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드 프랑스 왕자 (1116년)
1. 개요
필리프 드 프랑스 왕자(1116년)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장남으로, 루이 6세의 아버지인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1129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2년 뒤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동생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고,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결혼 파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필리프는 정식 국왕이 아닌 공동 국왕이었기에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에서는 번호를 부여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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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필리프 |
|---|---|
| 왕가 | 카페 왕조 |
| 작위 | 프랑크인의 왕 (공동 통치) |
|---|---|
| 재위 기간 | 1129년 4월 14일 – 1131년 10월 13일 |
| 대관식 | 1129년 4월 14일, 랭스 |
| 선대 국왕 | 루이 6세 |
| 후대 국왕 | 루이 6세 |
| 출생일 | 1116년 8월 29일 |
|---|---|
| 사망일 | 1131년 10월 13일 (15세) |
| 사망 장소 | 파리 |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 아버지 | 루이 6세 |
| 어머니 | 아델라이드 드 모리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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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년 출생 -
리 신종
리 신종은 베트남 리 왕조의 제5대 황제로, 인종의 양자로서 즉위하여 송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참파, 크메르와의 군사적 충돌을 겪었으며 불교와 도교를 장려했다. -
1131년 사망 -
현숙황후
북송 휘종의 황후인 현숙황후는 흠성황후의 시녀였으나 뛰어난 용모와 시재로 휘종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고,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다 오국성에서 사망 후 휘종과 함께 영우릉에 합장되었다. -
1131년 사망 -
보에몽 2세
보에몽 2세는 보에몽 1세와 콩스탕스 드 프랑스 사이에서 태어나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을 역임했으며, 킬리키아 원정 중 사망하여 딸 콘스탄스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
프랑스의 군주 -
샤를 8세
샤를 8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으로, 브르타뉴 여공작과의 결혼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통합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사망하여 발루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프랑스의 군주 -
샤를 7세
샤를 7세는 백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를 재건했으나 아들과의 갈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2. 생애
필리프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장남으로,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카페 왕조의 관례에 따라 1129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고 경고를 무시하는 등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월터 맵은 그에 대해 "지나친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필리프는 센 강 근처에서 수행원들과 말을 타고 가던 중, 질주하던 말이 똥 무더기에서 튀어나온 검은 돼지 때문에 걸려 넘어지면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고로 필리프는 "사지가 끔찍하게 부러져 다음 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쉬제르는 왕실이 필리프의 비극적인 죽음에 절망했으며, "호메로스조차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왕국의 유력자들이 휩싸인 슬픔과 비탄의 깊이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필리프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2.1. 어린 시절과 공동 왕 즉위
필리프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장남이었다. 그는 아버지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어릴 적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카페 왕조의 관례에 따라 1129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젊은 국왕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고 경고를 무시하는 등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월터 맵은 그에 대해 "지나친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2.2. 성격과 행동
필리프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장남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장남의 이름을 짓는 관례에 따라, 필리프는 루이 6세의 아버지인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가문인 카페 왕조의 확립된 관례에 따라 1129년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 국왕으로 즉위했다. 젊은 국왕은 그 이후 아버지에게 기쁨을 거의 주지 못했고, 늙은 국왕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루이 자신이 따랐던 높은 기준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불순종적이 되었고, 꾸짖음이나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월터 맵은 그에 대해 "그는 그의 아버지가 걸었던 행동의 길에서 벗어나, 지나친 자만심과 폭압적인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모든 사람에게 짐이 되게 했다"고 말했다.
2.3. 죽음
필리프는 공동 왕으로 재위한 지 2년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센 강 근처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가던 중, 질주하던 그의 말이 부두의 똥 무더기에서 튀어나온 검은 돼지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 말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젊은 왕은 말의 머리 위로 튕겨져 나갔다. 이 낙마로 인해 "사지가 끔찍하게 부러져 다음 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역사학자 쉬제르는 왕실이 필리프의 비극적인 죽음에 완전히 절망했고, "호메로스조차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왕국의 유력자들이 휩싸인 슬픔과 비탄의 깊이와 정도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필리프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3. 유산
필리프는 정식 국왕이 아닌 공동 국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번호를 부여받지 않는다.
3.1. 루이 7세의 즉위와 제2차 십자군
필리프가 살아있는 동안 가족과 왕국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의 유산은 훨씬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예루살렘과 예수의 무덤을 방문하려는 꿈을 키웠다. 필리프가 죽자, 슬픔에 잠긴 그의 형제 루이는 그를 대신하여 가겠다고 맹세했다. 이 맹세는 루이 7세에게 1147년 참담한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할 이유를 제공했고, 예루살렘을 위해 안티오키아를 버릴 구실을 제공했다. 십자군은 양측에 많은 죽음을 초래했고, 안티오키아를 포기한 것은 전략적 실패였으며, 루이 7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결혼을 파경으로 이끄는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