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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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십자군은 1147년부터 1149년까지 진행된 십자군 원정으로, 에데사 백국의 함락에 대응하여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비롯한 많은 귀족과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확한 목표 없이 진행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리스본을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방에서는 룸 셀주크 군에게 패배하는 등 군사적으로 실패했다. 오히려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딘의 협력을 초래하여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돕는 결과를 낳았고, 십자군 국가의 세력 약화를 초래했다.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서유럽의 실망과 교황 및 베르나르도의 권위 실추로 이어졌으며, 이후 십자군 원정의 동력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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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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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십자군, 레콩키스타 |
시기 | 1145년 ~ 1150년 |
장소 | 이베리아 반도, 근동 (아나톨리아 반도, 레반트), 이집트, 중앙 유럽 |
결과 | 에데사 백국 재건 실패 이슬람과 십자군 국가 간 긴장 고조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 간 평화 협정 체결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 시작 리스본은 포르투갈인에게, 타라고나와 토르토사는 카탈루냐인에게 정복됨. 와그리아와 폴라비아 지역은 작센 십자군에 의해 정복됨.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테ンプル 기사단 병원 기사단 성묘 기사단 성 라자로 기사단 프랑스 왕국 플랑드르 백국 바르 공국 부르고뉴 공국 브르타뉴 공국 아키텐 공국 오베르뉴 신성 로마 제국 슈바벤 공국 바이에른 공국 하로트링겐 공국 상로트링겐 공국 보헤미아 공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몬페라토 후국 슈타이어 변경백국 사보이아 백국 프로방스 백국 동로마 제국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공국 시칠리아 왕국 교황령 시리아의 니자리파 이스마일파 국가 |
교전 세력 1 (레콩키스타) | 포르투갈 왕국 바르셀로나 백국 레온 왕국-카스티야 왕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
교전 세력 1 (벤드 십자군)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마이센 변경백국 홀슈타인 공국 하벨베르크 주교령 브레멘 대주교령 마인츠 대주교령 할버슈타트 주교령 뮌스터 주교령 올로모우츠 주교령 브란덴부르크 주교령 메르제부르크 주교령 중세 덴마크 왕국 (유틀란트 반도, 질란/스카니아) 폴란드 왕국 |
교전 세력 2 | 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 장기 왕조 부리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 파티마 칼리파국 시리아의 니자리파 이스마일파 국가 |
교전 세력 2 (레콩키스타) | 알모라비드 왕조 바다호스 왕국 발렌시아 왕국 무르시아 타이파 |
교전 세력 2 (벤드 십자군) | 오보트리테족 루티치족 포메라니아 공국 |
지휘관 | |
지휘관 1 (근동/아나톨리아) | 멜리장드 (예루살렘 여왕) 보두앵 3세 (예루살렘) 레몽 2세 (트리폴리) 레몽 드 푸아티에 루이 7세 엘레오노르 다키텐 토로스 2세 (아르메니아) 르노 드 샤티용 테오드윈 (추기경) 콘라트 3세 오타카르 3세 (슈타이어마르크)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티에리 달자스 스티븐 (잉글랜드 왕) 조프루아 4세 (앙주) 블라디슬라프 2세 (보헤미아) 로베르 드 크라온 에버라드 데 바레스 브와디스와프 2세 (폴란드) 니자리파 이스마일 국가의 알리 이븐 와파' 루지에로 2세 |
지휘관 1 (레콩키스타) | 아폰수 1세 (포르투갈) 알폰소 7세 (카스티야) 라몬 베렝게르 4세 |
지휘관 1 (벤드 십자군) | 하인리히 3세 (작센) 알브레히트 1세 (브란덴부르크) 크누드 5세 (덴마크) 스벤 3세 (덴마크)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 안셀름 (하펠베르크 주교) 콘라트 1세 (마이센) 프라이징의 오토 알퐁스 주르뎅 마티외 1세 (로렌) 고드프루아 3세 (루뱅) 하인리히 2세 (오스트리아) 아돌프 2세 (홀슈타인) |
지휘관 2 (근동/아나톨리아) | 마수드 1세 장기 누르 앗딘 사이프 앗딘 가지 1세 무크타피 알하피즈 |
지휘관 2 (레콩키스타) | 타슈핀 이븐 알리 이브라힘 이븐 타슈핀 이스하크 이븐 알리 압드 알무민 |
지휘관 2 (벤드 십자군) | 니클로트 기타 슬라브족 지도자 |
전력 | |
전력 1 | 독일군: 20,000명 프랑크군: 15,000명 |
전력 2 | 총 20,000명 |
피해 | |
피해 1 | 심각한 피해 |
피해 2 | 경미한 피해 |
2. 배경
1145년 모술의 아타베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면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성지 구원을 위한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요청으로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독려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독일 왕 콘라트 3세 등 많은 귀족과 사제, 시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반 시민 남자의 80%가 참가했고, 여자들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참여 열기가 뜨거웠다.[1] --
그러나 예루살렘은 아직 십자군 수중에 있었고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십자군과는 달리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확한 최종 목표는 없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의 목표는 에데사 백국 탈환, 장기 왕조 공격, 예루살렘 주변 이슬람 국가 정복, 이슬람교도 축출 등 여러 목표가 혼재되어 불분명했다.
