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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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레티는 캅카스 지역에 존재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기원전 5세기 이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북부 아르메니아에서 이주해 온 헤르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에 통합된 후 조지아인으로 동화되었다. 787년 독립 공국으로 발전하여 893년 하맘 왕자 시기에 세력을 확장했으나, 카헤티 왕국과의 갈등, 살라르 왕조의 지배를 거쳐 1020년대 카헤티-헤레티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후 조지아 왕국 내 공작령으로 존속하다가 1466년 조지아 군주국 해체 이후 카헤티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점차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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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티 | |
---|---|
기본 정보 | |
국명 | 헤레티 왕국 |
상태 | 왕국 |
존속 기간 | 893년 ~ 1020년대 |
시대 | 초기 중세 |
수도 | 샤키 |
공용어 | 조지아어 코카서스 알바니아어 |
종교 | 조지아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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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이전 국가 | 헤레티 공국 |
이후 국가 | 카케티-헤레티 왕국 |
건국 | 893년 |
멸망 | 1020년대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군주 | 왕 |
현재 국가 | |
현재 영토 |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
2. 역사
헤레티는 기원전 5세기경 이베리아 왕국의 통치 하에 있던 지역으로, 조지아인으로 완전히 융합된 헤르족(에르족)이 살던 곳이다. 조지아 자료에 따르면, 헤레티라는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도시를 세운 전설적인 족장 헤로에스에서 기원했다고 한다.[2]
아랍 점령자들에 대한 투쟁에 공헌한 대가로, 740~750년대에 카르틀리 통치자는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가문에게 주었다. 이후 헤레티 군주들은 787년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을 세웠고, 893년 하맘 왕자가 즉위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헤레티의 첫 통치자 사흘 슴바테안은 822년 코카서스 알바니아 왕가를 학살하고 아란의 샤를 선언했다.[2] 그의 아들 아다르나세 1세, 손자 그리고리 하맘이 뒤를 이었고, 893년 그리고리 하맘은 왕으로 즉위했다.
이웃 카케티 공국의 통치자 카케티의 퀴리케 1세는 압하지아의 콘스탄틴 3세와 동맹을 맺고 915년 아다르나세 2세 왕에게 대항했으나, 아다르나세 2세는 곧 영토를 회복했다. 이후 살라리 왕조에게 코카서스 알바니아를 잃었지만, 아다르나세 2세는 디나르 여왕과 결혼하여 아들 이쉬카니크를 낳았다.
이쉬카니크 통치 하에 헤레티는 다일람 공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디나르 여왕은 헤레티를 조지아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950년, 이쉬카니크는 살라리 왕조의 권력 투쟁을 틈타 독립을 회복했다.
다음 통치자 요한은 캅카스 알바니아와 동조지아 산악 지방을 합병하여 왕국을 확장했으나, 959년 사망 후 왕조가 끝나고 카케티에 흡수되었다.
이후 헤레티는 카케티의 다비드와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의 경쟁 지역이 되었다. 1020년대 퀴리케 3세는 헤레티를 카헤티-헤레티 왕국에 흡수했고, 1104년 다비드 4세는 헤레티를 조지아 왕국의 공작령으로 만들었다. 1466년 조지아 군주국 분열 후 헤레티는 카케티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역사에서 점차 사라졌다.
2. 1. 초기 역사
헤레티 지역에는 헤르족(에르족), 수즈족, 칠브족, 르빈족이 가장 먼저 거주했다. 이 부족들은 기원전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북부 아르메니아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세기에 북부 아르메니아의 에르족은 대규모로 사라졌거나 동화되었고, 그 후손들이 헤레티를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에 따르면, 에르족은 현대 바이나크인, 바츠비, 역사상의 말크족과 혈족인 나크인으로 추정된다.[1]5세기에 이 지역은 이베리아 왕국에 점진적으로 합병되어 조지아인으로 완전히 융합되었다. 조지아 자료에서 헤레티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헤레티라는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헤레티의 도시를 설립한 족장 헤로에스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아랍 점령자들에 대항한 투쟁에 대한 공헌으로, 카르틀리의 통치자 아르칠은 740년대~750년대에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귀족 가문에게 주었다. 이후 헤레티의 군주들은 봉토를 확장하여 787년에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을 이루었다. 893년에는 하맘 왕자가 왕좌에 오르면서 공국은 더욱 강력해졌다.
