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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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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경감영은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행정, 군사, 사법을 관할하던 관청이다. 1416년 함흥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영흥으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함흥으로 옮겨졌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폐지되어 함흥부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13도제 시행에 따라 함경남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함경감영에는 선화당, 징청헌, 내아, 지락정, 문소관, 영리청, 포정문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함경남도 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2. 연혁

1416년(태종 16년) 함흥에 감영이 설치되었다.[1] 1470년(성종 원년) 영흥으로 이전하였다가,[1] 1509년(중종 4년) 다시 함흥으로 이전하였다.[1] 1895년(고종 32년) 23부제 시행에 따라 감영이 폐지되고 함흥부(咸興府)로 개편되었다.[1] 1896년(고종 33년) 13도제 시행에 따라 함경남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1]

2. 1. 조선 전기

1416년(태종 16년) 9월, 함흥에 감영이 설치되었다.[1] 1470년(성종 원년) 2월, 감영을 영흥으로 이전하였다.[1] 1509년(중종 4년), 감영을 다시 함흥으로 이전하였다.[1]

2. 2. 조선 후기

1895년(고종 32년) 5월, 23부제 시행에 따라 감영이 폐지되고 함흥부(咸興府)로 개편되었다.[1] 1896년(고종 33년) 8월, 13도제 시행에 따라 함경남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1]

3. 감영 건물

함흥에 있던 함경감영에는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있었다.

건물명설명
선화당(宣化堂)종2품 관찰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징청헌(澄淸軒)관찰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내아(內衙)관찰사 가족의 생활 공간이었다.
지락정(知樂亭)감영 내 정자였다.
문소관(聞韶館)종5품 도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영리청(營吏廳)감영에서 일하는 아전의 업무 공간이었다.
포정문(布政門)감영 정문이었다.[2]
객사(客舍)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감영을 방문한 관원의 숙박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3]
함흥부(咸興府)함흥 지역의 행정, 사법, 치안을 담당하는 종5품 함흥판관(咸興判官)의 관청이었다.
중영(中營)감영 소속 군사를 지휘하는 정3품 중군(中軍)의 근무 공간이었다.
창의사(彰義祠)임진왜란 때 순절한 윤탁연(尹卓然), 유응수(柳應秀) 등 인물을 모신 사당이었다.


  • 감영 남쪽에 객사(客舍)가 위치했다.
  • 감영 서남쪽에 함흥부(咸興府)가 위치했다.
  • 감영 남쪽, 객사 북쪽에 중영(中營)이 위치했다.
  • 함흥성 남문 밖에 창의사(彰義祠)가 위치했다.

3. 1. 주요 건물


  • 선화당(宣化堂) : 종2품 관찰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 징청헌(澄淸軒) : 관찰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 내아(內衙) : 관찰사 가족의 생활 공간이었다.
  • 지락정(知樂亭) : 감영 내에 있던 정자였다.
  • 문소관(聞韶館) : 종5품 도사의 업무 공간이었다.
  • 영리청(營吏廳) : 감영에서 일하는 아전의 업무 공간이었다.
  • 포정문(布政門) : 감영 정문이었다.[2]

3. 2. 감영 인근 시설

함경감영 인근에는 객사, 함흥부, 중영, 창의사 등의 시설이 있었다. 객사는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감영을 방문한 관원의 숙박 용도로 사용되었고, 함흥부는 함흥 지역의 행정, 사법, 치안을 담당했다. 중영은 감영 소속 군사를 지휘하는 중군의 근무 공간이었으며, 창의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윤탁연, 유응수 등을 모신 사당이었다.[3]

3. 2. 1. 객사

객사는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감영을 방문한 관원의 숙박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3] 감영 남쪽에 위치하였다.

3. 2. 2. 함흥부

함흥 지역의 행정과 사법, 치안을 담당하는 종5품 함흥판관의 관청으로, 함경감영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3]

3. 2. 3. 중영

감영 소속 군사를 지휘하는 정3품 중군(中軍)의 근무 공간으로, 감영 남쪽, 객사 북쪽에 위치하였다.[3]

3. 2. 4. 창의사

임진왜란윤탁연, 유응수 등이 순절하여 이들을 모시기 위해 함흥성 남문 밖에 세운 사당이다.[3]

4. 감영 건물의 활용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선화당 등 일부 건물이 함경남도 도청으로 계속 활용되었으며,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선화당과 징청헌(징청각) 두 동이 보존되었다.[4]

4. 1.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선화당 등 일부 건물이 함경남도 도청으로 계속 활용되었다.[4]

4. 2. 광복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후에도 선화당 건물 등이 함경남도 도청으로 계속 활용되었으며,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도 선화당과 징청헌(징청각) 건물 두 동이 보존되었다.[4]

참조

[1] 문헌 함경도 영흥을 승격시켜 계수관으로 삼을 것을 청하다 http://sillok.histor[...] 《성종실록》 3권 성종 1년(1470년) 2월 17일 기사 1470-02-17
[2] 문서 관북포정아문(關北布政衙門)
[3] 문서 풍패관(豊沛館)
[4] 문서 선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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