한편, 기독교 세력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베르나르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콘라트 3세와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의 대립으로 루지에로 2세는 십자군에 불참했다.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 황제는 이슬람 세력과의 균형 유지를 위해 십자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도 연합하지 않고 각자 진군했다.
2. 1. 에데사 백국 함락
1145년 모술의 아타베그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성지 구원을 호소하며 십자군 결성을 주장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요청으로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독일왕 콘라트 3세,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등 많은 귀족과 사제가 참가했다.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았던 시민들도 열광하여, 베르나르도는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반 시민 남자의 80%가 참가했고, 여자들도 남지 않았습니다. 집을 비울 정도입니다."라고 보고했다.이베리아반도에서는 레콩키스타가 한창이었기에, 이베리아반도 방면 및 마르세이유, 제노바, 피사의 주민은 이쪽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다. 또한 독일 제후들이 원했던 북방 슬라브인의 정복도 북방십자군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지되고 있었고 직접적인 공격도 받지 않았기에, 십자군의 최종 목표는 명확하지 않았다. 에데사 백국 탈환, 장기 왕조 공격, 예루살렘 주변 이슬람 국가 정복 등 다양한 목표가 혼재되어 있었다.
기독교 측에서는 콘라트 3세와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의 대립으로 루지에로 2세가 불참했다.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이슬람교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기에 십자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도 따로 진군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과 1101년 소규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에는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 등 세 개의 십자군 국가가 건설되었다. 1109년에는 트리폴리 백국이 건설되었다. 에데사는 이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고, 가장 약하고 인구도 적어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잦은 공격을 받았다. 보드뱅 2세와 쿠르트네의 조슬랭은 1104년 하란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1122년에도 포로가 되었던 보드뱅과 조슬랭은 1125년 아자즈 전투 이후 에데사를 회복했지만, 1131년 조슬랭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조슬랭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143년 요한 2세 콤네누스와 풀크 왕이 모두 사망하면서 에데사는 강력한 동맹국을 잃게 되었다.
모술의 아타벡 젠기는 1128년 알레포를 점령하여 시리아의 권력 중심지를 장악했다. 젠기와 보드뱅 2세는 모두 다마스쿠스를 노렸고, 보드뱅은 1129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패배했다. 부리드 왕조가 통치하던 다마스쿠스는 1139년과 1140년 젠기의 포위 공격을 받았을 때 풀크 왕과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연대기 작가 우스마 이븐 문키드에 의해 협상되었다.[1]
1144년 말, 조슬랭 2세는 아르투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알레포에 대항하는 아르투크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거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에데사를 떠났다. 젠기는 1143년 풀크의 죽음을 틈타 북쪽으로 진군하여 에데사를 포위했고, 1144년 12월 24일 한 달 만에 에데사를 함락시켰다. 마나세 드 이에르주, 필립 드 밀리 등이 예루살렘에서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너무 늦었다. 조슬랭 2세는 투르베셀에서 백국의 잔존 지역을 계속 통치했지만, 점차 나머지 영토는 무슬림에게 점령당하거나 비잔티움 제국에 매각되었다. 젠기는 이슬람 세계에서 "신앙의 수호자"이자 "승리의 왕"인 ''알-말리크 알-만수르''로 칭송받았다. 그는 에데사의 남은 영토나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하지 않고 모술로 돌아갔으나, 1146년 노예에게 암살당했고, 알레포는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이 계승했다.