헤레티 왕국의 세력이 커지자, 이웃 카케티 공국의 통치자 크비리케 1세는 압하스의 콘스탄티네 3세와 동맹을 맺고 915년에 헤레티의 아다르나세 2세 왕에게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펼쳤다. 동맹국들은 헤레티를 점령하고 분할했지만, 아다르나세 2세는 곧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았다. 그의 아들 이쉬카니크는 어머니 디나르와 함께 나라를 통치했으며, 이웃 살라르 왕조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950년, 이쉬카니크는 살라리즈 왕국 내 권력 투쟁을 틈타 독립을 회복하고 조공을 중단했다. 이 시기에 헤레티인들은 단성설 신앙을 버리고 조지아 정교로 개종했다.
다음 통치자 존(951~959년)은 이전 알바니아 왕국의 지역과 동조지아 산악 지방 차나레티를 왕국에 추가했다. 그가 죽은 후 지역 왕조는 사라지고 왕국은 카케티의 시골 주교 크비리케 2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이 지역은 단일 군주국을 염원하던 다비드와 조지아의 왕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 사이의 경쟁 지역이 되었다.
2. 2. 중세
기원전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통치 하에 들어간 헤르족(에르족)은 북부 아르메니아에서 이주해 온 헤레티인들의 선조였다. 이들은 이베리아 왕국에 점진적으로 통합되었고, 5세기에 조지아인들로 완전히 융합되었다. 조지아 자료에서 헤레티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전설에 따르면, 헤레티라는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헤레티의 도시(후일 코란타)를 설립한 족장 헤로에스에서 기원했다고 한다.아랍 점령자들에 대항한 투쟁에 공헌한 대가로, 카르틀리의 통치자 아르칠은 740년대~750년대에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귀족 가문에게 주었다. 이후 헤레티의 군주들은 787년에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을 이루었고, 893년에는 하맘 왕자가 왕위에 오르며 세력을 확장했다.
헤레티 왕국의 성장에 놀란 이웃 카케티 공국의 통치자 그비리케 1세는 915년에 압하스의 콘스탄티네 3세와 동맹을 맺고 헤레티의 아다르나세 2세 왕에게 대항했다. 동맹군은 헤레티를 점령하고 분할했지만, 아다르나세 2세는 곧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았다. 그의 아들 이슈카니크는 단성설을 버리고 조지아 정교로 개종했으며, 950년에는 살라르 왕조의 권력 투쟁을 틈타 독립을 회복했다.
다음 통치자 존은 이전 알바니아 왕국의 지역과 동조지아 산악 지방 차나레티를 추가하며 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지역 왕조는 끝나고 왕국은 카케티의 시골 주교 크비리케 2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헤레티는 바그라트 3세와 카케티의 크비리케 3세 사이의 경쟁 지역이 되었고, 1020년대에 크비리케 3세는 헤레티를 그의 "카크와 란의 왕국"으로 흡수했다. 건설자 다비트가 1104년에 왕국을 통제하면서 헤레티는 조지아 왕국의 공작령이 되었다. 1466년 통일 조지아 군주국이 분열된 후, 헤레티는 카케티 왕권 아래로 들어갔고, 이후 역사 기록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2. 3. 카헤티-헤레티 왕국 시기
그리하여, 그 지역은 점진적으로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한 공국 형태로 합병되었고, 마침내 그 지역 사람들은 조지아인들로 완전히 융합되었다. 조지아 자료들에서 헤레티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때가 그 때였다. 전통 기록에 따르면, 속국의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헤레티의 도시(후일에 코란타로 알려짐)를 설립한 타르가모스의 아들인 전설적인 족장 헤로에스에서 기원되었다고 한다. 아랍 점유자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카르틀리의 통치자(에리스타바리) 아르칠은 740년대~750년대에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귀족 가문에게 주었다. 마지막 에리스타바리들인 존과 주안셰르가 죽은 후에, 헤레티의 군주들은 그들의 봉토들을 확장했으며, 787년에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삼타브로)을 이뤘다. 그 공국은 893년에 들어 하맘 왕자가 왕좌에 오름이 허락되어 의미심장한 세력과 명성을 얻었다.[2]헤레티 왕국의 증가하는 세력에 놀란, 이웃 카케티 공국의 통치자 크비리케 1세(891~918년)는 압하지아의 콘스탄틴 3세와 동맹을 맺었고, 915년에 헤레티의 아다르나세 2세 파트리키오스 왕(897~943년)에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펼쳤다. 동맹국들은 그 땅을 점령하여 분할했지만, 아다르나세는 곧 잃어버린 지역들을 재정복했다.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이쉬카니크(943~951년)는 그의 모친 디나르 (대 마기스테르 구르겐 4세의 누이, 클라르제티의 왕자(918~941년))와 함께 나라를 통치했다. 그들의 통치 하에서, 헤레티는 강력한 이웃 나라인 살라르 왕조(이란령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통치되는 델리암의 공국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 950년에, 이슈카니크는 살라리즈 왕국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을 틈타 독립을 회복하고 공물 진상을 중지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헤레티인들은 단성설 신앙을 버리고 조지아 정통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
그 다음 헤레티의 통치자 요한(아오아네 세네케림, 951~959년)은 그의 왕국에 이전 알바니아 왕국의 지역과 동조지아의 산악 지방 차나레티를 더했다. 그가 죽은 후에, 지역 왕조는 사라졌고 왕국은 카케티의 시골 주교 크비리케 2세에게 넘어갔다.
