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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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형식은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중국 헤이룽장성 빈 현으로 이주하여,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만주 사변 이후 하동 반일회를 조직하고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했으며,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며 지휘관을 역임했다. 1942년 8월, 만주국 토벌대와의 교전 중 전사했다.

허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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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허형식은 1909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헤이룽장성 빈 현으로 이주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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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주요 활동
초기 활동 (1929년 ~ 1934년)중국 공산당 입당, 항일 단체 조직 및 항일 투쟁
동북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1935년 ~ 1940년)동북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에서 주요 직책 역임, 항일 투쟁 주도
최후 (1941년 ~ 1942년)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지휘,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각 시기별 자세한 활동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2.1. 초기 활동 (1929년 ~ 1934년)

1929년경 하얼빈 근교에 거주하였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 주허와 빈 현에서 반제·반봉건 투쟁을 지도하였다. 만주 사변 이후에는 하동 반일회를 조직하여 총회장이 되었다. 1930년 5월 1일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여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하였다.

1932년 1월 만주성위 빈현특별당지부 선전위원으로서 빈현 일대에서 반일동맹회, 공산주의청년단, 자위대 등 항일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33년 3월 탕원현으로 가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 1,400여 명의 회원을 결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같은 해 10월 주하반일유격대가 창건되자 항일 선전과 항일 투쟁 의식 고취를 통해 항일유격대를 지원하였다.

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되었고, 같은 해 가을 제1대대장이 되었다.

2.2. 동북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1935년 ~ 1940년)

1935년 1월 말, 당세 확장 및 유격구 확대에 힘입어 합동지대는 지방청년의용군을 흡수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로 발전하였다. 허형식은 제3군 제2단의 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제3군 제3단 정치부 주임, 1936년 초 제3군 제3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1월, 중국 동북의 항일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되어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실현되었다. 허형식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은 같은 해 8월 1일 동북항일연군 제3군으로 개편되었다. 이어서 9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9월, 중국공산당 주하·탕원중심현위와 동북항일연군 3군 및 6군의 연석회의에서 확정된 방침에 따라, 같은 해 11월 3군 1사 선전대를 이끌고 소흥안령산맥 부근의 철력현으로 진출하였고, 뒤따라 온 3군 6사 및 9사 부대 200명과 합류하였다. 구도강·팔도강 등지에서 항일 선전과 대중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일본군 및 만주국군의 연합 토벌대 300여 명과 격전을 벌여 큰 승전을 거두었다.

1937년 2월, 동북항일연군 의동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었고, 1937년 6월 제9군 정치부 주임을 거쳐 1938년 6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사장(師長)이 되었다. 이 해 말까지 해륜·경안현 등지에서 투쟁하였다. 1939년 1월부터 중국공산당 북만성위 집행위원 겸 수해지구대표단 부지휘, 용남지휘부 책임을 맡아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되었고, 1940년 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으로 북만에서의 항일 투쟁을 주도하였다.

2.3. 최후 (1941년 ~ 1942년)

1941년 초, 제3로군은 참모장 허형식이 지휘하였다. 일제는 1941년 중반 이후 북만에서의 항일 무장투쟁 중 만주국 군경을 대거 동원하여 제3로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허형식은 생존한 제3로군 200여 명을 총괄 지휘하면서 대중 조직 사업과 유격전을 벌였다. 1940년, 리자오린, 펑중윈, 김책 등이 소련으로 간 후에도 소련으로 가지 않고, 제3로군 계열의 빨치산을 지휘했다. 같은 해 6월, 제12지대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1942년 7월 말 각처를 돌아다니며 소분대의 활동을 지도하던 중, 8월 2일, 호위병 수 명을 데리고 유격대 지도를 위해 귀가하던 중, 베이안 성 칭청 펑링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다리에 총탄을 맞아 보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부하들에게 본대로 돌아가라고 지시하고, 허형식은 남아 부하들의 퇴각을 엄호하며 사격을 계속했다. 부하들의 퇴각을 지켜본 후, 8월 3일 아침 경성현 청풍령에서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