에데사 함락 소식은 1145년 초 순례자들과 안티오크, 예루살렘, 아르메니아의 사절단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자발라의 휴고 주교(Hugh of Jabala)는 이 소식을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에게 보고했고, 교황은 12월 1일에 교황령 ''Quantum praedecessoresla''을 발표하여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휴고는 또한 교황에게 동방 기독교 왕 프레스터 존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십자군 국가들에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비록 에우제니우스는 로마를 통치하지 못하고 비테르보(Viterbo)에 거주했지만,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제1차 십자군 원정보다 더 조직적이고 중앙 통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유럽의 가장 강력한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경로는 미리 계획되었다.
2. 2. 교황의 십자군 촉구와 베르나르도의 설교
1145년 모술의 아타베그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성지 구원을 호소하며 십자군 결성을 주장했다.[2] 교황의 요청으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열정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베르나르도의 설교에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독일왕 콘라트 3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등 많은 귀족과 사제들이 십자군에 참가했다. 일반 시민들도 열광하여, 베르나르도는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반 시민 남자의 80%가 참가했고, 여자들도 남지 않았습니다. 집을 비울 정도입니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베르나르도는 기사 수도회의 육체적, 정신적 전투를 높이 평가하고, 성지 순례와 이교도와의 싸움을 통해 속죄하고, 그 후 각자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이 십자군의 종교적 목적으로 구상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의 십자군”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이베리아 반도와 마르세이유, 제노바, 피사의 주민들은 레콩키스타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고, 독일 제후들이 원했던 북방 슬라브족 정복도 북방십자군으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는 예루살렘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고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십자군과는 달리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최종 목표가 없었다. 이 때문에 에데사 백국 탈환, 장기 왕조 공격, 예루살렘 주변 이슬람 국가 정복, 이슬람교도 축출 등 군사적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다.
한편, 베르나르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라트 3세와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의 대립으로 루지에로 2세는 불참했고,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 황제는 이슬람 세력과의 균형 유지를 위해 십자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는 함께 행동하지 않고 각자 따로 진군했다.
2. 3. 십자군의 목표 부재와 기독교 세력 간의 갈등
1145년 모술의 아타베그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성지 구원을 호소하며 십자군 결성을 주장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요청으로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독일왕 콘라트 3세를 포함한 많은 귀족과 사제, 시민들이 참가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반 시민 남자의 80%가 참가했고, 여자들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1]하지만 이 시기에는 다른 십자군과는 달리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최종 목표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고, 직접적인 공격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십자군의 목표가 에데사 백국 탈환인지, 장기 왕조 공격인지, 예루살렘 주변 다른 이슬람 국가 정복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슬람교도를 몰아내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기독교 세력 간의 갈등도 존재했다. 베르나르도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콘라트 3세와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대립하여 루지에로 2세는 불참했다.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 황제 역시 이슬람교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십자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도 따로 진군했다.
3. 경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스티븐 왕의 무정부 시대 때문에 조직적인 원정을 할 수 없었지만, 개별 기사들이 스코틀랜드와 플랑드르 군과 함께 배를 타고 출발했다. 이들은 바다호스 영토였던 리스본을 공격하던 포르투갈 왕 아폰수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1147년 10월 리스본을 함락시킨 후(리스본 공방전), 동쪽으로 이동하여 루이 7세와 합류했다.