2. 4. 조지아 왕국 시기
그리하여, 그 지역은 점진적으로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한 공국의 형태로 합병되었고, 마침내 그 지역 사람들은 조지아인들로 완전히 융합되었다. 조지아 자료들에서 헤레티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때가 그 때였다. 전통의 기록에 따르면, 속국의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헤레티의 도시(후일에 코란타로 알려짐)를 설립한 타르가모스의 아들인 전설적인 족장 헤로에스에서 기원되었다고 한다.[2] 아랍 점유자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공헌한 대가로, 카르틀리의 통치자(에리스타바리) 아르칠은 740년대~750년대에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귀족 가문에게 주었다. 마지막 에리스타바리들인 존과 주안셰르가 죽은 후에, 헤레티의 군주들은 그들의 봉토들을 확장했으며, 787년에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삼타브로)을 이뤘다. 그 공국은 893년에 들어 하맘 왕자가 왕좌에 오름이 허락되어 의미심장한 세력과 명성을 얻었다.헤레티 왕국의 첫 번째 기록된 통치자인 사흘 슴바테안은 822년에 코카서스 알바니아(미흐라니드) 왕가를 학살하고 스스로를 "아란의 샤"라고 선언하여 조로아스터교 바바크 호람딘을 배신함으로써 칼리파트의 호의를 얻었고, 그는 아란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사흘은 나중에 아랍의 불신을 샀고 체포되어 바그다드로 보내졌으며, 그의 아들 아다르나세 1세와 손자 그리고리 하맘이 뒤를 이었다. 공국은 893년까지 상당한 힘과 위신을 얻었고, 그리고리 하맘 공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2]
헤레티 왕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경고를 받은 이웃 카헤티 공국의 통치자 카케티의 퀴리케 1세는 압하지아의 콘스탄틴 3세 왕과 동맹을 맺고 915년에 아다르나세 2세 파트리키오스 왕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동맹군은 그 땅을 점령하여 분할했지만, 아다르나세 파트리키오스가 곧 잃었던 땅을 재정복하여 잠시 동안만 지속되었다. 왕국은 카헤티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살라리 왕조(이란 아제르바이잔) 이웃에게 코카서스 알바니아를 잃었다. 아다르나세는 타오의 아다르나세 3세의 딸인 디나르 여왕과 결혼하여 아들 이쉬카니크를 두었다.
이쉬카니크는 아다르나세 파트리키오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이쉬카니크 치하에서 헤레티는 더 강력한 이웃인 다일람 공국, 즉 살라리 왕조가 통치하는 공국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디나르 여왕은 아들 이쉬카니의 통치 기간 동안 헤레티를 조지아 정교회로 개종시키고 10세기에 코카서스 알바니아 교회의 오리엔트 정교회 신앙을 버렸다. 950년, 이쉬카니크는 살라리 국가의 격렬한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조공을 중단하고 독립을 회복했다.
다음 헤레티 통치자인 요한 (이오아네 세네케림, 951–959)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헤레티 왕국은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오른쪽 강둑을 합병한 후 힘과 위신의 절정에 도달했다. 아르메니아 역사가 모브세스 카간카트바치는 그를 "알바니아 왕국의 복원자"라고 부른다. 이후 그는 카헤티의 일부를 합병하고 "차나르의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요한은 살라리 왕조의 대표자들과 타오의 다비드 3세 쿠로팔라테스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디나르 여왕처럼 그는 자신의 왕국 개종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959년에 상속자 없이 사망했다.
그 후, 지역 왕조의 실재는 끝난 듯 했고 왕국은 카케티의 시골 주교 크비리케 2세 밑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그 지역은 모든 조지아의 영토를 단일 군주국으로 가져오기를 염원하던 그의 계승자 다비트(976–1010)과 조지아의 왕 바그라트 3세와의 경쟁 지역이었다. 그 다음 카케티의 통치자로 이미 왕의 칭호가 있던 크비리케 3세 대제(1010~1037년)는 1020년대에 마침내 헤레티를 그의 "카크와 란의 왕국"으로 흡수했다. 조지아의 왕 다비드 4세가 1104년에 왕국을 그의 통제 하에 두었을 때 헤레티는 조지아 영토 내에서 ''사에리스타보''(즉, 공작령)가 되었다.
