멜은 격침된 보급선에 대한 대체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기 때문에 작전 당시 북아프리카에 없었다.[1]

1941년 11월 17일, 롬멜은 로마에 있었다. 영국 군사 정보부는 울트라 암호 해독을 통해 롬멜이 11월 18일에 아프리카로 돌아올 예정임을 알았지만, 작전 중지 명령을 전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2]

11월 14일과 15일 밤, 키이스 부대는 폴보트(접이식 카누)를 탄 2인 특별 보트 부대(SBS)의 안내를 받아 Khashm al-Kalbar(개의 코) 해변에 상륙했다. 이 해변은 추축군 후방 약 약 402.33km 지점의 하마마 근처였다.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장거리 사막 그룹에 의해 투입된 헤이즐든과 접촉했다. 악천후로 인해 레이콕 그룹은 상륙에 어려움을 겪었다. 레이콕과 7명의 대원만 상륙하고 나머지는 ''Talisman''에 고립되었다. 59명의 대원 중 34명만 남게 되어, 목표물 공격 부대는 4개에서 3개로 줄었다.[3]

5. 평가 및 교훈

플리퍼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군의 과감성과 용기를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강행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 강화, 신중한 의사 결정,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국정 운영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플리퍼 작전은 또한 한반도 유사시 특수부대의 적 지휘부 타격 작전(참수작전) 계획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된다.[1][2]

6. 관련 인물

로버트 레이코크는 플리퍼 작전을 계획했으며, 작전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부대를 이끌고 작전에 참여했다. 작전 실패 후,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본인 포함 단 2명만이 생환하였다.[3][4]

제프리 키스는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으며, 습격 부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작전 중 전사하였고,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5]

참조

[1] 서적 ミリタリー選書 29 第二次大戦の特殊作戦 イカロス出版 2008-12-05
[2] 서적 ミリタリー選書 29 第二次大戦の特殊作戦 イカロス出版 2008-12-05
[3] 서적 ミリタリー選書 29 第二次大戦の特殊作戦 イカロス出版 2008-12-05
[4] 서적 ミリタリー選書 29 第二次大戦の特殊作戦 イカロス出版 2008-12-05
[5] 서적 ミリタリー選書 29 第二次大戦の特殊作戦 イカロス出版 200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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