콘라트 3세는 육로를 통해 헝가리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지만, 동로마 제국 측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홀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중 룸 셀주크 제국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Battle of Dorylaeum (1147)|도릴라에움 전투영어). 그 후, 소수의 생존자만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한편, 루이 7세는 콘라트 3세가 지나간 길을 뒤따라가는 형태가 되어,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에서 룸 셀주크 제국군에게 패배했다(Battle of Mount Cadmus|카드무스 산 전투영어). 겨우 안티오키아 공국에 도착하여, 왕비 엘레오노르의 삼촌이었던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으로부터 에데사 백작령 탈환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서유럽에서 온 군세는 겨우 예루살렘에 전군이 집결했지만, 사기는 낮았고, 이미 예루살렘에 온 것으로 순례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도 많았다. 또한, 현지의 십자군 국가(구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령, 예루살렘 왕국)로부터의 참가도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의 지휘하에 아크레에서 군사 회의가 열려, 정정 불안으로 비교적 약하다고 생각된 다마스쿠스의 지방 정권(부리 왕조)을 공격하기로 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많은 신하들은 이것을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반대했다. 다마스쿠스는 장기 왕조와 오래전부터 대립해 왔고, 1140년에 다마스쿠스 영주 무인 앗딘 우누르가 예루살렘군의 구원으로 잔기의 군대를 몰아낸 이래,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은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와 함께 성서에도 등장하는 성도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고, 이 원정을 정당화하는 성과로 삼고 싶어하는 서유럽 측에, 현지 십자군 국가 측은 결국 밀렸다.
1148년 7월 23일, 다마스쿠스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영주 우누르는 성 주변의 우물과 샘을 메우고, 대립하던 장기 왕조의 인물들(잔기의 뒤를 이은 누르 알-딘과 그의 형인 사이프 알-딘 등)을 포함한 여러 무슬림 국가들에 구원을 요청했다. 더 나아가, 서방에서 온 대규모 군대의 도래로 동요하고 있던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현지 십자군 국가들에게 "다마스쿠스 함락 후에는 십자군 국가들을 직할로 편입할 것이다"라는 문서를 보내 이간책을 썼다. 그 때문에 원래부터 수가 적었던 십자군은 누르 알-딘 등의 구원군과 다마스쿠스의 매복병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식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무슬림의 추가 원군의 위협을 부추긴 십자군 국가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불과 4일 만에 아무런 성과 없이 예루살렘으로 철수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십자군은 해산하여 각자 귀국길에 올랐다.
3. 1.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투 (레콩키스타)

1147년 봄, 교황은 레콩키스타의 일환으로 십자군을 이베리아 반도로 확장하는 것을 승인했다. 알폰소 7세는 무어인에 대한 원정을 제2차 십자군의 다른 원정과 동등하게 취급받을 수 있었다.[1] 같은 해 5월, 첫 십자군 분견대가 잉글랜드 다트머스를 출발하여 성지로 향했다. 악천후로 인해 이들의 배는 6월 16일 포르투갈 북부 도시 포르투 해안에 정박해야 했다. 그곳에서 십자군은 아폰수 1세 왕을 만났다.[2]
십자군은 도시의 약탈품과 포로들의 몸값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리스본 공격을 돕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일부는 1142년 리스본 공성전에서 포르투갈과 북부 십자군 연합군의 실패를 기억하며 주저했다. 1147년 리스본 공성전은 7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지속되었고, 도시 내부의 기근으로 인해 무어인 지배자들은 항복했다. 대부분의 십자군은 새로 점령한 도시에 정착했지만, 일부는 성지로 향했다.[2] 이들 중 일부는 더 일찍 출발하여 산타렝을 함락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후 신트라, 알마다, 팔멜라, 세투발을 정복하는 데에도 기여했고, 정복지에 정착하여 자손을 남겼다.
한편, 알폰소 7세, 라몬 베렝게르 4세 등은 카탈루냐, 레온, 카스티야, 프랑스 십자군의 혼성군을 이끌고 항구 도시 알메리아를 공격했다. 제노바-피사 해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는 함락되었다.[1]
라몬 베렝게르는 알모라비드 왕조 발렌시아와 무르시아의 타이파 왕국 영토를 침공했다. 리스본 함락을 도왔던 십자군 일부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교황 사절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의 제안으로 토르토사 공성전에 참여했다. 1148년 12월, 5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토르토사가 함락되었다. 이때 프랑스, 라인 지방, 플랑드르, 앵글로-노르만인 및 제노바 십자군의 도움을 받았다. 많은 십자군은 새로 점령한 도시 안팎의 땅을 받았다. 다음 해에는 세그레 강과 에브로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라가, 예이다, 메키넨사가 함락되었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스티븐 왕의 무정부 시대로 인해 조직적인 원정이 불가능했지만, 개별 기사들이 스코틀랜드와 플랑드르 군과 함께 배를 타고 출발했다. 이들은 바다호스 영토였던 리스본을 공격하던 포르투갈 왕 아폰수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1147년 10월 리스본을 함락시킨 후(리스본 공방전), 동쪽으로 이동하여 루이 7세와 합류했다.