2. 5. 후기 역사
헤레티에는 헤르족(에르족), 수즈족, 칠브족, 르빈족이 가장 먼저 거주했다. 이 부족들은 기원전 5세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이들은 북부 아르메니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현대 바이나크인들과 혈족인 나크인으로 여겨진다.5세기에 이 지역은 이베리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주민들은 조지아인으로 완전히 융합되었다. 조지아 자료에서 헤레티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전설에 따르면, 헤레티라는 이름은 알라자니강에 헤레티의 도시를 설립한 족장 헤로에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740년대~750년대에 아랍 점유자들에 대항한 공헌으로 카르틀리의 통치자는 헤레티를 바그라티오니 가문에게 주었다. 787년에는 섀키를 수도로 독립 공국을 이루었고, 893년에 하맘 왕자가 왕위에 오르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웃 카케티 공국의 통치자 그비리케 1세는 압하스의 콘스탄티네 3세와 동맹을 맺고 915년에 헤레티의 아다르나세 2세 왕에게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펼쳤으나, 아다르나세 2세는 곧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았다. 그의 아들 이슈카니크는 살라르 왕조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지만, 950년에 독립을 회복하고 조지아 정통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
그 다음 통치자 존은 이전 알바니아 왕국의 지역과 동조지아의 산악 지방을 추가하며 왕국을 확장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지역 왕조는 끝나고 왕국은 카케티의 시골 주교 크비리케 2세 밑으로 들어갔다.
이후 이 지역은 카케티의 다비드와 조지아의 왕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 사이의 경쟁 지역이 되었다. 크비리케 3세 대제는 1020년대에 헤레티를 그의 "카크와 란의 왕국"으로 흡수했다. 건설자 다비트가 1104년에 왕국을 통제하면서 헤레티는 조지아 왕국의 공작령이 되었다. 1466년에 통일 조지아 군주국이 분열된 후, 헤레티는 카케티 왕권 아래로 들어갔고, 이후 역사 기록에서 점차 사라졌다.
헤레티의 첫 번째 기록된 통치자인 사흘 슴바테안은 822년에 코카서스 알바니아 왕가를 학살하고 스스로를 아란의 샤라고 선언했다.[2] 그의 아들 아다르나세 1세와 손자 그리고리 하맘이 뒤를 이었다. 공국은 893년까지 상당한 힘과 위신을 얻었고, 그리고리 하맘 공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카헤티 공국의 통치자 카케티의 퀴리케 1세는 압하지아의 콘스탄틴 3세 왕과 동맹을 맺고 915년에 아다르나세 2세 파트리키오스 왕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왕국은 카헤티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살라리 왕조에게 코카서스 알바니아를 잃었다. 아다르나세는 타오의 아다르나세 3세의 딸인 디나르 여왕과 결혼하여 아들 이쉬카니크를 두었다.
이쉬카니크 치하에서 헤레티는 다일람 공국의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디나르 여왕은 아들 이쉬카니의 통치 기간 동안 헤레티를 조지아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950년, 이쉬카니크는 살라리 국가의 격렬한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조공을 중단하고 독립을 회복했다.
다음 헤레티 통치자인 요한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헤레티 왕국은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오른쪽 강둑을 합병한 후 힘과 위신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959년에 상속자 없이 사망했다.
이 지역은 당시 카헤티의 통치자 카케티의 다비드와 모든 조지아 영토를 단일 군주국으로 통합하려는 조지아 왕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 사이에서 다투어졌다. 위대한 퀴리케 3세는 1020년대에 헤레티를 자신의 카헤티-헤레티 왕국에 흡수했다. 다비드 4세가 1104년에 왕국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을 때 헤레티는 조지아 영토 내에서 ''사에리스타보''가 되었다. 헤레티에 대한 조지아 통치는 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호라즘 제국 및 일 칸국의 통치에 의해 중단되었다. 1466년 통일된 조지아 군주국이 최종적으로 해체된 후 헤레티는 카헤티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 통치자
통치자 | 통치 기간 | 칭호 |
---|---|---|
사흘 에란샤히크 | 815년~840년 | 공작 |
아다르나세 1세 | 840년~865년 | 공작 |
그리고르 하맘 | 865년~897년 | 왕 |
아다르나세 2세 | 897년~943년 | 왕 |
이쉬하니크 | 943년~951년 | 왕 |
존 세네케림 | 951년~959년 | 왕 |
디나르 | 1010년대 | 여왕 |
4. 문화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헤레티의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해당 섹션에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T. 파푸아슈빌리의 저서 두 권의 제목(헤레티 역사 문제ka, 란 왕국과 카흐스ka)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조
[1]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2]
문서
Каганкатваци, кн. III, гл. 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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