3. 2.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진군
콘라트 3세는 육로를 통해 헝가리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지만, 동로마 제국 측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홀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중 룸 셀주크 제국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도뤼라이움 제2차 전투).[2] 그 후, 소수의 생존자만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한편, 루이 7세는 콘라트 3세의 행군 경로를 뒤따라 아나톨리아에서 룸 셀주크 제국군에게 패배했다(카드무스 산 전투).[2] 겨우 안티오키아 공국에 도착하여, 왕비 엘레오노르의 삼촌인 레몽에게 에데사 백작령 탈환을 제안받았지만, 예루살렘 순례를 우선시하여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2]
3. 3. 다마스쿠스 공방전

십자군은 과수원이 있어 지속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서쪽에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 1148년 7월 23일, 다라야에 도착했다. 다음 날, 무슬림들은 공격에 대비했고 다마스쿠스 외곽 과수원을 지나 진격하는 십자군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수비군은 모술의 사이프 알딘 가지 1세와 알레포의 누르 알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직접 십자군 진영을 공격했다. 십자군은 성벽에서 과수원으로 밀려났고, 매복과 게릴라 공격에 노출되었다.[2]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7월 27일 십자군은 도시 동쪽의 평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방어 시설이 덜 견고했지만 식량과 물이 훨씬 부족했다.[1] 일부 기록에 따르면 무인 앗딘 우누르가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방어력이 약한 위치로 이동하도록 뇌물을 주었고, 십자군이 귀환하면 누르 알딘과의 동맹을 깨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2] 한편, 누르 알딘과 사이프 알딘 가지 1세가 도착했다. 누르 알딘이 전장에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더 나은 위치로 돌아갈 수 없었다.[2] 현지 십자군 영주들은 포위 공격을 계속 거부했고, 세 명의 왕은 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1] 먼저 콘라트 3세, 그다음 나머지 군대가 7월 28일에 예루살렘 왕국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후퇴하는 동안 끊임없이 튀르크 궁수들의 추격을 받았다.
4. 결과 및 영향
제2차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리스본을 점령하여 레콩키스타에 기여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방에서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켰으며, 십자군 국가들은 주요 동맹 세력을 잃고 약화되었다.
- 이슬람 세력 강화: 십자군은 대립 관계에 있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 딘의 협력을 촉진했고, 이는 결국 누르 앗 딘의 시리아 통일로 이어져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강화했다.
- 십자군 국가 약화: 십자군 국가들은 무슬림 동맹 세력이었던 다마스쿠스를 잃었고, 서양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누르 앗 딘의 압박을 받게 되면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 서유럽의 반응: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서유럽에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에우제니오 3세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위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4. 1. 십자군의 실패와 이슬람 세력의 결집
교황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 중 가장 성과가 없었던 십자군이라고 말해도 타당할 것이다.-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딘 마흐무드를 협력하게 만들어, 후에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얻어 시리아를 통일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 토착화된 십자군 국가는 무슬림 중에서 동맹자였던 다마스쿠스를 잃었고, 이전부터 서양인과는 타협하지 않았던 누르 앗딘 마흐무드의 시리아 통일로 인한 압박을 받으면서 세력을 잃어간다.
-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리스본을 탈취하여 레콩키스타에 기여했다.
- 슬라브인에 대한 십자군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서양에서는 이 실패에 낙담하여,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가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지만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 이후 마지막 십자군까지, 현지의 요구를 무시한 서유럽 십자군의 폭주를 현지 십자군 국가가 막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원정 규모에 걸맞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끝나는 방식이 계속된다.
4. 2. 십자군 국가의 약화
제1차 십자군 원정과 1101년 소규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에는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의 세 십자군 국가가 건설되었다. 1109년에는 트리폴리 백국이 네 번째 국가로 건설되었다. 에데사는 이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고, 가장 약하고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잦은 공격을 받았다. 1104년 하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포로로 잡혔던 당시 에데사 백작 보드뱅 2세와 쿠르트네의 조슬랭은 1122년에도 두 번째로 포로가 되었다. 1125년 아자즈 전투 이후 에데사가 다소 회복되었지만, 1131년 전투에서 조슬랭이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조슬랭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어야 했지만, 1143년 비잔티움 황제 요한 2세 콤네누스와 풀크 왕이 모두 사망하면서 에데사는 강력한 동맹국을 잃게 되었다.한편, 모술의 아타벡인 젠기는 1128년 시리아의 권력 중심지였던 알레포를 점령했다. 젠기와 보드뱅 2세 모두 다마스쿠스를 노렸고, 보드뱅은 1129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패배했다. 부리드 왕조가 통치하던 다마스쿠스는 1139년과 1140년에 젠기가 도시를 포위했을 때 풀크 왕과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연대기 작가 우스마 이븐 문키드에 의해 협상되었다.[1]
1144년 말, 조슬랭 2세는 아르투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알레포에 대항하는 아르투크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거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에데사를 떠났다. 젠기는 1143년 풀크의 죽음을 이용하려 에데사를 포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1144년 12월 24일 한 달 만에 에데사는 함락되었다. 마나세 드 이에르주, 필립 드 밀리 등이 예루살렘에서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너무 늦었다. 조슬랭 2세는 투르베셀에서 백국의 잔존 지역을 계속 통치했지만, 점차 나머지 영토는 무슬림에게 점령당하거나 비잔티움 제국에 매각되었다. 젠기는 이슬람 세계에서 "신앙의 수호자"이자 "승리의 왕"인 ''알-말리크 알-만수르''로 칭송받았다. 그는 에데사의 남은 영토나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하지 않았고, 모술의 사건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다마스쿠스를 노렸으나, 1146년 노예에게 암살당했고, 알레포는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이 계승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십자군 국가, 특히 에데사의 약화를 초래했다.
4. 3. 서유럽의 실망과 권위 실추
교황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 중 가장 성과가 없었던 십자군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 딘을 협력하게 만들어, 후에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얻어 시리아를 통일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토착화된 십자군 국가는 무슬림 중에서 동맹자였던 다마스쿠스를 잃었고, 이전부터 서양인과는 타협하지 않았던 누르 앗 딘이 시리아 통일에 의한 압박을 받으면서 세력을 잃어갔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리스본을 탈취하여 레콩키스타에 기여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십자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서유럽은 이 실패에 낙담하여, 에우제니오 3세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5. 평가
제2차 십자군은 교황이 주도한 십자군 중 리스본 정복 등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성과를 제외하면 가장 성과가 없었던 원정이라고 할 수 있다.[1]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딘 마흐무드를 협력하게 만들어, 결국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차지하고 시리아를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돕는 결과로 이어졌다.
5. 1. 장기적인 영향
제2차 십자군은 교황이 주도한 십자군 중 리스본 정복 등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성과를 제외하면 가장 성과가 없었던 원정이라고 할 수 있다.[1]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딘 마흐무드를 협력하게 만들어, 결국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차지하고 시리아를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돕는 결과로 이어졌다.토착화된 십자군 국가는 무슬림 동맹 세력이었던 다마스쿠스를 잃고, 이전부터 서양인과 타협하지 않았던 누르 앗 딘의 시리아 통일에 의해 압박을 받으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리스본을 탈환하여 레콩키스타에 공헌했고, 슬라브인에 대한 십자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서유럽은 제2차 십자군의 실패에 낙담했고,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그들이 새로운 십자군을 호소했지만, 더 이상 이에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마지막 십자군인 제9차 십자군까지, 현지의 요구를 무시한 서유럽 십자군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원정 규모에 걸맞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참조
[1]
서적
Ousâma ibn Mounkidh, un émir syrien au premier siècle des croisades
http://gallica.bnf.f[...]
BnF
[2]
백과사전
St. Bernard of Clairvaux
Robert Appleton Company
1907
[3]
논문
The Aghānī Miniatures and Religious Painting in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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